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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이탈리아 카레지 별장과 조선 송석원의 차이점

by 전경일 2023. 5. 22.

역사상 암흑시대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들은 로마가 만족(蠻族)의 침략을 받은 시대를 조잡한 장막에 가려진 시대라고 했고, 그것이 이어진 과거 10세기를 잠자고 있던 시대라고 명명했다.

 

이전 시대가 이렇게 단정 내려진 데에는 앞으로 열어가야 할 시대에 대한 자신감이 반영되어 있다. ()시대를 평가 절하해 버렸으니 그 보다 나은 시대를 만들어야 할 책임도 뒤따랐다. 일단 장막을 걷어 올리고 르네상스 인들은 위대한 로마의 문학, 유적 및 그 밖의 갖가지 가치 있는 것들에 새 생명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역사 창조의 웅장한 작업이 하루가 다르게 벌어진 것이다. 이런 대역사는 그들의 기쁨이자 기필코 수행해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또한 학문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콜럼부스의 대탐험을 가져온 것도 중세 암흑시대에 아주 잊혔다가 부활한 고전 수학 덕분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연구에 훌륭한 저작을 남긴 존 R. 해일에 의하면, 이탈리아인들은 모든 학예 분야에 걸쳐 구름처럼 나타난 천재들의 힘과 함께 자신감을 갖고 이 역사적인 일에 임했다. 이런 찬사는 15세기 중엽 마테오 팔미에리가 과거 1000년간 유례없을 만큼 재능 많은 사람들이 즐비한 시대에 태어났음을 신에게 감사드리고 싶다고 헌창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영광스런 부흥에 앞장 선 대표적인 가문은 메디치가()였다. 이 집안은 인재를 통해 웅장한 계획을 관철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은행사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를 문화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 합당한 사업을 시행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피렌체의 문화와 예술 진흥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산마르코 수도원을 재건하여 도서관을 만들었고, 1439년 페라라에서 열릴 예정이던 동방과 서방 교회의 지성인과 성직자 모두가 모이는 공의회를 피렌체에서 열리게끔 교섭해 방대한 양의 서적과 동방의 지식이 피렌체에 모이도록 했다. 유럽 문명에 이 도서관의 장서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코시모는 피렌체 교외 카레지(Careggi)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별장을 제공해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Accademia Platonica, 플라톤 아카데미)를 창설하였고, 고전학자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학장 자리에 앉혔다. 피치노는 지구의 턱과 이빨, 그리고 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살아 있는 존재로서 지구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것은 고대 아테네에서 플라톤이 창설한 아카데미아가 부활한 것으로 고대 철학과 기독교를 하나로 묶는 신플라톤주의의 탄생이었다.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에는 피렌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예술과 문학과 인문주의 정신이 메마른 지식의 대지를 흠뻑 적셔 나간 것이다. 이탈리아인에 의해 재발견된 플라톤과 신 플라톤 철학은 콜레트의 신에 대한 사고방식, 스펜서의 사랑에 대한 사고방식, 셰익스피어의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 인간(사랑), 자연 - 더 이상 인문이 추구할 바는 없었다.

 

코시모의 손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인문학자와 예술가의 열렬한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469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하며 도시와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그는 학자들에게 거의 경외에 가까운 존경심을 보이며 후원했고, 이에 질세라 학자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품으로 보답했다. 또한 피렌체의 학문과 예술 발전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플라톤 아카데미를 발전시켜 해마다 플라톤의 생일이 되면 카레지 별장에서 학자들이 참여하는 철학의 향연을 베풀었고, 피사 대학을 지원해 대학이 국가에서 받는 보조금의 두 배에 해당하는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 대학은 유럽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유일한 대학이었으며, 유럽 각지에서 온 학생들은 이곳에 모여 그리스어를 공부하면서 고대는 마침내 르네상스 속에 부활하게 된다.

 

이들은 플라톤의 저작을 라틴어로 옮겼다. 또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 강의에 정통한 아뇰로 폴리차아노와 천재적 철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 같은 쟁쟁한 인문학자들은 매일같이 로렌초 대공과 저녁 식사를 나누며 담론을 나누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로마와 나폴리에도 아카데미아가 생겨났다. ‘라틴으로 돌아가는[애드 폰네스(Ad Fontes)]원천 문화·정신 역량이 암흑시대의 불을 환히 밝힌 것이다.

 

로렌초 공의 후원으로 미켈란젤로의 예술도 탄생했다. 최고의 장인 베로키오는 사실 거의 모든 작품을 로렌초 공을 위해 제작했고, 젊은 시절의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만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베누스의 탄생이나프리마베라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필리피노 리피, 루카 시뇨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등도 모두 로렌초의 은덕을 입었다. 당시 새롭게 해석된 고전 수학이 부활하며 철학, 경제학, 전술, 작곡기법, 회회의 투시화법, 트럼프나 마작, 당구 같은 놀이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보다 밑바탕인 문제, 즉 금융과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이 자연스럽게 만나며 창조와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평범함으로부터 일탈과 학문적 분방함이 창의적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위)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의 산실인 이탈리아 피렌체의 카레지 별장(위)에서는 매일같이 인문학자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아폴로니오 디 조반치가 1460년에 그린 세밀화(아래)에는 비아 라르가의 메디치 저택에서 벌어지는 축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지적 향연을 통해 한 국가의 미래는 물론, 인류사적 등불을 환희 밝혔다. Source: photo by wikipedia

 

이탈리아에 카레지 별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1786(정조 10) 여름에 결성된 시문학동인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또는 옥계시사(玉溪詩社)라 불리는 모임이 있다. 이 시사는 규장각 서리들을 중심으로 결성돼 30여 년간 이어진 문화예술인 동호인 집단이다.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김인문 등 걸출한 한양의 문화 리더들이 모여들었다. 그에 질세라 역관(통역사), 의관(의사), 율관(변호사), 음양관(천문학자), 산관(수학자), 화원(화가)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여기서 길거리 문학’, 즉 위항문학(委巷文學)이 생겨났다. (()굽었다는 뜻이고, ()거리 또는 마을이란 뜻이니, 중인(中人)들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조선 중기를 풍미하는 문화예술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문화로써 승부를 걸었다. 송석원시사 시선집인옥계사(玉溪社)발문에는 장기나 바둑으로 벗을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하여 예술에 놀아나는 것만을 모임의 가치로 삼았다.

 

인왕산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물가 바위에는 추사 김정희가 써준 송석원(松石園)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배경으로 문화예술인 동인인 송석원시사가 벌어졌다. 창립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중인들로 이들은 서로의 처지와 나이가 비슷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이 그림은 1791년 유월 유둣날 달밤에 있었던 송석원시사 모임 광경으로 ‘6월 찌는 밤에 구름과 달이 아스라하니, 붓끝의 조화가 사람을 놀라게 하여 아찔하게 하는 구나라는 화제가 써져 있다. 중인들의 문학이 보다 국가적 후원 대상이 되었더라면 이후 조선의 운명은 물론 오늘날 우리의 역사적 행로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 차이야말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조선의 영정조 시기의 차이라 하겠다.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종이에 담채, 25.6x31.8cm, 개인 소장.

 

옥계시사가 벌어진 1791년 음력 6월 보름날의 야간 모임을 전하는 김홍도와 김인문의 그림과 글을 보면 이들의 문화적 풍취가 한 시대를 압도할 만큼 도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무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골짜기는 은은한 달빛에 정취가 그윽하네. 개울엔 아지랑이 홀연히 피어나 여름밤의 흥취를 한껏 무르익게 하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 건너 뜻 맞는 아홉 사람이 옥계 옆에 모였으니 모인 자리에는 촛불이 켜지고 아담한 술상이 들어오네. 모인 사람들은 가져온 좋은 술에 취해 더러는 팔을 괴고 눕고 더러는 술기운에 자갈 위를 비틀거리네.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둘러 앉아 흐뭇한 마음으로 옥계의 아름다움을 다투어 노래하네.”

 

옥계시사 백일장은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 하는 대단한 자리였다. 해서 세상에 시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송석회에 참여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백전(白戰)이라 불린 백일장은 수백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는데, 최고의 문장가들이 심사를 맡아 재상들도 백전 심사를 맡는 것을 영예로 알 정도였다.

 

이 시문학동인 리더는 서당 훈장 천수경이었다. 그는 1791년에 시사에서 읊은 시를 모아옥계아집첩(玉溪雅集帖), 1797년에는 333명이나 되는 시인들의 작품을 수록한풍요속선(風謠續選)을 간행하여 위항문학이 성장한 자취를 보여주었다.

 

대중과 함께 한 문풍도 잠깐,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을 만치 탁류로 흘러 그 터는 마침내 한일합방에 옥새를 찍어 준 순종비 순종효왕후의 백부 윤덕영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 호화저택을 짓고 송석원이라 명명하였다. 조선 문화예술 공간이 매국으로 치부한 친일파의 손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종국에는 이름까지 차용된 것이다. 국가적 관심과 국력 신장이 함께 했더라면 송석원은 피렌체의 카레지 별장만큼이나 위대한 문화적 거푸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다. 또 이탈리아인들이 새로운 사상의 탐색과 옛 사상의 재발견을 통해 앞의 시대를 밀고 나갔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소외 계급의 불만과 울분을 토로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조만한 도래할 격변의 시대를 밀고 나갈 추진력도 한참이나 부족했다. 이탈리아인들이 암흑시대를 밝혔다면, 우리는 암흑시대로 기어 들어갔다. 그 차이는 앞으로 맞게 될 혹독한 암흑시대를 예비한 것이었다.

 

이런 점은 문화가 경쟁력인 오늘날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할 바다. 어느 문화와 참여 정신은 천세토록 후세의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어느 문화는 짓눌려 기를 못 편 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다. 물론 당대 사람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넓고 깊게 문화적으로 바라보는 건 결코 문화 차원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소한 100년의 역사와 운명을 결정짓는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