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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남자, 마흔 이후 | 마흔 살의 우정

[남자 마흔 살의 우정] 친구여, 용서를 비네

by 전경일 2009. 2. 17.

친구여, 용서를 비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때,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보통학교, 즉 지금의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적잖은 핍박을 받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견디다 못해 친구를 찾아가 함께 월남하자는 제안을 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옆집 친구이니 이 정도는 믿어도 되겠구나, 싶어 속의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문턱이라곤 다녀본 적이 없는 친구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버럭 화를 내더니, 내무서에 보고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버지는 일이 커지게 될 때 닥칠 후환을 염려해,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이니 오늘 얘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용서해 달라고 하고는 신신당부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당신의 얘기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 밤잠을 못 이루셨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는 내무서에 갔다 왔고, 거기서 심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야음을 틈타 월남한 것은 몇 개월 후였다. 다시는 고향에 못 돌아가는 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휴전이 가까워 오면서 다시 고향땅을 밟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예전에 아버지를 고발했던 그 친구는 무릎을 꿇으며 사과를 구했다. 세상이 바뀌자 남쪽 진영의 사람들은 그를 장작 패듯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바지가락을 붙잡고는 눈에 뭐가 씌워 보이는 게 없어서 그랬으니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아버지는  친구를 구했고, 그 일이 있은 후로 다시는 예전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종전이 다가올 무렵, 남과 북이 서로 밀고 당기는 통에 이번에는 그 친구가 야음을 틈 타 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휴전선이 그어졌다. 아버지는 그와 그렇게 헤어졌다. 


지금도 아버지는 사상이 뭐길래 친구를 원수로 만들고, 목숨 걸고 죽자 살자 싸우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신다. 그때의 그 친구는 지금도 살아 있는지, 그는 그때의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되뇌이곤 하신다.


“그 친구가 살아 있다면 팔순이 넘었을 텐데……. 아마도 고향 땅을 그리워했을 게다.”

당시 많은 이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헤엄치고 뛰어놀며 함께 자란 친구가 다른 이념 때문에 영영 얼굴을 마주할 수 없게 된, 이 같은 기막힌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분들 사이에 진정 이념이란 게 있기나 했는지조차 의문이다. 단지 서로를 살해하는 무고한 전쟁이 두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살며, 어느 길목에서는 친구를 만나고, 어느 모퉁이에서는 그와 헤어진다. 어느 길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런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다. 친구가 한순간 적으로 바뀌는 일도 있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눈물을 머금고 결별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런 친구조차도 기억엔 오래 남는 것은 왜 그럴까? 그토록 미워하거나 실망했던 얼굴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남은 까닭은...


심지어 우리는 친구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고 해도 그를 용서하고 우호적으로 대하기까지 한다. 머릿속에서는 떠났지만, 마음이 아직도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한다. 이런 감정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계’라는 것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통의 무엇이 함께 하기 때문인가. 둘 사이에 간직한 끈끈한 무엇이 작용하기 때문일까.


이런 관계에서조차 우호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친구가 주는 소중한 감정 때문일런지 모른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맞던 친구도 결국엔 내 인생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가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설령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온다고 해도, 그 순간에조차 관용과 이해, 용서의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 그와의 관계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런 용서의 태도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우리는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경우에라도 자기 삶을 책임지고 또 그것을 남과 함께 나눠야 한다. 아버지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관계가 지닌 무게를 되새겨 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친구를 고발해야 했던 아버지 친구의 상황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씁쓸하기만 하다. 그는 아버지를 고발함으로써 무엇을 얻었을까? 종국엔 그 자신의 인간다움마저 잃고 말지 않았을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마 인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을까?


그러나 정작 고통을 받고도 복수하려 하지 않은 많은 선한 사람들은 그런 몹쓸 기억 앞에서도 떳떳하다. 그들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그 시기엔 알고도 행동하지 않은 양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우정은 어떤  시험을 원하는가.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