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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살이 이야기

上書 - 주권의 하늘인 백성에게 올리는 글

by 전경일 2009. 6. 1.

 

 

1800년 정조대왕의 갑작스럽고, 의문스런 죽음은 우리 역사에서 가능한 한 삶을 죽음으로 환치시키는 일대 사건이었다. 정조 독살설의 의구심은 그 진위를 가리기 전에 세종시대 이후 민족사의 일대 개혁과 개방 정신을 후퇴시키고, 다시 보수와 사대를 뿌리 깊게 내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로써 훗날 한일간의 격차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고, 민족사의 어둠은 길게 드리워진다.

 

정조가 독살 당했을 것으로 믿는 남인 측의 확증은 당시 남인계 인사였던 다산 정약용의 <솔피 노래(海狼行)>에 우의적으로 드러난다.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갔을 때 다산이 지은 시에는 물고기의 왕 고래가 솔피 무리의 공격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우회와 시사로 드러내며, 눈에 생생히 그 한탄스러움을 드러내 주고 있다.  

 



          솔피 노래(海狼行) 

 

    솔피란 놈, 이리 몸통에 수달 가죽

    가는 곳마다 열 마리 백 마리 무리지어 다니는데

    물속 날쌔기가 나는 듯 빠르기에

    갑자기 덮쳐오면 고기들 알지 못해. 

 

    큰 고래 한입에 천석 고기 삼키니

    한번 지나가면 고기 자취 하나 없어

    솔피 먹이 없어지자 큰 고래 원망하여

    큰 고래 죽이려고 온갖 꾀를 짜내었네. 

 

    한 떼는 고래 머리 들이대고

    한 떼는 고래 뒤를 에워싸고

    한 떼는 고래 왼편 노리고

    한 떼는 고래 오른편 공격하고

    한 떼는 물에 잠겨 고래 배를 올려치고

    한 떼는 뛰어올라 고래 등을 올라탔네. 

 

    상하 사방 일제히 고함지르며

    살가죽 찢고 깨물고 얼마나 잔혹한가. 

 

    고래 우뢰처럼 울부짖으며 물을 내뿜어

    바다 물결 들끓고 푸른 하늘 무지개 일더니

    무지개 사라지고 파도 차츰 가라앉아

    아아! 슬프도다 고래 죽고 말았구나. 

 

    혼자서는 무리의 힘 당해낼 수 없어라

    약삭빠른 조무래기 드디어 큰 짐 해치웠네. 

 

    너희들 피투성이 싸움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나

    본뜻은 기껏해야 먹이싸움 아니더냐. 

 

    큰 바다 끝없이 넓기만 하여

    지느러미 날리고 꼬리 흔들며

    서로 좋게 살 수 있으련만

    너희들은 어찌 그리 못하느냐.

 



피투성이 싸움에서 고래의 죽음은 다산에겐 정조를 사정없이 물어뜯던 노론 벽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리라. 미완의 개혁의 종착점이 고래의 죽음으로 상징된 것이다.

 

오늘 불현듯, 다산의 글을 접하며, 민족사의 어느 파고를 지금 우리는 헤쳐나 가고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역사에서 정의로움은 패배당하고 마는가? 진실이 승리하는 역사를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인가? 숱한 상념이 고개 수그릴 줄 모른다.

 

뿌리 깊은 사대와 작은 기득권의 끊임없는 강화가 민족사를 어지럽히는 것이라면, 지금의 이 처연한 슬픔은 넘어서야 하리. 그것이 죽음을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기에.

 

왜 민중의 기세는 늘 꺾이고 마는가? 왜 백성들은 이다지도 무심하고, 늘 뒤늦은 후회를 하는가?

 

북으로는 함경북도에서 아래로는 제주 마라도에 이르기까지 어느 도, 군에서나 발견되는  아기장수 설화는 이럴 때 문득 떠올려진다. 영웅을 죽인 공범 의식을 우리는 어떻게 떨쳐내고, 부끄러움을 씻어낼 수 있을 것인가?

 

설화의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다.

 

어느 날 시골 농사군 집안에 아기가 태어난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을 앞의 험준한 산악 맨 꼭대기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용마(龍馬)가 준령을 넘나들며 울부짖는다. 자신이 태울 주인인 장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용마는 마을이 떠나가도록 울부짖는다.

 

농사군의 집안에는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온 집안이 기쁨에 젖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이의 비범한 힘과 슬기와 능력에 집안의 모든 어른들은 근심과 걱정으로 시름에 사로잡힌다.

 

농사일을 갔다가 오면 아이는 대들보를 뒤흔들기도 하고,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까르륵 웃기도 하며, 천리 만물에 대한 식견을 갖는 등 범인(凡人) 부모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능력을 보여준다. 상민의 집안에 비범한 인물이 생기는 것은 절대 신분사회에서는 삼족멸화(三族滅禍)의 대우(大憂)였다.

 

그러기에 집안 제족들은 마침내 아기장수를 멧돌이나, 볏섬으로 눌러 죽임으로서 화근을 없애 버린다. 용마는 슬피 울며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죽어, 이 땅 한반도 도처에는 그에 해당하는 용(龍)자나 마(馬)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생겨나며, 이 슬픈 전설을 후세에 전한다.

 

아기장수는 피박 받는 계급에서 그들을 구하려고 태어나지만 자신의 피붙이인 집안의 제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서 민중의 자식이 민중에 의해 제거되는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떤가? 민주주의가 압살되는 형국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 세력, 그의 예견된 죽음을 통한 항거와 그다운 명백함의 의사표현을 구경거리 삼아온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해서 나는 그이의 유서 한 대목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주변에 미안해하고, 삶과 죽음이 ‘한 조각’이라는 망자(亡者)의 처연함 뒤엔 문득, 광주 망월동을 외로이 지키는 무수한 혼령들의 그 작은 빗돌처럼 그의 ‘오래된 생각’이 내비친다. 그 생각이란 다름 아닌 민주주의이다.

 

그대들이 얻은 민주주의는 가장 헌법 정신에 기초한 것이며, 대한민국의 존립 원칙이다.

 

그 소중한 가치를 이렇듯 쉽사리 조롱의 대상으로, 지켜주지 못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우리는 ‘솔피 무리’나 아기장수를 죽인 집안사람들과 무에 다르랴.

 

수십년간 흘린 피로 민주주의를 얻고, 이렇듯 어처구니없이 손쉽게 민주주의를 내던지는 우리는 그리하여 오늘 김수영의 시를 한 손에 쥐게 된다.

 

시인은 노래한다. 노래는 죽음 아닌, 삶으로의 길을 밝힌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그렇다. 우리는 혁명의 고독함을 물리치고, 잦은 말거리와 번들거리는 희죽거림으로 민주주의의 가치, 대한민국의 존재 근거를 조롱해 왔다.

 

지난 촛불집회 때, 대중들 사이에 퍼진 ‘헌법 제1조’ 정신은 그저 노래 부르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닐터다. 그것은 헌법정신이 이 민족이 삶으로 향하는 길이며, 진정 사람다운 세상을 이루고, 이를 지켜 나가는 유일한 길임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죽었다. 그이의 죽음은 선홍색 항거의 자결이다.

그러나 그의 고독을 아는 자들이라면, 이제라도 노고지리가 되어 피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쳐야 한다.

 

가볍고, 현란하며, 노회하고, 야비하고, 졸렬하며, 작은 권력으로 백성위에 군림하려는 자들과 주판알 튕기듯 이해득실의 수읽기에 바쁜 이 나라 정치인들에게 민족사의 바른 길을 제시해야만 한다. 정신의 혼탁함을 걷어내야 한다.

 

화합과 통합이란, 군동 내 나는 썩은 환부를 도려내며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엔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솔피의 무리를 내쫓아야 하며, 용마가 민주주의를 태우고 하늘로 치솟을 수 있게 하여야 하며, 피토하듯 노고지리처럼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쳐야 한다.

 

그의 ‘오랜 생각’은 의뭉스럽기만 한 현 국면을 깨뜨릴 새벽녘 부엉이 울음에 다름 아니다. 민주주의 회복의 메신저이자, 진실된 통합의 메시지 아닌가.

 

해서 그대들은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이 시간, 어떤 ‘오랜 생각’을 해왔는가.

 

가슴 벅찬 민주주의를 시대의 역사에 쓰고, 사람들의 신명난 삶에 쏟아 부어야 한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국민 각자는 분별력을 드러내야만 한다. 만세 만만세의 뜨거운 삶의 목적은 오로지 민주주의 일터, 그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노예의 삶을 살터이니. 그럴 땐 한 조각 역사에 부끄러움만 남기게 될 터이니.

 

 

인문경영연구소장ㆍ작가 전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