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가 구현한 문화의 부흥은 학문의 영역에서 최초로 일어났다. 예술의 발달은 학문의 진보에 따른 결과에 가까웠다. 부의 기반을 교역 쪽으로 옮겨가고 있던 당대의 부자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매우 귀중한 책이었다. 또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선박을 건조하려면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적힌 복잡한 수학 공식들을 따라야 했다. 금융업도 빠른 속도로 발전해갔으며, 1395년에 메디치가는 이미 복식부기를 완성한 터였다. 이러한 학문과 실용적 기술의 융합과 같은 사례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경영상의 공학적인 관점들
돈을 벌려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이나 제품이 시장에서 어떤 경제적 의미를 가질까를 생각해야 한다. 제품 뒤에 숨어서 시장의 요구와 무관하게 생산 활동에 전념하는 기술자들에게 생존 경쟁력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업가 내지 경영자들은 과학과 공학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누구도 에너지 효율이 더 높다는 이유로 전기 에너지 대신 번거로운 호롱불을 켜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장에서 실제적인 현상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관점과 경제성, 실현성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를 사업적인 면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원유 고갈이 점차 현실화되고 지구온난화 문제가 발생하면서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소 에너지 또한 그중 하나이다. 수소는 산소와 반응하면 물만 발생시키기 때문에 청정에너지로 각광받는다. 수소가 원유를 대체할 가장 적합한 에너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소가 이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때문에 한때 녹색경영을 꿈꾸던 많은 사업가들이 수소 에너지 개발을 위해 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소는 대부분 어떤 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수소를 얻는 가장 흔한 방법은 물을 전기 분해하든가, 원유나 석탄과 같은 유기물을 화학 분해하는 것이다. 결국 수소를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차라리 원유나 석탄을 수소로 분해하지 말고 원래의 에너지 용도로 쓰는 게 더 효율적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수소는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에너지 저장 용도라고 봐야 한다. 즉 원자력발전이나 화력발전으로 만든 에너지를 연료전지라는 다른 형태로 바꾸어 보관한다는 의미이다.
사업적인 면에서 수소 에너지의 앞날은 아직 불투명하다. 수소 에너지를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은 데 비해 전기와 같은 다른 에너지 활용 방안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불편함 때문에 수소 에너지에 대한 세계 각국의 치열한 경쟁은 다소 누그러졌으며, 마땅한 흑자 구조를 만들어낸 정부·기업도 없는 상황이다. 만약 경영자가 수소 에너지에 대한 기본적인 공학 원리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시행했더라면, 업계 전반의 열풍에 휩쓸리지 않고 상품성과 해결해야 할 문제 등을 인식하여 자기 조직의 상황에 알맞은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기술 융합이 대세다
현대인들은 거의 모든 IT 관련 서비스들이 한 기기에 융합되어 있는 스마트폰에 열광한다. 우리가 기술 융합 트렌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성과가 특정 제품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 가치를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기술 융합은 원천기술 없이도 기존 기술을 접목시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애플이 아이폰을 통해 강자로 떠오른 것은 휴대폰 제조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폰은 운영체제만 애플의 시스템을 채용하고 반도체는 삼성 제품, 케이스는 중국제를 쓰며 조립은 대만에서 한다. 기술 융합에서는 콘텐츠가 중요하지 기술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기술 융합은 기술들 간의 단순한 접목을 넘어 새로운 유형의 산업을 창출한다. 더구나 원천기술 개발에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기술 융합은 기존에 있는 기술들을 조합하는 것이기에 기업의 신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융합 제품의 예로는 카메라나 mp3 기능을 갖춘 휴대폰, 캠코더 기능을 갖춘 디지털 카메라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융합 제품들은 불과 수년 전에 우리 일상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디지털 신제품에는 대부분 융합의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
기술 융합이 이처럼 강력한 힘을 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공급자 위주에서 소비자 위주로 산업 구조가 개편됐기 때문이다.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기업이 제품을 개발해서 일방적으로 소비자에게 공급했다. 그런데 지식사회가 되면서 소비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한 선택권을 갖게 되면서 어떤 기술이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서비스를 선호하게 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제 어떤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이 이미 충분히 개발됐거나, 필요시 얼마든지 개발될 수 있기 때문에 기술 개발보다는 기존 기술들을 활용해 소비자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을 합쳐보면 새로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기업의 성공 요건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든, 기존의 기술들을 융합하든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기술 개발은 어려울 뿐 아니라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치와 연결시키기가 어렵고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따라서 기술 융합을 통해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르네상스 시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건축가이면서도 실제적․예술적인 지식에다 대단한 문학적 교양까지 겸비한, 융합적 인재의 전형이었다. 그는 마음 깊이 성서를 알았으며 시인 단테도 알고 있었다. 또 수학과 기하학을 뒤죽박죽 독학하기도 했다. 이론과 실천의 겸비는 이상적 르네상스 예술가의 최초의 표본이 되는 이 조작가이자 건축가, 화가, 학자의 창의성을 강화시켰다.
르네상스 시기까지 사실상 하나였던 지식과 학문은 산업혁명 이후 세분화·전문화되었다. 이러한 요소 환원주의는 과학과 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이해는 오히려 저해하였다. 세분화된 부분의 이해를 합쳐도 전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제는 부분적인 것들을 모아서 전체를 이해하는 통합, 즉 융합이 필요하다.
과거에도 편의를 위한 아날로그 기술들의 융합은 존재해 왔다. 예를 들어 각종 칼과 가위 등이 한 세트에 들어 있는 스위스 나이프, 침대와 소파를 겸할 수 있는 소파 베드 등이다. 항공과 숙박 등이 통합된 여행 패키지, 은행 서비스와 보험 서비스가 결합된 방카슈랑스 등은 서비스가 융합된 경우이다. 이러한 종전의 융합은 기존 서비스를 보완하는 정도의 효과를 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의 디지털 기술 융합은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스마트폰, 자동차와 무선통신을 결합한 텔레매틱스 단말기, 셋톱박스, 유무선 통신을 에너지 산업과 결합한 스마트 그리드 등이 그 예이다. 특히 디지털 융합은 디지털 기술에 기반을 둔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를 융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조합이 있을 수 있다. 새로 개발되고 있는 기술들까지 고려한다면 그 조합의 수는 거의 무제한에 가깝다.
기술 융합은 융합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가치, 즉 시장 니즈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융합의 목표와 방향 설정이다. 특히 기존 제품의 단순한 개선보다는 새로운 시장과 부가가치 개척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목표와 방향의 정립이 중요하다. 인접 기술 간의 물리적 혼합을 통한 개선 위주의 융합이 아니라,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한 화학적 융합으로서의 기술 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술 융합은 각국의 기술 개발 정책에도 최우선 순위로 떠오르고 있다. 융합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것은 2001년 12월 미국과학재단과 상무부가 공동으로 작성한 융합 기술에 관한 정책 문서다. 이 문서는 나노 기술, 생명공학 기술, 정보 기술, 인지과학 등 4대 분야가 상호 의존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융합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기술 융합으로 르네상스 정신에 다시 불을 붙일 때가 되었다고 천명했다. 일본도 ‘포커스 21’이라는 기술 융합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으며, 유럽도 본격적으로 기술 융합 산업의 육성에 돌입했다. 글로벌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HP, IBM 등은 홈·모바일 사업에, 인텔과 모토로라 등은 바이오칩 등 융합 시장 선점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기술과 감성의 융합
융합은 전혀 별개라고 생각되는 기술과 감성의 조합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요즘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디자인이 기술과 감성 융합의 모습이다.
갈수록 시대적 변화에 의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우리의 일상에까지 들어오고 있다. 시대적 변화란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를 거쳐 이제 감성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감성사회의 특성은 소비자들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택할 때 지식이나 정보를 넘어 감성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특성상 네다섯 가지 이상의 정보가 주어지면 더 이상 정보를 통해 판단하는 게 힘들어지고, 전체를 뭉뚱그린 직감과 감성에 의해 선택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 마케팅 이론에서는 소비자들은 대개 감성으로 물건을 사고 나중에 이성으로 이를 합리화한다고 말한다.
상품 선택에 있어 감성적인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광고 분야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도 감성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아우디자동차는 ‘자동차는 느낌’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우면서 감성적인 요소를 자동차에 적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