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편지공화국⟩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학에 대한 두 가지 평가, 즉 근대의 관문이 된 실학과, 절반의 성공과 실패를 가져온 실학이라는 평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학문은 어떻게 싹텄으며, 실학자들 사이에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학’이 무엇인지부터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실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면 조선이 어떻게 후기까지 내부적으로 변화와 혁신이 제도권 내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조선을 후기까지 이끌고 간 지배 이념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주자학이었다. 임진왜란과 양대 호란을 겪으며 전례 없이 호되게 당했지만, 여전히 당시의 학문 체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장학(詞章學)과 주자학적 이기론(理氣論)과 예학(禮學)이 지배적이었다. 이 강력한 관념 체계는 변화하는 세상에 맞서고 이끌기보다는 극단적 보수주의로 나가면서 내부 기득권 결속과 유지에만 급급했다. 민생이 맞닥뜨린 현실과 전적으로 괴리된 것이었다.
이런 구태의연한 지적 유희로는 현실을 개선할 어떤 동력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인식이 초유의 국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을 겪으면서 몇몇 선각(선진)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싹텄다. 이들은 곧 현실 개혁에의 자기반성을 했고, 이는 곧 행동과 저술로 나타난다. 이들 선각자는 현실과 괴리된 사장학에서 떠나 현실에 대한 각성을 높이고자 했고, 그 결과 실학에 관심 갖게 된다. 나아가 이 새로운 학풍으로 국가 운영의 실제를 추구하고자 했다.
실학이 임란과 호란 이후 체제 모순을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까닭이 이것이다. 따라서 실학은 시기적으로 왜란・호란 이후 대두해 영・정조 시대 들어 전성을 이룬 학술사상이자 신학풍을 가리킨다. 이 점에서 실학은 당대 정치・사회적 변동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구시대적 사고만으로는 유지되기 어려운 새로운 전환에 대한 바람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취지에서 실학자들은 다양한 사회・경제 개혁을 주장했다. 예컨대 농사법의 개량이라든가, 토지제도 개혁, 화폐 유통 및 상업의 진흥에 관한 논의 등은 그만큼 절박한 현실 개혁에의 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물론 실학이 형성되는 데는 조선사회의 내적 문제와 그에 대한 의문 외에도 선진 서양 문물이 국내에 유입된 영향도 크다. 임진왜란 때 강토를 초토화한 적의 병기인 조총은 말할 것도 없고, 대표적 서양 화기인 홍이포(紅夷砲) 같은 무기는 우리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이것들은 모두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이라는 점에서 세계에 대한 관심은 자연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또 서양 문명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천문학과 지리학 영향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존 사고의 틀을 대폭 확장해 주었다. 이제 세계는 중심이 중국이 아니라 중국 또한 세계의 일부임을 알게 했다. 서구의 지리상 발견과 맞물려 조선 또한 하나의 세계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는 대사건이었다. 바야흐로 국제 질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튼 것이다.
서양 문물 중 특히 천문학과 지리학 등 과학 분야의 도입은 두드러졌다. 태양력이 소개되고, 지구설(地球說)이 등장했으며, 정확한 일식・월식 계산법 및 실측에 기초한 지도 제작법이 소개되었다. 미술 분야에는 서양 미술의 원근법과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기법이 소개되었다.
오래도록 관념의 영역에 머물던 조선 사회에 중국을 통해 흘러들어온 신문명은 과학적 사유를 촉진했으며, 조선 또한 우주적 질서에 편입되는 게 ‘질서’로 이제는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자연 과학적 세계관이 추상적 세계관, 관념적 세계관의 자리를 일정 정도 밀어낸 것이다. 이에 따라 지구는 더는 평면이 아니고 둥글며, 따라서 이 세계를 점유하는 국가 중에는 따로 중심 국가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은 기존의 가치관을 뒤흔들었다. 오래도록 중국을 중심으로 한 종법적 질서가 무너지고, 세계 각 나라는 모두 독자성을 띠고 있다는 새롭고 활력에 찬 신진 이론이 실학자들 인식 속에 대두된 것이다. 과거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경천동지, 상전벽해 할 만한 사상적 전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실학적 사유는 전적으로 서양 사고의 영향만을 받은 것일까? 주자학 내 그 같은 인식은 부재했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실학의 구호인 ‘실사구시(實事求是)’는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의 ‘무득사실(務得事實), 매구진시(毎求眞是)’에서 따온 말이다. 실학을 ‘실사구시의 학(學)’으로 정의한 것은 다름 아닌 여기에 근거한다.
또 동양 고전인 서경(書經)에서도 정치의 원점으로 실학의 요체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컨대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삼사육부(三事六府)가 바로 그것이다.
덕(德)이야말로 정치를 잘하게 한다. 정치는 백성을 가르는 것이 목적이다. 물・불・쇠・나무・토지・곡식[水火金木土穀]의 각 자원을 다스리는 것이다. 위정자가 자신의 덕을 바르게 하고[正德] 자원을 백성의 이용에 더욱 제공함으로써[利用] 백성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厚生] 이 세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기존의 유학적 사유에서 실학의 핵심 개념인 이용(利用)・후생(厚生)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육부(六府)란 수・화・금・목・토・곡(水火金木土穀)의 여섯 가지 자원을 말하고, 삼사(三事)란 정덕・이용・후생을 말한다.
이 점에서 보자면 실학은 서양 과학으로부터 촉발된 면이 강하지만, 나름 내재적인 유학적 철학 사상을 빌려 그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른바, ‘동양의 도리(道理)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흡수해 받아들이는 ‘동도서기(東道西器)’와도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지구상 모든 문명・문화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실학도 끊임없이 그 시대사상의 다양한 입장을 습합(習合)하면서 자라났다. 남의 것을 흡수하고 통합하고 실험하고 증명하면서 자라났다. 이 점에서 많은 실학자의 실험은 요즘 말로 ‘베스트 플랙티스(Best Practice)’라 할 것이다.
그들은 많은 실험 과정에서 조선 사회의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하나의 방법론으로 내외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실학은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형성・전개되고 있다. 즉 실학자들은 현실의식과 실용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험하여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현실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들의 이 같은 활동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에 함축돼 있다.
한편, 다른 주장도 있다. 즉 실학이 하나의 철학적 체계이냐, 하는 물음이 그중 하나다. 실학은 하나의 철학 체계라기보다는 ‘실용적 사고와 실험’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실학은 정체성 측면은 물론 사상적 이념적 기반 면에서 수백 년을 두고 정련(精鍊)되고 세련미를 더해 온 성리학에 비교되지 않는다. 조선은 매우 뛰어난 형이상학적 철학 국가였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 점에서 실학은 무엇보다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문으로써 이런 체제를 설득하고 압도할 체계를 질서 정연하게 보여주고 있지 못한다는 한계와 지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과학은 있되, 하나의 철학 기반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실학이 18세기 무렵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조선 후기의 하나의 시대적 조류를 이룬 학풍이라는 정의에 이의를 제시할 수는 없다. 또한, 주자학적 교학에 대한 반성에서 대두됐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또 다른 주장으로서, 실학을 사교(邪敎)의 옥(獄)이나 문체반정같이 청조(淸朝)의 학풍과 서구 사상의 유입에 따라 주자학적 교학 체계가 심한 도전을 받아서 흔들리게 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 진영이 일대 반격을 가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체제를 신봉하는 세력이 개혁적 아이디어를 들고나올 리는 없다는 점에서 과도한 해석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이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실천 방법은 어떤 계기로 그 시대에 나오게 된 것일까? 이 점이 궁금하다. 앞으로 다룰 실학의 잉태와 탄생 배경은 ⟨서울 편지공화국⟩ 프로젝트에 등장하게 될 수많은 실학자의 면면과 그들의 교유 관계, 학문적 연결고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더 정밀히 다뤄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