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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철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by 전경일 2025. 5. 28.

고요했던 과거의 진리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현재에는 맞지 않습니다. 기회는 온갖 고난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해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212월 어느 날, 의회의 단상에 올라 목청을 높인다. 그가 한 연설은 신생 미국이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단초가 되었다. 남북의 사상적 차이, 경제적 불균형을 뛰어넘어 훗날 그들이 비전화 한 위대한 미국을 여는 계기가 된다. 그만큼 그의 연설은 거대한 바위덩이가 모루를 내려치듯 육중하게 느껴졌다. 링컨을 기리는 워싱턴 포토맥 강가의 기념관에는 오늘도 그의 석상이 육중하게 들어서서 미국인들의 일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를 보노라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꾼 혁명가의 면모가 물씬 풍긴다. 유명한 노예해방은 갈라져 싸운 집안은 설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는 평소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

 

링컨의 생각을 대륙과 시대를 뛰어넘어 동양으로 끌어오면 중국 주()나라 때 춘추시대 8국의 역사를 나라별로 적은 국어(國語)의 한 대목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다른 것들끼리 만나서 조화를 이루고 협조하면 만사가 번창하지만, 차이를 말살하고 동일하게 해버리면 지속되지 못한다.(和實生物, 同則不繼)는 명구가 있다. 남의 생각을 누르려는 것이 아닌 조화, 협력, 공존적인 사고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링컨만큼 시대에 대한 통찰,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많이 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 동양의 유교 철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의 신유학적 철학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하늘은 나의 바깥세상에도 존재하는 동시에 나의 내면에도 들어 있다는 천즉리(天卽理)사상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 원리인 ()를 강조했다. 인문적 우주관인 천리(天理)에 따라 세상과 나를 이해할 때라야 우주적 질서가 바로 잡힌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퇴계의 심학(心學)은 나의 바깥과 내 마음 속에 뚜렷하게 빛나고 있는 보편적인 원리인 리()를 거울삼아 마음을 비추어 반성케 하며, 엄숙하고 경건하게 사는 경() 철학을 강조한다. 여기서 ()이란 (, , 똑똑 두드리다, 강제하다의 뜻)(, 진실로, 움츠리다는 뜻)가 합해진 것으로 마음이 하는 일을 알아차리고, 챙기고, 고요하게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잘하고 있는지 하늘에 대고 노크하고 반성하며 더욱 분발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링컨으로 하여금 흑인노예에 관심을 갖게 했다면, 퇴계에게는 인간됨을 이루려는 리()가 평생 갈고 펼쳐나가야 할 이상적 정신세계로 나타난다. 전자는 서양의 인본주의와 합리주의적 사고에서 나왔고, 후자는 동양의 깊은 우주적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서 나왔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그러해야 할 보편적 본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인문은 사람을 돌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학문이자, 인간 작동의 원리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인간학의 정수다.

 

인간학으로서 인문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것은 물질문명의 한계와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 심성의 과도한 가파름에 있다. 흡혈귀처럼 피를 빨고[연흡(吮吸)] 쥐처럼 갉고 슳어대는[설습(囓啃)] 방식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묻어 뜯는[습교(啃啮)] 방식만이 최선(最善)인양 떠받들어지는 이 시대는 불행 그 자체다. 그로 인해 인간 심성의 강퍅함은 바스러질 듯 메말라지고, 정신의 주춧돌은 파헤쳐졌다.

 

현대진화론 용어 중에 오발(誤發)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론, 전 지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대부분 동물은 많은 자극이 주어질 경우 그 중에서 극히 일부의 자극에 대해서만 반응한다. 그 때문에 적당한 자극이 있어도 도리어 적절치 않은 행동을 나타내곤 한다. 예를 들어 동물의 경우 명금류(songbird) 새끼가 잘못하여 둥지 밖으로 떨어져 죽어가게 되면 새끼 새와 어미 새는 인간의 상식과 달리 반응한다. 새끼 새는 뜻밖의 이상한 사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해 어미 새가 날아와서 먹이를 주어도 입을 벌리지 못한다. 어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상외의 사태에 전혀 대처하지 못해 새끼에게 더는 먹이를 주지 않게 되어 결국 새끼 새가 굶어 죽어 버리게 한다. 대신 둥지 안으로 돌아온 어미 새는 둥지 안의 새끼만을 품어주게 되고, 특히 입을 더 크게 벌리는 새끼에게 집중적으로 먹이를 준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동물의 행동을 오발이라고 부른다. 한쪽은 입을 벌리지 못해서 죽는 형국이고, 다른 한쪽은 배 터져 죽게 될 판이다.

 

이 같은 사태가 일어난 것은 다른 탁란성(托卵性, brood parasitism) , 예컨대 뻐꾸기나 두견이, 찌르레기 새끼가 먼저 둥지에서 깨어나서 원래 어미의 새끼를(, 가친(仮親)의 새끼를)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죽이기 때문이다.(이런 사태는 가친의 알이 아직 부화하지 않았을 때에도 벌어진다.)

이런 저간의 사정도 모르고 어미 새는 커다랗고 선명한 입을 쭉쭉 벌리는 새끼가 예쁘다고 먹어 살리는 것이다. 이때 새끼가 입을 크게 벌리는 행동은 어미 새를 더욱 자극해 어미 새는 등골이 휘도록 먹이를 물어다 나른다. 물론 어미 새는 지금 자신이 뭘 키우는지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같은 오발을 인간 사회에 끌어오면, 이 어처구니없는 역할극에 정부, 대기업(또는 외국자본), 서민이자 국민들을 대입하면 된다. 이른바 글로벌 경쟁이라는 태풍으로 둥지에 떨어진 새끼 새는 급작스런 변화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 채 우왕좌왕한다. 어미 새는 어쩔 줄 몰라 입조차 벌리지 못하는 새끼 새를 잠시 안타까워하다가는 곧 이런 사태를 유발한 것은 새끼 새의 부주의임으로 그를 책망하고 둥지로 돌아 와 크고 노란 입을 쫙쫙 벌리는 새끼 새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넣는다. 어미 새의 신념은 굳건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화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때마다 어미 새는 둥지에서 떨어져 제 밥도 못 챙겨먹고 죽은 덜 떨어진 새끼를 잠시 생각해 보다간, 곧 고개를 돌려 세계화에 경쟁력이 없어서 죽고 만 새끼에게 저주를 퍼부음으로써 자신의 결정을 면책하고, 자기 합리화한다. 더구나 그 앞에는 크고 노란 입의 싹수 있는 새끼가 계속해서 입을 짝짝 벌리고 있다.

 

그 애는 바보 같아서 둥지에서 떨어진 거야!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말이지. 나로서도 어쩔 순 없었다구!”

 

어미 새는 자신의 행동에 합리화와 함께 사회적 의미까지 부여한다.

 

애 좀 봐, 이렇게 입을 크게 벌려 자기 먹이 감을 찾잖아. 자극이 없으면 결코 목적은 달성되지 않는 법이야, 아암, 그렇다구!”

 

이 어미 새의 인식에 뿌리박힌 것은 경쟁 원리다. 그 인식은 바보 같은 짓을 한 새끼에게는 얼음처럼 냉정하다. 어미 새는 지금까지 지녀온 인식을 바꿀 수 없다. 그것만큼 자신이 시간 들여 확고히 믿어 온 가치와 세계도 없다. 우리 사회의 오발은 이런 왜곡된 현실 인식에서 나온다. 물론, 어미 새가 자기 행동조차 또 다른 오발의 하나라는 것을 알 리는 없다. 그는 뻐꾸기 새끼가 어미 새의 등골을 다 빨아 먹은 뒤에 둥지를 미련 없이 떠날 때에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어미 새는 다음 해에도 꼭 같은 오발을 반복한다.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 정부가 취한 정책의 대부분은 여전히 다른 새끼를 키우는 식이었다. 이에 대해 현대 진화론적 관점을 끄집어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는 빨리 죽는 편이 낫다. 규칙을 몰랐거나, 위배했거나,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것 아닌가.”

 

성장을 저해해 온 분배론자들은 늘 경쟁 원리를 외면한다. 경쟁이 없으면 국가나 기업도 망한다. 서민들이 어려운 건 그들이 경쟁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들 책임이 대부분이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데이터들은 정부가 떨어진 새에게 먹이를 갖다 준 적도 거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서민경제복지라는 말이 허망하게 생활고에 시달린 서민이 자살한 비극적인 사건은 이 점을 잘 드러내 준다. 어미 새의 뿌리 깊은 생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 다시 계급 문제가 부상하고 있다. 이 점은 현재도 그렇지만 향후 엄청난 갈등 요인으로 불거질 것이다. 이런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탈리아의 문예 평론가 데 상크티스의 말을 빌리자면, 해법은 간명하다.

 

현실은 죽여야 창조할 수 있다.”

 

생각이 아닌 행동만이 세상을 바꾼다. 철학적 삶은 행동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지금처럼 결의와 행동에 굼뜨다가는 청신한 나무가 썩어가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썩은 나무마저도 눈앞에서 자라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혁명 없이는 결코 혁명을 낳을 수 없다. 어제의 고요했던 진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지금에는 전혀 맞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