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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종자를 통해 보는 인류사의 위대한 가르침

by 전경일 2017. 1. 5.

종자를 통해 보는 인류사의 위대한 가르침

 

농부는  굶어 죽을지라도 씨앗을 먹지 않는다

아직 눈뜨지 않는 씨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세상의 모든 씨앗을 결코 짓이기지 않는다

 

 

오래 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서 밀을 재배했고, 중국인들은 황하와 양쯔 강 변에서 벼를 재배했다. 마야족은 유카탄 평원에서 옥수수를 심었고, 잉카 사람들은 고랭지에서 감자를 재배했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확인할 수 있는 한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역 특유의 기본 작물을 재배했다는 것과, 곡류는 씨앗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종자=씨앗’이며 동시에 식량이다. 식용으로 섭취된 이후 씨앗은 한시도 그 긴요성이 간과된 적이 없다. 

 

역사적 사실로 식량 문제에 소홀했거나,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한파나 한발이 밀어 닥쳤을 때마다 인간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통 털어 겪어 온 기아와 절명 인구는 지표면을 뒤덮고도 남을 것이다. 식량은 인류 보존에의 결정적 요소이며, 온난화 문제가 심각해지는 오늘날 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인류는 종자와 함께 이동했고, 곳곳에 씨앗을 뿌렸다. 현지에서 종자를 채취해 다른 지역으로 끊임없이 옮겼다. 종자들은 발아와 생육에 적당한 지역을 만나면 즉시 개화했고, 다투어 열매를 맺었으며, 외래종에서 점차 토속 종으로 변해 갔다. 결과적으로 완전한 현지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모든 생명체가 지닌 지나긴 적응이 씨앗에도 반영된 것이었다.

    

오랜 인류 역사상 종자는 생명과 지속가능성에의 가장 긴요한 요소로 인류와 밀접히 운명을 같이 해 왔다. 동시에 문명발생에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왔다. 한 알의 밀알은 생명의 발아를 보는 것이며, 인류 존속에의 희망이기도 하다. 끈질긴 역사성과 퍼져나가는 종자의 힘은 가히 생존에의 모든 원력(源力)을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자의 특성은 많은 분야에서 생존에의 원천이다. 들판을 가득 뒤덮는 저 광활한 목초지나, 벼가 푸른 논밭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한 알의 씨앗은 우주적 감응과 웅변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생장 과정 자체가 인류사적 지식을 제시하기도 하고, 사회문제를 푸는 해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체 종자가 지닌 원초적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비밀을 캐보도록 하자.

 

모든 씨앗은 필연코 하나의 종자다. 씨앗 속에는 하나의 식물이 들어 있다. 또한 앞으로 많은 종자가 열리게 될 생명에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종자는 땅속 깊숙한 곳에서도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과 영양분을 지니고 있다.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여러 비밀스런 정보를 감추고 있기도 하다. 자체로써 불변의 생명 보고(寶庫).

 

종자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경이로움에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과거 어느 때인가 대자연이 이룩한 완성품으로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 시작을 뜻한다. 과거와 미래의 생명을 연결하는 고리이며, 무한한 확장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볼 때, 농부가 파종하는 것은 비단 종자뿐만 아니라, 미래의 희망, 인류의 희망도 함께 뿌리는 것이다. 수많은 고대 유물에 파종과 수확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은 경작 활동이 인류의 빼놓을 수 없는 삶의 보존과 희망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자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거의 모든 과정을 미래에 나타내도록 매우 특별한 생명 장치를 지니고 있다. 종자의 이런 특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과 인간에 적응해 온 결과다. 볍씨를 살펴보자. 씨앗 하나에 진화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종류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구조 역시 우리가 밥을 할 때 늘 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씨앗 자체로 생존하고 널리 퍼지기 위해 투쟁해 온 오랜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종자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해 진다. 꽃이 필 때 주피는 자라서 종피가 되는데, 이때 종피는 나중에 성숙한 종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지니며 종자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일종에 1단 로켓인 셈. 또한 배()의 발육을 이끄는 자체적인 발아 성장 메커니즘과 가용 자원도 아울려 겸비하고 있다. 한 알의 볍씨가 수 십 수()의 벼이삭으로 확대재생산 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는 이 같은 내장(內臟) 시스템에 기인한다.

 

  

 

모든 종자는 생김새는 달라도 구조와 기능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의 발육과 더불어 영양분을 공급하는 자체 기능과 구조로 인해 종자는 발아한 뒤 유묘가 되고, 유묘는 독립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영양분을 자체 제공하는 저축기관을 갖고 있다. 땅에 떨어져 자생적으로 독립재생산하기 전에 원래 종자 자체에 내장된 자원으로 생존하는 최소자원 보유시스템은 식물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예컨대 종자의 이 같은 식물학적 지식은 오늘날 조직 운용 면에서 활용해 볼 수 있다. 최소 자체 역량을 지닌 인자로 하여금 수종 사업이 되게 한다거나 새로운 시장 진출을 위해 선발대를 파견하는 것 따위에서 종자학은 획기적인 방안으로 쓰일 수 있다.

 

종자는 크기, 모양, 색 등 매우 다양하다. 크기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티끌만한 것에서부터, 둥글거나, []형이거나, 타원형 내지 장타원형 등 각색이다. 색깔도 여러 가지다. 표면을 살펴보면 거칠거나 평평한 게 있는가 하면, 털이나 고리가 붙어 있는 것도 있다. 종자의 표면이 이렇게 생긴 것은 이들의 전파와 생존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종자는 또한 표면의 생김에 따라 바람이나, , 인간내지 동물의 소화기관을 통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간다. 아프리카 서남부의 칼라하리 사막에서 자라는 비오바브(baobab) 나무 씨앗은 비비 원숭이의 소화기관을 통해 퍼지는데, 원숭이는 부드러운 과육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자를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원숭이는 모르지만, 씨앗은 자신이 어떻게 확산되어야 할지를 처음부터 알고 진화해 온 것 같다.

 

 

확산 거리나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민들레를 예로 들자면, 바람을 타고 날아가 퍼지는데 심지어 홀씨는 제트 기류를 타고 2천 킬로미터까지 날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 군락을 형성하기도 한다. 개천이나 습지의 주인공인 부들의 씨앗은 물위에 둥둥 떠서 이동하고 목적지에 이르면 자신의 닻을 갈고리처럼 붙들어 맨 채 그곳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고 싹을 틔운다. 어떤 식물 종자는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표면에 특별한 부속물을 부착하고 있기도 하다. 어떤 종자들은 동물의 털에 묻어 이동하는데, 개를 데리고 숲에 갔다가 돌아오면 온 몸에 씨앗이 달라붙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털에 붙기 알맞게 씨앗이 진화해 온 까닭이다. (물론 인간이야말로 어떤 종자든 씨앗을 가장 멀리 전파시키는 요인이다.)

 

 

또한 씨앗은 옮겨진 다음에 어떤 우호적인 시기와 조건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그때가 오면 발아하여 생명의 싹을 틔운다.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을 발휘한다.

 

 

농업분야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양의 종자가 대지에 뿌려진다. 인간은 오랜 시간 종자를 뿌려왔다. 하지만 인간이 종자를 과학적으로 검정하고 파종한 것은 근래 들어서의 일이다    

    

긴 깃털을 머리에 꽂고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 아래로 힘차게 괭이질을 하며 밭을 개간하는 또 다른 남자와 왼편에는 손에 무엇을 든 채 일하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인류는 땅과 종자의 야생성을 길들여 오며 생존에의 방식을 오랜 동안 거듭해 왔다. 따비질을 하는 농부의 성기가 상대적으로 과장되어 있고, 땅을 향하고 있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박물학자들은 한국 세시 풍속을 들어 입춘에 옷을 벗고 경작하는 풍습 때문이라고 해석해 왔다.

 

차가운 기운을 견디는 파종 적기를 알기 위한 목적과, 또 성서로움을 상징하는 행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대지에 씨앗을 뿌려대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인류 존속과 번영은 대자연의 원리에 순응해 자연과 더불어 공존해 왔기에 가능했다. 이 점은 유전자 변형이 극한에 치닫는 지금 인류 전체에 대한 경종이 되고 있다.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 12.8x7.3cm, BC 4~3세기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현대 농업이 있기 전 농부들은 이웃이나 다른 농민과 종자를 나누어 파종했다. 하지만 현대에는 공식 기관에서 육종한 보증 종자를 뿌리고 있다. 종자를 공식 기관에서 사서 채종하기 시작한 역사는 불과 1백년 밖에 안 되지만 지금은 대세가 되어 있다. 보증 종자를 파종하게 한 것은 새로운 품종에 대한 유전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종자를 빨리 증식하고 보급하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20세기 초가 되면 잡종 강세 현상을 이용한 교잡종 생산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뭔가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되는데, 일테면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를 연 것과도 같다.

 

 

1908년에 이르면 옥수수는 자연에서 방임 수분해 생산한 종자보다도 교잡종이 훨씬 우수하다는 발표까지 나온다. 그 후 10년이 지나기도 전인 1917년에 들어서면 복교잡종 생산법이 나오며 본격적으로 교잡종이 보급된다. 이때부터 농민들은 교잡종에 대해 신들린 듯 빠져들었다. 옥수수 생산 수위국인 미국을 예로 들자면, 1933년에 교잡종 재배면적은 전 옥수수 재배면적의 단지 0.2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불과 11년만인 1944년 들어서면 83퍼센트로 증가했고, 오늘날에는 100퍼센트 교잡종을 재배하고 있다. 자연 방임 수분은 어디서건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들판이든 어디서든 사랑 없는 결실만이 맺어지고 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치 인간의 욕망만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인간은 병충해에 강하고 대량 생산을 보장하는 유전자 조작 작물에 더 광적으로 집착했고,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 식단의 대부분이 유전자 조작 식품이 뒤덮인 것이다. 이제 식물들이 본격 보복에 나선 셈.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한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본질을 파고 들어가 보면 째깍거리는 회중시계처럼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메커니즘과 만난다.

 

 

그것은 너무나 명확하게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인간종을 서서히 죽이는 행동에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한 손에는 유전자 조작된 종자를, 다른 한 손에는 살충제를 들고 더 광포한 욕망만을 추구하기 위해 혈안 되어 있다. 놀라운 점은 대한민국 정부의 대부분 정책이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이다.(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적극 친미국가로 분류되어 있는 것은 모든 면에서 미국 정책의 적극 수용자라는 면이 크게 좌우한다.) 그것은 우리 농부들과 국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1869년 독일의 색스니(Saxomy)에서는 인류 역사상 종자 검사를 위한 최초의 실험실이 생겨났다. 66년 뒤 독일 나치는 순수 아리안족의 피를 가진 어린이들을 대량 생산하고자 만년설이 보이는 오스트리아 페르니츠에다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간교배 실험장을 창설했다. 이른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이런 야만적 행동이 어떤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재삼 거론할 필요 없겠다. 다만, 대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그런 참혹한 만행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만은 충분히 주었다고 본다.

 

 

농업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변치 않는 가르침이 있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신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한 알의 씨앗을 보며 숭고한 생명에의 신비를 느낄 때 우리는 보다 인간다워진다. 자연의 눈으로 보면 인간도 하나의 씨앗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씨앗만이 존속하며, 그런 씨앗만이 거룩한 생명을 낳는다. 무한한 욕망의 세계에서도 어딘가에는 이성의 씨앗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땅을 어루만질 때, 내겐 심장을 격동시키는 생명의 약동이 느껴진다ⓒ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