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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서울편지공화국4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오랑캐로 일컬어온 여진족의 청나라에 치욕스러운 굴욕을 맛보았다. 이런 상태에서 인조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義理論)을 고수하는 사림(士林)의 지지를 끌어낼 수 없었다. 따라서 인조는 호란이 끝난 뒤로도 적극적으로 정치를 펴기 어려웠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끝내 실패한 정권으로 귀결된 것이다. 인조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재야 사림을 적극 등용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소위 ‘북벌론(北伐論)’을 은밀히 추진하여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작고하였으므로 이 북벌 계획도 무산되고 만다. 이렇듯 별다른 성과나 실적을 만들지 못한 시기에 잠곡(潛谷) 김육(金堉)같이 높은 식견과 실무정책을 편 관료가 현실정치에 출현한 것은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 2026. 10. 28.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53~1628)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서양을 조선에 최초로 구체적 물증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특히 중국 내에서 한자・유교 문화권 신자들을 위해 편찬된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조선에 소개하여 서양의 학술 및 종교에 관한 관심을 촉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로 말미암아 갇혀 있던 조선 지식인의 대외관념은 청과 서양 문명에 의해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서구 학술・연구에 관심 갖게 만든다. 이 같은 변화는 다분히 이수광의 영향이 크다. 이 점에서 이수광은 실학의 선구자라 부를 위치에 있다. 이수광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이희검(李希儉)이고 어머니는 문화 류씨(柳氏)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585년에는 .. 2026. 10. 25.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시대적 환경은 한 사람의 인생 항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백겸이 살았던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는 한마디로 난리와 기근의 연속이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뒤이어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조선의 전 국토는 유린당하였다. 또 1594년부터 전 세계를 재앙으로 휩쓴 기상 이변으로 거리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유랑민으로 넘쳐났다. 내정은 안정되지 못하고 붕당(朋黨)을 넘어 파당(派黨)의 정치적 조짐까지 보이고, 국가 재정은 바닥났다.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국가 재정의 근간인 토지제도도 극히 문란해졌다.이런 시기에 성리학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풍을 시도함으로써 실학적 사유의 길을 개척한 이가 있다. 그 선구자 중 한 바로 사람이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이다. 한백.. 2026. 10. 14.
한 시대를 넘어가려는 몸부림, 실학 ⟨서울 편지공화국⟩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학에 대한 두 가지 평가, 즉 근대의 관문이 된 실학과, 절반의 성공과 실패를 가져온 실학이라는 평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학문은 어떻게 싹텄으며, 실학자들 사이에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학’이 무엇인지부터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실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면 조선이 어떻게 후기까지 내부적으로 변화와 혁신이 제도권 내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조선을 후기까지 이끌고 간 지배 이념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주자학이었다. 임진왜란과 양대 호란을 겪으며 전례 없이 호되게 당했지만, 여전히 당시의 학문 체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장학(詞章學)과.. 2026.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