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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서울편지공화국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

by 전경일 2026. 10. 28.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오랑캐로 일컬어온 여진족의 청나라에 치욕스러운 굴욕을 맛보았다. 이런 상태에서 인조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義理論)을 고수하는 사림(士林)의 지지를 끌어낼 수 없었다. 따라서 인조는 호란이 끝난 뒤로도 적극적으로 정치를 펴기 어려웠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끝내 실패한 정권으로 귀결된 것이다.

 

인조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재야 사림을 적극 등용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소위 ‘북벌론(北伐論)’을 은밀히 추진하여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작고하였으므로 이 북벌 계획도 무산되고 만다.

 

이렇듯 별다른 성과나 실적을 만들지 못한 시기에 잠곡(潛谷) 김육(金堉)같이 높은 식견과 실무정책을 편 관료가 현실정치에 출현한 것은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대동법(大同法)을 적극 추진하여 충청・전라 지역에까지 확대・실시하고, 금속화폐를 주조하여 시행토록 주선함으로써 상업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새로 만든 역법(歷法)인 시헌력(時憲曆)을 우리나라에서 수용하여 활용하도록 하였다. 김육은 한마디로 실학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의 이런 실무정책은 실학적 성격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김육이 조선 최대의 개혁인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이미 조선 후기 들어서 내부적 모순이 극에 달해 개혁을 해야 하는 현실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수행자, 김육에 대해 알아보자. 김육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성종-중종 연간 조광조, 김안국 등과 교우하였던 동천(東泉) 김식(金湜)의 증손자이며, 참봉 김흥우(金興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조광조의 증손녀였다. 조광조의 도학 정치는 좌절되었으나 그 이상은 죽지 않고 김육에게 영향을 미쳤다.

 

김육은 9세부터 이황의 제자인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웠으며, 12세 무렵에는 󰡔소학󰡕을 읽다가「가언(嘉言)」편의 ‘말단의 하찮은 벼슬을 한 선비라 할지라도 진실로 사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면 반드시 백성에게 구하는 바 있을 것이다’라는 말에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김육은 그의 나이 26세인 1605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1609년에 올린 상소가 화근이 되어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에 은거하였다. 이후 14년간 농민 생활을 하면서 농촌 현실을 깊이 알게 되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치적으로 풀려서 의금부도사(都事)가 되었고, 1624년에는 음성 현감이 되었다. 이 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예조참의・충청도관찰사・대사간・형조판서・우의정을 거쳐, 1651년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이런 김육에게 높은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한 것은 그의 네 번에 걸친 중국 사행이었다. 1636년에는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로, 1643년에는 심양(瀋陽)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1645년에는 연경(燕京)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1650년에는 진향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그가 다녀온 이 네 차례 사행길은 국제정세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했으니 그의 첫 번째 사행 때는 중국의 주인이 명나라였고, 두 번째 심양에 갔을 때는 이미 후금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일어나 중원을 먹을 듯한 기세로 성장해 가던 시기였다. 이어 1645년 사은시에는 중국의 주인이 명실상부 청으로 굳어진 때였다. 1650 사행 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것을 보며 김육은 현실정치에 더 눈을 뜨게 됐고, 실용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김육의 1차 사행(1636.6.15~1637.6.2)은 조선이 명나라에 파견한 마지막 사신이었다. 1644년에 명나라가 망했으니, 대륙의 패권은 이미 후금으로 넘어가고 있던 때였다. 이 시기는 조선이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으로 청나라와 새로운 군신 관계를 맺게 된 때라 명・청 교체기에 조선 관료의 고민과 입장이 어땠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의 일기체 형식으로 정리한 여행 견문록인『조경일록(朝京日錄)』를 보면, 김육은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이만영(李晚榮)을 따라 1636년(인조 14) 6월 15일 해로(海路)로 출발해 등주(登州)를 거쳐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6월 2일 귀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행이 이전의 사행과 다른 점은 체류 기간이 길었다는 점이다. 명나라에 가는 마지막 사행이었고, 또 사행 도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잠시 귀국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사행 목적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군사・안보와 관련이 있지 않나 한다. 그 예로 명나라에 대해 유황(硫黃) 구매를 적극 추진한 점과 이때 벌써 명은 청군의 공격을 예상해 조공로(朝貢路)의 변경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일기는 비교적 빠진 날이 많고 간략하게 생략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그 내용은 명나라의 국정(國情)으로 관리 등의 부패상, 제3국을 통한 병자호란의 실상, 어려운 때에 처한 조・명 두 나라의 태도 등이 나타나 있다. 명은 밖으로는 후금이 쳐들어오고 안으로는 유적(流賊)이 횡행하던 때였고, 몇 년간 계속되는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어 관리의 부패가 극에 달하였다.

 

그러다 보니 외국 사행에 대해서도 뇌물을 요구했는데, 특히 예부상서(禮部尙書)의 행패가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또, 병졸들은 싸움은 하지 않고 민폐만을 끼쳐 백성들은 관병과 노적에게 이중으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명나라는 조선에서 노적이 압록강으로부터 서울까지 아무 저항도 없이 공격한 점을 내세워 조・청 간의 내통을 심히 의심하고 조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행이 명나라의 관원을 만나는 예의도 한층 어려워져 지방의 하찮은 무관에게까지 ‘배신(陪臣・제후의 대부(大夫)가 천자(天子)에게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는 말을 써야 했다. 이 밖에 방물(方物)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조운(漕運)의 편리함과 육상 운송방법으로 수레 사용의 편리한 점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명・청 사행은 김육에게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였다. 이런저런 경험은 그의 국가 경영에 대한 경륜을 더 하여 주어 극단에 내몰리는 국가와 민생을 조기에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성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유로 김육은 163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실패하고 만다. 이때부터 죽는 날까지 김육은 대동법 시행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 1638년에는 수차(水車) 사용을, 1644년에는 수레 사용을 건의하였다. 수레 사용은 훗날 연암 박지원이나 담헌 홍대용도 강조한 것으로 봐서 중국 사행에서 그들은 수레를 이용한 물동량 이동이 경제적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인다는 점을 체득하였던 것 같다. 또한, 화폐를 주조하여 통용하고 연행사행 연로의 고을에 점포 설치를 건의하는 등 상업 진흥에도 힘을 기울인다. 1645년에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로 있던 김육은 역법(曆法)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그 결과 그 후부터 8년이 지난 1653년에는 「시헌력(時憲曆)」을 채택・실시하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1651년에 영의정이 되자 그는 평생을 추진해 온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성공하여 조익(趙翼)과 함께 충청도에서 시행토록 한다. 1657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을 때는 대동법을 호남에서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미처 실시하기 전에 죽었다. 이 사업은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된다.

 

김육은 철두철미하게 민생 안정이라는 기반 위에서 도덕 정치를 추구하였다. 명분론보다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용주의적 학문 경향을 보였다.

 

왕자(王者)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군(人君)이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몸을 기울여 수성(修省)하는데 여기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뿐입니다. (『효종실록』즉위년 11월 5일)

 

이런 경향은「호서대동절목서(湖西[충청]大同節目序)」에서도 쉽게 읽힌다.

 

세상에 성의와 바른 마음을 말하는 학자는 모두 책에 기재된 것을 주워 모아서 뜻이 정성스럽고 마음이 바르면 천하와 국가를 거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단지 말만 하고 공리(功利)를 급한 임무로 삼는다고 비웃고 심지어 실효 없는 속임수라고 비방하니, 이 어찌 마음을 합쳐 나라를 위하는 도리이겠는가. 못난 내가 소견이 얕아서 비록 학문이 어떠한지 모르지만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여 실질적인 사업을 하며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하기를 원한다.

 

김육은 현실적인 실용성을 추구한 학자이면서 경세가였다. 그의 이런 성향이 대동법을 시행하게 한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한다. 나아가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의 도입, 수레・수차・동전의 도입과 활자 제작에 나서게 만든 동기가 된다.

세상에서는 김육을 현상(賢相)이라 일컬었다. ‘현명한 재상’이라는 뜻이다.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는 구체적인 성과가 뒤따르지 않고 이 같은 평가를 받기란 어려울 것이다. 김육은 개혁적 사상가이자 정치가로서 실학과 맥을 같이 하는 사회개혁 구상을 실행에 옮긴 개혁가였다.

 

한편 그는 일정한 주제와 형식 없이 여러 분야에 걸쳐 보고 들은 것을 수필 식으로 기록한 󰡔잠곡필담(潛谷筆談)󰡕에서 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윤훤(尹暄)・이항복(李恒福)・정경세(鄭經世)・홍득일(洪得一)・김상헌(金尙憲) 등 당대의 유명한 문신 또는 학자를 다루고 있고, 조헌(趙憲)・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이희건(李希建) 등 의병장・무장・선비・서민・승려 등에 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저작으로는 󰡔잠곡유고(潛谷遺稿)󰡕, 󰡔잠곡별고(潛谷別稿)󰡕, 󰡔잠곡속고(潛谷續稿)󰡕, 󰡔유원총보(類苑叢寶)󰡕 등이 있다. 이 중 『유원총보(類苑叢寶)』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된다.

󰡔잠곡유고(潛谷遺稿)󰡕 조선 후기 문신 김육의 시·소차·계사·서(書) 등을 수록한 시문집.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穰),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다. 아버지는 중추부첨지사 형중(瑩中)이고 어머니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윤근수의 문인이다. 160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었고, 이조좌랑・동부승지・예조판서・대사헌・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608년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될 때 영의정 이원익을 적극 도와 토지 1결당 16두의 쌀을 공물 대신으로 바치게 하였다. 1651년에는 김육과 함께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시행하는데 힘을 기울여 성공하였고, 각종 폐해를 개혁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학문에도 정진하여 󰡔곤지록(困知錄)󰡕, 󰡔중용주해(中庸註解)󰡕, 󰡔대학주해(大學註解)󰡕, 󰡔서경천설(書經淺說)󰡕 등을 지었는데, 주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치는 독창성도 발휘하였다.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서 77세에 죽었다. 저작으로는 이밖에 󰡔포저집(浦渚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