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믿음과 열정으로 마음의 불을 지펴라

by 전경일 2009. 2. 3.
 

[싱크 탱크를 운영하라]


세종은 추천과 발탁제도 이외에도 ‘과거(科擧)’라는 채용 시험을 통해 인재들을 공정하게 뽑아 들였다. 싱크 탱크인 집현전의 핵심 요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채워졌다. 집현전은 국가경영상의 현안 문제에 대한 안을 마련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자리 매김 되었다. 명실상부하게 집현전은 조선의 경영정책 및 전략수립의 장이자, 당대 최고 인재들의 집합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고려 때 명분뿐이던 집현전은 세종시대 이르러 환골탈퇴를 하며 핵심 인재들간의 이너서클(inner circle)로 발전한다. - 이 이너서클의 멤버로는 영의정을 비롯해 최고위급 인사들이 있었고, 이들 대부분 정규 고위 관직을 겸직 하였다. - 세종의 이러한 조치는 집현전을 훨씬 더 중요한 기관으로 만드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과 같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 10 - 나중에는 32명까지 된다. - 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최고의 조직이다]


세종은 인재 선발시 매우 신중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인재들만 뽑았다. 각자 자신이 처한 위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세종은 ‘현재’보다 ‘가능성ㆍ잠재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고, 따라서 최종적으로 선발된 인재들은 세종의 이러한 인적 관리 지침에 따라 전문가 집단으로 거듭났다. 이것은 오늘날의 ‘HPI 방식의 핵심 인재 관리법’과 비슷해 보인다. 집현전의 베스트 10 요원들은 그렇게 해서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세종시대를 세종과 함께 열어간 싱크 탱크이자,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들과 더불어 세종은 학문연구와 제도 정비 등을 상호 긴밀하게 협의하였고, 이들의 자문은 실제 CEO의 경영권 안정과 성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훗날 결국 국가 경영에 직접 관여하게 된다.


[효율적인 팀 멤버를 구성하라]


세종은 고효율의 경영체제를 구축하는데 가장 적합한 인재들만 선별해 조직을 운영하는 라이트 사이징(right sizing)을 실시해, 집현전을 명분만이 아닌 실제 경영에 도움을 주는 조직으로 끌고 갔다. 이렇듯 국가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세종은 그들을 실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로 육성했고, 그들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조직은 매우 타이트하게 운영돼서, 싱크 탱크 요원의 수는 세종 2년에는 10명, 6년엔 15명, 17년 초엔 22명, 17년 7월엔 32명. (이 시기 서연관 멤버 10명을 통합시켰다.) 18년엔 20명으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만을 뽑아 운영했다.


또한 인재 관리 차원에서 장기 근속체제로 운영하였으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인재를 끌어 올려 싱크 탱크를 보강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30년 집현전에 소속된 인재들의 명단(직급 제외)을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파워 엘리트들이 포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창손ㆍ신석조ㆍ최항ㆍ박팽년ㆍ이석형ㆍ신숙주ㆍ어효첨ㆍ김예몽ㆍ하위지ㆍ이개ㆍ양성지ㆍ유성원ㆍ이극감ㆍ이승소ㆍ서거정ㆍ한계희 등 (무순)


[협동과 상호책임의 의식이 함께한 지식발전소]


그렇다면 세종은 왜 그토록 집현전에 대해 많은 배려를 했을까?

그것은 분명 CEO가 의도한 방향으로 ‘조선’을 끌고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공통체적 싱크 탱크의 운영은 결국 하나의 작은 문화 단위의 성과가 전국적 범위로 확산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여기엔 공통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협동과 상호책임의 의식이 함께 했다. 세종이 무엇에 가치 중심을 두고 있는지 충분히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집현전 운영이었던 것이다. CEO의 강한 의지에 따라 모인 인재들은 집현전 멤버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강한 정체성(identity)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집현전은 강한 친목과 결속의 문화를 창조한 지식발전소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하겠다.


[팀원 전체가 자부심이 넘쳐 흐르도록 하라]


그들은 얼마나 뿌듯했을까? 자신을 알아주는 CEO와 함께 일한다는 것, 더구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군(群)의 일원이자, 조선 경영의 핵심 브레인그룹의 멤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자부심에 넘쳤을 것이다. 국가 CEO가 자신을 부른다는 사실 - 즉, 위대한 그룹의 멤버가 된다는 사실 - 에 그들은 전율했을 것이다!

그것은 출세 이상의 의미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생 조선이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나라이기에 행복했고, 그 자신 국가 창업과 수성의 초기 과정에 뛰어듦으로써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다는 - 그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은 필수적으로 국ㆍ내외 사서(史書)를 읽었으며, 중국 및 고려의 역대 CEO들의 활동에 대해 무엇보다도 통달했던 사람들이었다. - 사실에 가슴 벅차게 느꼈을 것이다. CEO 세종이 부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역사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매우 특별한 명령’에 따르다]


집현전 37년간의 활동을 보면, 처음 10년간은 국가 경영을 위해 인재를 모아 훈련시키는데 쓰였고, 이후 8년은 각종 문화사업 및 국가 경영에 필요한 자문 활동에, 나머지 19년은 집현전에서 자라난 인재들이 훈구파의 핵심세력으로 국가 경영에 참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집현전은 훗날 세조의 집권을 반대하는 사육신의 중심 조직이었기 때문에 혁파되고 만다. - 즉, 절반 정도의 기간은 직접적인 국가 경영 참여의 시기였다. 집현전 멤버들은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발전을 선도하였으며 집현전을 거쳐 간 학사 전체 99명 중 20% 이상이 조선조 과학기술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토록 눈부시게 활동할 수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국가 CEO의 싱크 탱크에 대한 관심과 신뢰 덕분이었다. CEO의 관심과 신뢰는 업무성과가 극대화 되도록 군신간에 믿음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가 만일 조직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그는 무엇엔가에 홀려있는 - 「훈민정음」창제, 과학과 IT기술, 그리고 온갖 제도적 개혁 등에 걸쳐 망라 되어 있는 - 편집증 환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가져오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최고’라는 오만의 수렁에 빠뜨렸을 것이다.


[믿음의 열정으로 마음의 불을 지피다]


하지만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마음속에 믿음에 근거한 열정의 불을 지폈다. 집현전 싱크 탱크의 멤버들은 매일매일 어떤 좋은 경험을 하게 될지 궁금증과 활력을 가지고 출근했고, 세종은 그들에게 실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명예를 한껏 드높여 주었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는 그런 류의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도 평생 동안 각고의 노력을 통해야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실로 거대한 초대형 프로젝트들이었다. 여기엔 결코 ‘불가능’이란 말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