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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집단지성으로 바닷길을 연 모리의 항해지도

by 전경일 2025. 7. 31.

지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객관적 사실보다 지금까지 믿고 지켜온 관성에 집착한 역사가 오랫동안 바닷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바닷길은 바람과 함께 해류의 조건을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북대서양 지도에는 해류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지역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은 북아메리카 연안을 따라 흐르는 거대한 해류를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있었고, 이 해류가 멕시코 만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멕시코 만류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해류의 존재를 항해자들은 인식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지식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해류를 무시한 항해는 항해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도 막대하게 들었다. 정확한 바다 지식은 효율적인 항해를 위해 대단히 중요했지만, 뱃사람들이 지켜온 관성은 줄어들 줄 몰랐고, 오히려 계속해서 지켜졌다. 1768년 영국의 보스턴 관세국은 영국에서 뉴욕으로 수송되는 우편물이 로드아일랜드로 가는 상선보다 항상 정해진 것처럼 수 주일이나 더 걸린다는 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왜 우편선은 상선보다 늘 느린 것일까? 여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한 이는 열성적인 과학자이자 정치인인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그는 이 두 도착지 사이가 하루의 항해 일정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런던에 사는 사촌이자 포경선 선장인 티모시 폴져에게 이 문제를 물어 보았다. 당시 폴져는 직업상 플랑크톤을 먹고 사는 고래를 쫒아 늘 만류의 가장자리를 항해하고 있었으므로 이 만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상선의 선장은 대부분 아메리카인이기 때문에 서쪽 방향으로 항해할 때에는 만류의 흐름을 거슬러 가지 말 것을 포경선 선장에게서 배워서 알고 있지만, 영국의 우편선 선장은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했다. 그에 의하면, 포경선이 고래를 뒤쫓을 때 우편선이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그때마다 우편선이 해류를 거스르고 있고, 유속이 시속 1.8킬로미터나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며 흐름의 밖으로 나와 항해하도록 충고해 주었다. 하지만 우편선은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어부 따위가 뭘 안단 말인가? 그들은 지식도 짧고 정규 교육도 받지 않은 어부들에게서 바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이처럼 우편선 선장은 해류를 철저히 무시했다.

 

보다 못한 프랭클린은 이 해류에 대한 주의 내용을 담은 해도를 작성해 영국 폴머스 우편선 선장들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많은 선장들이 별로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해도를 처박아 두었다. 지도가 발행된 다음에도 그 후 수십 년 동안 아메리카로 항해하는 모든 배의 선장은 지도를 무시한 채 만류를 거슬러 항해하여 수 주일이나 더 허비하였고, 결과적으로 계속해서 시간과 비용을 낭비했다. 들인 시간과 비용을 따져보니 엄청난 돈이 바다에 그냥 버려진 셈이었다.

 

769년 벤저민 프랭클린에 의해 그려진 멕시코 만류가 표시된 이 지도는 발행된 후에도 수십 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다. 모든 배의 선장들은 북미 대륙으로의 항해에 만류를 거슬러 항해하는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오랫동안 시간과 비용을 계속해서 낭비해 왔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지식이었지만 이에 대한 무시와 자신의 경험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독선적 태도가 이 같은 부조리와 모순을 가져왔다.

 

프랭클린의 뒤를 이어 연구를 더욱 강화시킨 이는 미 해군 지도 제작관인 매튜 폰테인 모리였다. 그는 1800년대 몇 만권이나 되는 항해일지를 정리하며 바람과 해류의 관찰 내용을 세심하게 선별해 해도에 표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얻고자 해군과 상선의 선장에게 특별히 만든항해일지 요약을 배부하기도 했다. 각 일지의 뒷부분에는 12페이지에 달하는 여백이 남겨져 있었는데, 선장들은 그 여백에 항해 시 발견되는 특정 해류, 바람, 수온, 기타 관련 현상을 기록할 수 있었다.

 

모리가 작성한 해도를 이용해 어느 작은 상선의 선장이 보통 110일이나 걸리는 볼티모어와 리오 데 자네이로 사이의 왕복을 35일이나 단축하면서 모리의 해도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뱃사람들이 오랫동안 알고 있던 지식이 마침내 검증된 것이다. 모리는 항해일지를 기입하는데 협력해 준 선장들에게 그의 출판물을 보내 주었다. 그러자 자료는 속속 더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해류의 움직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던 중 드디어 그 자료를 손에 넣을 새롭고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선원들에게 때때로 날씨와 배의 위치를 기록한 종이를 병에 넣어 바다에 던져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 종이에는 이 병을 발견한 사람에게 발견한 날짜와 장소를 기입해 워싱턴의 모리에게 회송해주도록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선원들은 이 종이를 병 속에 넣어 해류에 던졌고, 얼마 있다가 이 병들은 건져 올려져 모리에게 전달되었다. 이 같은 정보 입수 방법을 통해 모리는 해도에 해류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 더욱 자세히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후인 18541, 그는 자신이 발견한 가치를 극적으로 증명해 보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브릭형() 범선인 나폴레옹 호가 십형() 범선인 샌프란시스코 호가 폭풍으로 돛대가 부러져 대서양 한가운데서 표류하고 있는 곳을 목격한 보고를 갖고 뉴욕 항에 들어왔던 것이다. 나폴레옹 호의 구조를 위해 2척의 쾌속 소범선을 급히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모리는 그의 해도를 조사해 만류의 방향을 추정하고 돛대가 부러진 난파선의 표류를 계산해 구조선이 도착할 시간에 그 배가 떠 있을 장소를 x표로 표시했다. 난파선이 발견된 곳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이로써 모리는 모든 해양구에서 항로 발견자(pathfinder of the sea)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프랭클린에서부터 모리에 이르기까지 공통점은 평범해 보이는 현상에서 원인이 뭘까를 찾아내고 이를 새롭게 지식으로 탄생시킨 점이다. 이들은 현장의 어부에게 지식을 전해 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가장 정확한 해류 지도를 만드는데 집단지성을 발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집단지성을 훌륭한 데이터 축적 방법으로 활용한 사람이 있다. 바로 1720년부터 1742년까지 영국왕실천문대장을 역임했었던 에드먼드 헬리였다. 그는 해상은 물론 2년간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바람을 관측하기도 했고, 전 세계를 누비는 뱃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열대 무역풍과 계절풍의 원인을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헬리보다 앞서 대항해 시대를 가능케 한 사람이 있다. 대항해 시대 유럽 각국 정부들은 경쟁국의 뱃사람을 돕는 결과가 될까 꺼려해 자신들이 얻은 지식을 공개하지 않았다. 정부는 비밀을 지킴으로써 무역을 바라는 자국 상인들조차 왕을 통하지 않고는 장사를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왕실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포르투갈의 국왕 조안 2세는 엔리케 항해왕자 시대부터 이 정책을 취하기 시작해 비밀을 누설한 자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지식이 통제 하에 있자, 지식 보급은 자연히 지연됐다.

 

그럼에도 뱃사람들은 외국 항구에서 정보를 흘리고, 해도도 비밀스럽게 계속해서 거래했다. 포르투갈의 탐험시대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인 1502년의 칸티노 해도도 알베르토 칸티노에 의해 페라라공()에게 은밀히 매도된 것이었다. 다른 이탈리아의 대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페라라공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항해에 의해 이탈리아의 향료무역이 위협 받지 않을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후기에 들어와서 이런 암묵적 단합은 깨졌다. 이 역할을 한 사람이 영국의 성직자이자 지리학자인 리처드 하클루트였다. 그는 항해 기록과 지구상의 여러 방면에 대한 자세한 항행지령을 모아 출판함으로써 대중에게 해도 정보를 공개했다. 지식 대공개를 위해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정보를 수집했고, 선장에게 하달된 지령서 기록도 면밀히 활용했다. 중국으로 가는 선원들은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기도 했다.

 

어떤 것이든 해안이나 육지를 발견하면 항해용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적고, 배에서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귀하의 판단을 기록하고, 또 그 형상(形狀)을 그려 놓도록! 그리고 그것에 마음대로 적당히 이름을 붙여도 좋다.”

 

여러 방향에서 되풀이해서 땅의 생김새를 기술하고 지도를 그리게 하고 이름까지 붙이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여진 정보는 암묵의 카르텔을 깨고 정보의 보편화 현상을 가져왔다. 이 점에서 해도 역사는 집단지성을 촉발시킨 사건이자, 서구 열강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를 여는 단초가 된다.

집단지성은 알고 보면 그 연혁이 짧지 않다. 지식 교환을 위한 협력 체계는 오래 전부터 생겨났고, 정보는 끊임없이 미세 조정해 가며 더 올바른 지식으로 거듭났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지식을 끌어 모아 새로운 지식 세계를 열어왔다. 이전 방식을 새롭게 혁신시켜 낸 인류사적 도전은 인류 문명을 이끈 주축이다. 개인들이 밝힌 촛불이 모여 인류 문명사를 밝힌 등불이 되었다. ⓒ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출처: 이끌림의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