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에도 인재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
국가 경영권이 가족 구성원에게 대물림되는 왕권시대라도 적장자라고 해서 무조건 국가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태종과 세종이었던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국가 경영권’은 그것을 ‘승계’할만한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 만일, 그것이 조금이라도 비뚤어지면 그것은 과정상 항시 피를 부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 경영이라 함은 그냥 ‘물려주는 행위’로 끝날 수 없는, ‘피나는 수성(守成)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 릴레이 경기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택현론(擇賢論)’은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
스스로 ‘택현론(擇賢論)’의 수혜자로 CEO가 된 세종은, 전임 CEO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부친인 태종의 쏘아보는 듯한 눈빛에서 ‘내가 너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하는 무언의 대화를 읽을 수 있었다. 형인 양녕은 태종의 그와 같은 눈빛을 못마땅한 ‘눈총’으로 치부했지만, 세종은 태종의 눈빛에서 아직은 뭐라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자신의 가능성을 지켜보고 있으며, 주목의 대상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세종은 자신이 태종으로부터 느꼈던 바로 그러한 느낌을 수양이 느끼고 있을까 봐 항시 염려되었다. 병약하기는 하지만 문종은 충분히 그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승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수양은 문치(文治)를 하기에는 너무 눈빛이 강했다. 세종은 정대업ㆍ보태평 등 신악을 창제하고 실험하는 과정에서 이 일을 주도적으로 돕고 있는 수양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물며 어찌 수양뿐이겠는가. 안평은 더할 나위 없는 문재(文才)였다. 다만, 너무 자유 분방한 나머지 예술가가 되는 게 더 어울려 보였다. 그는 예술혼을 가진 희대의 자유인이었다. 그의 화려한 서체(書體)하며, 빼어난 시구(詩句)들은 CEO라는 직업하고는 맞지 않았다.
세종의 가족 친지들 중에도 인재들이 있었다. 세종은 그만큼 ‘사람 복’이 많았다. 그러나 서로 엇비슷한 인재들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서로의 능력이 출중하면서, 동시에 비슷하면 항시 문제가 되었다. 그러면 언젠가 부친인 태종 때처럼 형제간 피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태는 세종도 자신이 죽고 나면 달리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세종은 왜 이런 인재들이 모두 한 시대에 ‘왕재(王才)’로 태어났나 하는 안타까움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의 지혜와 힘을 자신의 국가 경영에 잘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왕재(王才)가 된다는 것은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어느 시대나 CEO 자신의 몸값은 누구를 발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종은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언제나 성공적인 리더는 최고 실력자를 영입한다. 그러나 세종의 경우에는 인재를 구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인재관리ㆍ육성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이들을 키웠다. 예를 들지면, 세종은 ‘택현론(擇賢論)’으로 조선의 CEO가 된 사람이다. 그런 ‘현자’인 세종은 옛 제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집현전(集賢殿)’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집현전이란 ‘인재를 모아 놓은 큰 집’이라는 뜻이다. 인재를 구하기전 인재를 담을 그릇을 만들고 이를 키워나가는 방식을 취한 것이 세종의 인재 육성 방법이었다.
그는 짐짓 평범함의 본질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에게서 ‘인재성’을 찾아내고, 이를 육성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세종의 인재에 대한 관심은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가는 수령들을 직접 면대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세종은 그들을 ‘자신을 대신해서 백성을 만나는 접점’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자신의 국가 경영 철학을 그들에게 알려 자신의 ‘백성 사랑’이 한 치도 빗나가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면대한 또 다른 이유는 ‘인재 발굴’에 있었다. 그들 중에 다시 가까이 불러들일 만한 귀중한 보석이 있는지 그는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세종은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크게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세종 밑의 인재들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이는 세종이 “정치는 사람에 달렸다(爲政在人)”는 원리를 알고 이를 몸소 실천한데 기인한다. 그리하여 그는 집현전에 쓸 인재의 발굴을 변계량에게 위임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인재 소개와 발굴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활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국가적인 과제가 확장될수록, 세종은 더 크게 인재에 목말라 해야 했다.
[나는 인재를 경영하는 CEO]
세종은 인재들을 끌어 모으며,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조선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람들을 경영하는 거라네. 백성들을 경영하는 사람들을 경영하는 거지.”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 경영이라는 것이 바로, 『중용』에서 말하는 ‘위정재인(爲政在人),’ 즉 “일대의 정치가 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대의 영재(英才)가 있어야 한다”(『세종실록』 6년 7월 갑신)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신생 조선이 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필수 조건이었다.
세종은 그러한 인재들을 더 큰 인재로 육성할 책임이 CEO에게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인재관을 통해 조선을 어떤 나라로 만들고 싶은지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의 능력을 개발하는데 이바지한 공로로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인재 관리 CEO로 평가 받게 되었다. 또, 이로 말미암아 그는 당대의 수많은 걸출한 인재들로부터 무한한 헌신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세종의 인력 양성 계획은 오늘날 국가 및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가 있다. “인재를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하려는 세종의 폭넓은 인재관은 세월이 흘러서도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그런 차원에서 인재에 대한 ‘목마름’은 하루에 한동이 씩 물을 마셔야 하는 그의 소갈증과 함께 고칠 수 없는 병(病)중의 하나였다.
[가까이 가까이, 인재 모시기]
세종시대 과학과 IT기술은 조선 시대 500여년을 통해 가장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세종의 능력주의에 근거한 철저한 열린 인사 정책과 개방정책 때문이었다. 신분을 뛰어 넘어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인재들은 역사상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세종시대만큼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인재들이 등장한 예는 일찌기 찾아 볼 수 없다. 인재들은 마치 세종이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솟아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IT분야의 뛰어난 영재인 장영실이었고, 음악분야의 천재 박연이었다. 또 『농사직설』을 집필해 조선 농업의 생산성 증대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정초와, 6진을 개척한 김종서, 그리고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장영실은 세종시대 능력주의에 근거한 발탁인사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원래 부산 동래현 관노였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원나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기녀였다. 그런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장영실을 특채로 받아들였다. 세종은 그가 과학 및 IT분야에 전문가라는 보고를 받고, 그를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와 함께 대궐로 불러들여 천문 관측에 대하여 토론까지 했던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