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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CEO산에서 경영을 배우다

폭우 속 산행에서 본 광경

by 전경일 2009. 5. 8.

 그것이 무지개였는지 아니면 환영이었는지

 

한여름 장마철에 소백산을 오르다가 느닷없이 내리쏘는 소낙비를 만났다. 간신히 판초우의만 뒤집어쓴 채 자연과 함께 온몸을 비에 내맡겼다. 비가 퍼붓는 날에 낙뢰를 피하려면 바위가 솟은 높은 곳이나 나무 아래에 숨지 말란다. 그래서 산중턱 아래 편편한 곳에 서 있다 보니 갑자기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산에서 비를 만나면 당황하게 마련이지만 흠뻑 젖다 보면 한편으로는 상쾌해진다. 그렇게 자연 세척을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정신까지 맑아진다.

 

한동안 장승처럼 서 있었지만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믿은 게 낭패였다. 산 전체가 번쩍이면서 번개가 요동을 치자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그을 산장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갑자기 저 멀리 산골짜기로 운무가 끼면서 뭔가가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흡사 용이 허공을 가르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김두창 전무는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나는 어떤 용인가? 용의 승천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과연 경영자로서 용이 될 수 있는가? 저것은 내가 용이 될 징조인가? 그는 가슴이 벅차올라 온몸이 떨렸다고 한다. 

 

주역의 건괘(乾卦)에 보면 다섯 마리의 용이 나온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고 물속에 숨어 있는 잠룡(潛龍), 땅 위로 올라온 현룡(見龍), 하늘로 도약을 시도하는 약룡(躍龍),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 마침내 하늘 끝까지 날아간 항룡(亢龍)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애초에 용으로 태어나긴 한 것인지, 이무기나 백 년도 못 사는 뱀 심지어 그저 발밑에 밟히는 지렁이는 아닌지 온갖 상념에 젖었다고 했다. 연말이면 그룹에서 차기 사장감을 내정할 것이고 그러면 그는 승천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저 형식뿐인 계열사 부사장 자리가 아닌 사장으로서 전문경영인의 길을 걷고 싶지만, 승진에서 밀리면 현재의 자리조차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내줘야 한다. 

 

그는 여느 때와 달리 홀로 산을 올랐다. 내면 깊숙이 들어가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또한 영감을 얻고 싶었다. 

 

역의 건괘(乾卦)에 보면 다섯 마리의 용이 나온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고 물속에 숨어 있는 잠룡(潛龍), 땅 위로 올라온 현룡(見龍), 하늘로 도약을 시도하는 약룡(躍龍),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 마침내 하늘 끝까지 날아간 항룡(亢龍)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애초에 용으로 태어나긴 한 것인지, 이무기나 백 년도 못 사는 뱀 심지어 그저 발밑에 밟히는 지렁이는 아닌지 온갖 상념에 젖었다고 했다. 연말이면 그룹에서 차기 사장감을 내정할 것이고 그러면 그는 승천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저 형식뿐인 계열사 부사장 자리가 아닌 사장으로서 전문경영인의 길을 걷고 싶지만, 승진에서 밀리면 현재의 자리조차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내줘야 한다. 

 

 

 

김 전무의 경영실적은 누가 봐도 눈부셨다. 그러나 이 고지부터는 실적만 갖고는 얘기가 안 된다. 정치적, 외교적 수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경쟁의 밀도는 한없이 촘촘해지고, 이제는 막바지를 치고 올라가듯 모든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내야만 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진 것을 늘어놓고 곰곰이 계가해보니 빈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턱없이 부족하다 싶었다. 어쩐다,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하는 것 아닌가? 그룹에서는 뭔가 다른 카드를 요구할 게 분명했다. 정치 경제권과의 두터운 인맥, 리퓨테이션(reputation), 남다른 인성과 뛰어난 리더십을 갖춰야만 했다. 앞에서 굽실대는 아래 임원들을 믿고 순진하게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그 자리를 바라고 있소. 이젠 후배들에게 양보할 만 하지 않소? 그들에게는 이런 암묵적 기대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이무기들끼리 서로  용이 되려고 이전투구(泥田鬪狗) 하는 것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김 전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샐러리맨의 꽃이라는 임원이 되었을 때 그는 태어나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임원이 되기 몇 해 전에 육사를 나와 별을 달고 고향 군지(郡誌)에 이름을 올린 친구를 떠올렸다. 보통은 군수나 상장사 임원, 별을 단 사람 이상, 그리고 부담 없이 고향의 발전기금으로 돈 천만 원 이상 내놓을 수 있는 성공한 기업인이 군지에 올랐다. 이제 나도 고향의 군지에 이름을 올릴 게 확실하지 않은가?

 

 

지천명에 사장이 되면 그것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된다. 고향에서 금배지를 단 사람들은 죄다 그러한 커리어패스를 거쳐 왔다. 김 전무는 속이 탔다. 번개가 으르렁댈 때마다 그의 시선은 용이 사라진 뒷그림자를 쫓았다.

 

 

 

비가 잠시 멈추자 골짜기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서 물안개가 멋진 무지개를 그려주었다. 이제 비는 그친 모양이다. 산장으로 갈까 아니면 좀더 오를까? 잠시 망설이던 그는 오르던 길로 나아갔다. 

 

“나는 분명 약룡이야!”

 

 

그는 이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의식 저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의욕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산에 오르기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고민과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 하다. 그는 해야 할 일을 차례로 떠올렸다. 

 

 

우선 사업부문을 드러내 보일 뭔가를 찾아 대대적인 언론플레이를 해야 한다. 머릿속에서 초스피드로 알고 지내는 기자들의 명함이 스쳐갔다. 그 다음을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윽고 정상에 오른 그는 안개가 자욱한 산 아래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휴대전화를 꺼냈다.

 

 

“회장님, 여기 산이 참 좋습니다. 모시고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러자 저쪽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왔다. 아마도 회장은 산을 골프장 정도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전화를 받는 그의 자세가 뻣뻣했다.

 

“아, 네. 그럼...”   

 

대체 회장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미궁 같은 그의 심중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성철 스님의 법문을 되짚고 내려오는 길에 그는 용이 승천하고 무지개가 뜬 것은 순전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