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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나는 조선의 CEO다(2)

by 전경일 2009. 2. 3.

 

3면이 바다, 조선 강국이 되자


우리나라는 삼 면이 바다다. 세종은 조선 선박에 비해 일본 선박이 경쾌하고 빠르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 원인을 분석하여 조선 기술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세종 27년에는 일본 기술자를 초빙 귀화하게 해 ‘호군(護軍)’의 벼슬을 주어 배를 만들게 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호군(護軍)’이라 함은 당시 장군(將軍)급의 정사품의 무관직이었음을 볼 때, 세종이 인재 영입을 위해 얼마나 발탁 인사조치와 해외에서조차 인재 스카웃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기업들이 해외에서 우수한 인력을 스카웃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또 여러 외국 선박의 특징을 비교 연구하여 외국 기술의 장점을 도입했다. 결국, 전함(戰艦)의 수리와 운수(運輸)에 관한 일을 맡은 사수감(司手監)이라는 기관을 두어 세종은 전함 건조와 선박 건조를 위한 자재의 조달까지 맡게 했던 것이다.

 

 

 

 

실지(失地)를 회복하라

 

세종의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는 세종 15년에 가서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세종은 최윤덕ㆍ이천ㆍ김종서 등을 파병해 함길도와 평안도에 살던 여진족을 제압해 4군(郡)과 6진(鎭)을 설치케 한다. (이때의 6진 개척은 영토의 확장과 ‘왕이 일어난 땅(興王之地)’을 보호한다는 국가의 명제를 현실화한 사업이었다.) 이러한 4군(郡) 6진(鎭)의 개척에 이어 지속적인 화기 및 선박의 개발 같은 국방 프로젝트들이 이어졌다. 이는 실로 세종의 자주 국방에 대한 의지가 없으면 실행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비록 조선의 창업자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가장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했지만, 세종은 우리의 영토에 대한 기준을 그 당시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다소나마 넓혀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잃어버린 땅을 제대로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실지 회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극미한 부분에 불과했다. 그나마 세종이 죽은 다음엔 4군 6진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버려두어 이곳은 불모의 땅이 되어 버린다.

 

 

 

 

소리도 바로 세워라

 

문무를 아우르는 세종의 자주경영은 국방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 및 사회ㆍ문화 전반에 걸쳐 강하게 나타나 그 시기에는 실로 다양한 국책 프로젝트들이 수행되었다. 문화는 국토를 넓히는 것만큼이나 지속적으로 시스템의 일부로 남게 된다는 것을 세종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문화’를 인프라로 인식했고, 자신의 경영에 있어 핵심적인 중점 사항으로 삼았다.

 

그건 단지 왕권 강화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것과 함께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일련의 작업 속에서 실행된 프로젝트들이었다. 그는 정말로 대단한 민족 자존심을 지니고 있던 CEO였다. 실제 세종의 이러한 국가 경영에 있어 자주적 입장은 음악 제정의 일에도 잘 드러나는데, 그는 중국의 음악을 어느 정도 참고로 할 것 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음악관은 쉽게 말해, ‘우리 음악은 중국 것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의식이 우리 소리를 만들어 내게 했던 것이고, 우리 소리를 찾는 과정에서 이것을 우리 문자로 적어야겠다는 인식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간 것이다.

 

 

 

 

자주경영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 

 

세종을 이해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바로 우리 풍토(風土)의 고유성에 대해 깊이 자각을 했다는 것이다.「훈민정음」은 ‘우리말을 우리 글로 적기 위한’ 강렬한 시대적 니즈(needs)속에서 탄생된 것이다. 그것은 중국과 소리가 다르면 문자가 당연히 달라야 한다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상식적인 발상에서 창안된 문자이다. - 이러한 상식이 사대부 집단이라 일컬어지는 기득권층ㆍ지배계급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 세종의 자주 의식은 우리 달력인 『칠정산』내ㆍ외편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고 우리의 국토를 소상히 알고 밝히기 위해 제작한『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및 팔도지도 제작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의학 분야에서는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는 의술을 개발하고 우리 땅에서 나오는 토산의 약제를 활용한 우리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향약구급방』을 간행하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취(醫方類聚)』 등 방대한 의학ㆍ약학 관련 서적을 편찬하는데서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향약집성방』과 『향약채취월령』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통해 이 땅에 맞는 신토불이적 의학을 세우겠다는 주체적 의식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또 백성들의 먹거리 문제를 혁신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농사직설(農事直說)』은 출간됐다. 이는 중국의 화북 농법을 참고하면서도, 나이 많은 늙은 농부들의 경험을 살려 우리의 땅과 기후와 풍토에 맞는 한국형 농법을 세운 것이다.

 

이밖에도 세종시대 천문ㆍ역법ㆍ음악 등 여러 연구 프로젝트들은 다름 아닌 ‘우리의 풍토에 맞는 우리 문화의 창조’라는 캐치 프레이즈 하에 얻어진 값진 성과들이었다. 문화적ㆍ경제적 자신감에 따라 이 무렵 우리는  우리 겨레의 국조(國祖)인 단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세종이 단군을 모시기 위해서 평양에 사당을 별도로 세우게 했던 것과 일맥상통 한다. 뿌리를 모르고선 결코 ‘자주’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리 경영은 이렇게 하라

 

세종은 세계사가 크게 회전하는 어마어마한 변화와 위험과 기회의 시기에 조선을 경영한 CEO였다. 따라서 그를 평가함에 있어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바로 현실 대처 능력이다. 이것은 그의 가장 탁월한 경영 능력의 한 부분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의 탁월성은 위험요인을 절묘하게 기회요인으로 전환시키는데 있었다. 이것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의 지혜의 경영, 균형감각, 세상의 흐름을 리드하는 경영 등 온갖 표현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바로 그의 절묘한 ‘실리 경영’이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국방 외교는 항시 실리의 기조를 벗어나지 않았다. 세종의 쾌거였던 대마도 정벌이나 4군 6진은 실제 경제 활동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군사적 ‘전승(全勝)’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전쟁과 평화’를 유연하게 오가며 세를 과시하면서 실리를 추구했다. 왜구를 평정하되 대마도와의 통상 창구는 열어두어 삼포를 개항했고 여진족의 침공은 진압하되 농업이민으로 안정화 정책을 취한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전승(全勝)’이라 하는 것이 싸우는 족족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개방화의 목적이 무엇이냐?

 

그러한 그의 실리 경영은 대명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조선의 지리적ㆍ현실적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에 ‘지성사대(至誠事大)’를 표방하면서도, 맹목적인 사대가 아니라, 국익에 플러스되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그것이 만일 국익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는 과감하게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중국에서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중국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폭넓은 조사와 분석을 통해 오히려 중국을 손바닥 들여 다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가 이슬람 문명의 실체들을 파악한 것도 바로 그러한 활동의 결과였다. 그런 ‘플러스 요인’을 파악한 이상, 그것들은 세종의 아웃소싱 전략에 걸려들어 줄줄이 끌려와 그가 지피는 ‘새로운 조선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들이 주조되어 나왔다.

 

여기엔 세종의 개방적 태도가 가장 공이 컸다. 그는 우리 현실에 맞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오히려 외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퓨전(fusion)경영’의 개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조치의 목적은 그가 바로 지향한 ‘부강한 조선 만들기,’ ‘확고한 국가 경영권 지키기,’  ‘만백성에게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처럼 하나같이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유연하게 원칙을 적용하라

 

세종의 이렇듯 유연한 실리주의적 원칙은『고려사』편찬시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역사 기술에 있어 고려를 무조건 깎아 내리려고만 하는 태도를 지적하면서 바로 쓰게 했다. 이를 ‘직서주의(直書主義)’라고 부른다. 또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사당(祠堂)을 지어 자칫 지나친 사대명분에 우리의 역사를 잃지 않도록 주의했다.

 

세종의 이런 유연성은『주자가례』를 적용하는 데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실리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순지와 김담이 상을 당했을 때의 일화다.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해 근무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세종은 특별조치로 그를 바로 조종에 나와서 일을 하게 하였고, 김담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미색의 옷을 주어 그것을 입고 근무하게 했다. 이를 두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말도 많았지만, 세종은 “집에서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서는 엷은 색깔의 옷을 입으면 자식으로써 어찌 애통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겠는가?”면서 김담 같은 인재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이와 같은 인재를 3년상을 치룰 때까지 묵혀둔다면 이는 국가 경영상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세종은 이처럼 기본 틀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현명하게 이를 활용했던 것이다.

 

 

 

 

프로는 고단수 실리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세종은 자신이 얻을 것은 다 얻고 있다. 예컨대, 명령과 지시의 최정상에 있으면서도 그는 신하들에게 지시를 할 때, 무조건 명령을 내리는 식이 아니었다. 대신, 세종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끌려오겠금 손을 썼다.

 

사실 이런 방식이야말로 세종의 경영 리더십의 결정체였다. 예를 들어, 세종이『고려사』를 국왕 중심으로 편찬하려고 한 것은 CEO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것보다 오히려 역사 서술의 원칙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또『용비어천가』는 전임 CEO들과 자신을 비롯해 조선의 후대 CEO들을 위한 국가경영권 강화 차원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용비어천가』제125장을 통해 신하에 의한 국가 CEO 퇴출의 표현을 암묵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국가 CEO와 신하간의 균형을 취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럼으로써 세종은 국가 CEO도 신하들을 제압할 분명한 명분을 얻게 했다. 동시에 세종은 후대 CEO들을 자신이 의도한 교육적 방식으로 재배할 수 있었다. 세종은 또「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에는 ‘한글’을 통해 백성들에게 쉽게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 시키려고 했다.

 

이 같은 세종의 경영전략들은 실로 실속 있는 조치였지만, 한편으로 아래에서부터 자발적으로 끌려오는 모양새를 취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 프로 경영자다운 모습이 엿보인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고,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이러한 경영 기법을 통해 세종은 자신이 의도했던 CEO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크게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실로 그의 경영 기법이 너무나도 고단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전임 CEO인 태종이 취한 방식처럼 음모와 술수를 동원한 책략적 방법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세종은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자신을 성군의 위치로 올려 놓을 수 있었고, 바로 그러한 점이 그가 프로 근성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실리주의적인 CEO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실로 조선의 CEO였던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