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후계자 선정 문제였다. 전임 CEO인 태종은 비록 ‘피의 경영’을 했지만, 후임 CEO만은 제대로 뽑고, 키워 주었다. 그것으로 태종의 허물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회복될 수는 있었다. 왜냐하면 이전 시대보다 그 뒤의 시대가 훨씬 더 발전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후계구도에 대한 전임 CEO의 ‘공(功)’과 ‘능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종은 ‘성공’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와 달랐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세종은 이 부분에서 너무나도 큰 실수를 범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세종, 후임 CEO 선정에 실패하다
세종이 후계자 선정에서 실패했다는 얘기는 태종에서 세종, 그리고 문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후임 CEO 선정 과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세종은 ‘택현론’에 의거, CEO가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종이 죽기 전까지 군사권은 전임 CEO가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이 완전히 국가경영권을 행사했다고 볼 수는 없다.(태종과 세종이 공동으로 국가 경영을 할 때 서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는데, 세종은 국정 전반을 다스렸고, 태종은 군사ㆍ대외 관계를 맡아 다스렸다. 그러나 중대한 국가경영 문제는 함께 의논하기도 했다. 예컨대, 세종 원년 5월 대마도 정벌은 국력을 기울여 거행하여야 할 중대사였으므로 두 CEO와 신하들이 함께 모여 의논했다.)
물론 태종이 죽은 다음, 세종의 경영권은 안정화 되어 갔고, 앞서 태종의 ‘군권 보관’ 조치는 한편으로 경영 간여이기는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강력한 후원이 되어 주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세종은 경영의 전모를 완전히 파악하고, 휘어잡을 때까지 전임 CEO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렸던 이러한 혜택을 다음 CEO로 지명된 문종에게 제대로 넘겨주지 못했다.
세종, 때를 놓치다
세종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세종 19년경부터 차기 CEO 예정자인 왕세자 - 뒤에 문종이 됨. - 로 하여금 서무에 관해 직접 결재하게 했고, 또 자신이 전임 CEO가 살아 있을 때 취임했던 전례에 따라 세종 21년에는 세자에게 CEO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가 세종 24년에 가서 첨사원을 설치하여 과거 자신의 경우처럼 차기 CEO 예정자가 국가 경영을 대행하는 길을 열어 주게 된다(『세종실록』 24년 8월 2일). 또 세종 27년에는 건강 악화로 세자로 하여금 대리 근무케 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종은 자신이 국가 CEO라는 자리에 연연해 이렇듯 적기에 차기 CEO에게 국가 경영권을 넘겨주지 못한 건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한 조처거나, 주변의 만류를 제대로 설득해 내는데 실패하고, 그리하여 경영권 이양의 추진력을 얻지 못해 인수ㆍ인계가 늦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실로 때를 놓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CEO의 건강은 기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조건이다
시간을 질질 끈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의 차기 CEO지명 원칙은 너무나도 큰 실수를 동반한 것이었다. 문종은 매우 똑똑한 차기 CEO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병약했다. ‘택현’이 될 수는 있었으나, 지나치게 약골이라 결코 한 나라를 맡아 끌고 나갈 위인이 못되었다. - 앞서 우리는 그가 자격루 개발 아이디어를 내는 등 얼마나 명석한 인물이었는지를 살펴 본 바 있다. - 개인적으로도 문종은 그의 부친인 세종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병치례를 해서 세종 27년부터는 서무 결재를 맡겼었는데, 오히려 건강상의 이유로 세종이 그를 대신해 정무를 봐줘야할 형편(『세종실록』28년 5월 31년 11월~32년 윤1월까지)이었다. 그러니 이런 건강 상태로 한 국가를 이끈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무렵 문종은 세자빈 권씨가 사망한 상태라 심적으로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심약하고, 가정도 부실한 가운데, 자신의 역량을 국가 경영에 제대로 쏟아 부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결국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CEO는 체력과 지력 모두에 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문종을 ‘적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무리하게 CEO로 지명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 32년에 세종이 죽고, 문종이 차기 CEO로 취임하였으나 그는 2년 만에 눈을 감고 마는 비극을 연출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종을 닮아 그토록 영특하고 뛰어난 인재였던 문종이 건강상 문제로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마니 결국 찬란했던 세종시대는 쇠락을 맞이하게 됐고, 곧이어 계유정란의 피바람이 부는 계기가 된다. 태종이 그토록 염려한 국가 CEO자리의 안정적 계승이 세조의 경영권 찬탈로 다시 반복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이 가까스로 세워놓은 ‘무혈경영’의 전통은 깨져 버리고, 다시 피로 역사를 쓰는 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수많은 왕비ㆍ후궁ㆍ후손들을 거느렸지만 당대 이후의 후계자 관리에는 실패한 셈이었다. 오히려 그가 태종처럼 실력 우선의 후계자 원칙을 세웠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며, ‘단종애사’는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 경영권 앞에 ‘야심(野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 자신 전임 CEO인 태종을 통해 수차례 봐 왔으면서도 세종은 그저 유교적 기준에 매몰돼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왕세자에게 수많은 국책 프로젝트에 직ㆍ간접적으로 참여케 하는 등 착실한 경영 수업을 쌓게는 하였으나, 너무도 기본적인 건강상의 문제를 체크하는데 소홀했다. 그것은 후계자 선정이 다방면에 걸친 테스트를 통해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실시되지 못해 빗어진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자신의 경영을 통해 터득한 몇 가지 주요한 원칙들을 후대 CEO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용비어천가』라는 CEO용 지침서를 만들게 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