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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우리 기업만의 콘텐츠를 창조하는 힘, 인문경영

by 전경일 2009. 7. 20.

물이 72퍼센트나 되는 지구의 바른 ‘이해’는 실제론 수구(手球)다. 그런데도 지리학자들이 지구(地球)라고 부른 것은 뭍의 관점에만 서기 때문이다. 실은 대륙은 거대한 섬이다. 하지만 누구도 섬이라고 하지 않는다. 지구 전체를 개괄하기보다는 ‘보이는 것’에만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른 시각을 부여한 사람은 시인이다. 존 단은 이렇게 둘러 표현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누구나 대륙의 한 조각이고 그 일부이다.”

여기에 ‘사람’ 대신, ‘비즈니스’를 넣으면 뜻은 보다 분명해 진다. “어떤 비즈니스도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유니버스로서 전체를 볼 때가 ‘비즈니스’다. 이렇게 보면 고객과 기업 관계도 좀 더 뚜렷이 알게 된다.

고객을 향한 구애가 기업 최대 관심사인 지금, 경영학은 과거의 태(態)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고객의 변심 앞에 감성경영이 등장하고, 고객 저변을 훑기 위해 CRM이 등장한지 이미 오래다. 효율성을 위한 노력은 오래전부터 6시그마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왜 시장은 확장되지 못하고, 수익은 정체되며, 고객들은 쉽게 마음이 바뀌는가? 기업들은 짝사랑에 지친 양 진이 빠질 정도다. 그러기에 단순히 뭍에서 바라보는 대양이 아닌, 대양에서 바라보는 뭍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바다에서 바라보이는 뭍을 기준으로 바다의 정점(定點)을 정하면 이전과 달리 새롭게 보일 것이다. 기업 인식에 있는 ‘고객’이 아닌, ‘사람으로서 고객‘을 꿰뚫어 볼 때 눈이 번쩍 뜨인다.

이처럼 인문은 분과주의 시대의 학문을 넘어 경영이 넘어 갈 오작교를 열어준다. 인문의 바다에서 물을 끌어다 경영의 밭을 흠씬 적시는 일은, 그러기에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영학은 18, 19세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출발했다. 이때부터 경영(학)은 생산과정과 생산물을 극대화시킬 방안에 몰두했다. 조직운영이나, 작업 환경 전반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경영학은 탄생한 것이다. 그 후 경영학은 기업경영 전반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며 지금껏 권능을 유지해 왔다. 성과관리 중심 사고가 먹힌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고 있다. 과거의 레시피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특히 경영학은 속무수책이다. 그 결과, 새로운 접목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다 깊이 희구하고 있다.

인간사 지혜를 터득하면 경영이란 너무나 간명한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경영학은 인문학에 견주어 보면, 경영과학, 즉 ‘치산이재(治産理財)’를 위한 분과에 불과하다. 수많은 경영 이론이 있고, 효율성을 위한 원칙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에 경영은 뭐라 정의 하든 ‘사람’에 귀속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뒤따른다면 기업은 더 강하고 오래가는 에너지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을 안다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인문학은 ‘인(人)’과 ‘문(文)’의 합자(合字)로 이 말이 상징하듯, 인간이 글로 아로새기는 지혜의 기초자, 완성이다. 이 지혜의 덩어리는 어떻게 쪼개내느냐에 따라 바위를 깨고 보석을 꺼내듯 가치가 결정 난다. 간단한 해법을 얻고자 하는 자에겐 최소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지만, 심원한 인간사 묘미를 알고, 세상에 대응해 나가고자 하는 자에겐 무한한 인류의 정신과 만날 공간을 제공한다. 경영학의 태두인 피터 드러커조차 경영학의 본질을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경영학은 인문학이다. 경영학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해 하나하나 이루어 가는 것을 도와주는 학문으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사람들을 통합하는 학문이다. 결국 사람에 대한 학문인 것이다.”

물론, 드러커 식 수사는 호수에 바다를 끌어대는 식이지만, 그래도 경영학을 인문의 영역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제서야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경영(학)의 탄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금세기에 이루어진 모든 생산혁명은 디지털이라는 인류사적 변화 앞에서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경영은 이제 인간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새로운 요구는 시대 흐름이 반영된 것이다. 그 반영은 인문에 대한 새로운 각성으로 이어진다.

갈증이 심화되면, 내 우물 아닌, 남의 우물로도 목을 축여야 한다. 그럴 때 새로운 ‘이해’에 다가선다. 세계경제 시스템이 한순간에 의문의 대상에 붙여지는 시대, 황망한듯 미래의 불확실성에 운명을 내던진 기업들은 그래서 다들 이전을 뛰어넘기 위해 꿰고, 뚫고, 엮는 다차원적 노력을 한다. 지식 통섭은 이에 가장 적절한 해법이 된다. 초영역 분야를 아우른 통합학문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지금 기업이 처한 현실은 새로운 전변(轉變)을 필요로 한다. 1862년 링컨 당시 미국이 그랬다. 그 해 12월, 이 유명한 미국 대통령은 의회 연설을 하는데, 그날의 선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고요했던 과거의 진리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현재에는 맞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푸르스트의 경우에는 이렇게 일갈했다. “참된 땅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새로운 시각을 가질 때 새로운 경영은 펼쳐진다. 이제 인문경영의 실마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는 걸 알게 됐을 것이다. 인문의 일상성은 생활 곳곳에서 비즈니스로 연결된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위에 얹어진 부드러운 크림은 배의 이물에 와서 부서지는 포말과 같다. 바다와 뱃사람을 연결하자 불현듯, 멜빌의 <백경>이 연상된다. 그렇지! 스타벅스(Starbucks Coffee)는 소설에 나오는 항해사 ‘스타벅’에서 따왔지. 세 사람의 커피 회사 창업자 중 누구라도 이 소설을 접하지 못했더라면, 이 브랜드는 훗날 누군가 채갔을 게 분명하다.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Innisfree) 호수섬>은 또 어떤가.

“나 일어나 이제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여심을 이끌어 들이고 싶은 강력한 유혹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니스프리는 아모래 퍼시픽과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고객은 이루젼을 샀다.

인문이 주는 감성은 세익스피어의 단 한 줄 글귀로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꿈과 인간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네.” 세계적인 대문호가《템페스트》에서 한 말이다. 은유가 사람을 붙잡고, 본질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이제 다시 존 단의 시로 돌아가 우리 모두가 섬이 아니듯, 경영(학)도 섬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야만 한다. 섬(경영)은 다른 섬(다른 학문)과 연결될 때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인문경영이 지닌 연결성이자 포괄성이다. ‘깨어남’의 세계로 자신의 잠든 영혼을 일깨운 스티브 잡스는 ‘인문경영학적’이라서 창조적이다.

“만약 인식의 문이 제거된다면, 모든 것들은 무한하게 있는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신비주의 시인 윌리엄 브레이크의 상징을 잡스는 신으로부터 계시 받은 양 아이팟에도 아이폰에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브레이크에게 종달새는 새가 아닌, 천사의 전령이다.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닌, 신의 대필자로서 쓴 것이다. 아이폰의 그 신비주의적 마케팅이나, 비지니스를 신화화까지 하는 잡스식 경영은 인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도무지 생각해 낼 수 없는 것들이다. 인문은 이처럼 경영학이 보지 못하는 것을 통찰케 한다. 평소 인문을 기업의 성과에까지 연계시키는 기업이 있다면, 남들이 찾아 내지 못한 가치를 찾아 마치 카라라의 대리석 산에서 채석공들이 캐내는 돌을 바라보며 그 속에 잠자고 있는 조각품을 꺼내는 걸 상상한 미켈란제로와 같지 않을까? 여러분은 조직에서 채석공인가, 위대한 예술가인가?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경영의 거물못 임에 틀림없다. 우리 역사를 관통하면 조직 해법을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세계제국 원은 약 1세기에 걸쳐 고려를 지배하며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과 폐위를 일삼았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자, 공민왕은 대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른바, 병신정변(丙申政變)을 통해 반원자주의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공민왕 5년(1356) 5월 1일, 원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딸을 바치고 원의 높은 관직을 받아 크게 위세를 부리던 대표적인 친원세력 거물들을 곡연(曲宴)에 초대한다. 기철, 노책(盧頙), 권겸(權謙)등이 그들이었다. 그들과 일족을 당일 주살한 공민왕은 같은 날 군대를 발진, 서북면병마사 인당(印瑭)으로 하여금 압록강 건너 원 요새지 공격하게 하고,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철령(鐵嶺) 이북 쌍성총관부 점령하게 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부원세력이 몰락하고 공민왕의 반원개혁이 시작되게 된다. 이 엄청난 일이 단 하루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어 공민왕은 관제를 문종 대(代)로 다시 복원하고, 원의 국정감시기관인 정동행성 혁파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변발(辮髮)․호복(胡服) 등 몽골풍을 폐지한다.

어떻게 이런 역사적 대사건이 단 하루 만에 벌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랜 준비 끝에 강력한 속도로 휩쓸듯 일거에 국면전환을 해냈기 때문이다. 모든 혁신은 놀랍게도 주력을 집중한 속도력에서 나온다. 집중된 힘과 속도가 국면 전환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조직 운영상의 유연성(flexibility)의 가장 혁신적 예는 백헌 이경석(李景奭, 1595~1671)과 연결된다.
1364년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일대 의료(衣料)혁명을 일으킨 ‘신병기’였다. 우리 역사상 어떤 혁신도 이를 능가할 수 없다. 그런데 문익점이 가져온 씨앗 중 단 하나가 발아하게 되는데, 이 원천 종자가 169년이 지난 1643년(인조 21)때까지 그대로 재배된다. 당연히 유전형질상 바람직스러울 수 없었다. 이때 심양과 요동 등지에서 목화종자를 들여 와 종자개령을 주청한 이가 다름 아닌 이경석이었다. 그는 인조가 병자호란 때 서울 송파나루 옆에 만든 수강단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을 때 바로 곁에 있었다. 항복조건으로 지금의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세우게 되는데 그는 이 비문을 짓게 된다.
 
겉으로 보면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기 9년 전인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조선은 후금[後金, 후에 청(淸)]을 막을 수 없으면서도 모화사상에 빠져 주전론(主戰論)이 팽배한 것을 보고 실직 이득을 주청한다. <이경석 행장>을 보면, “척화 일사(一事)가 어찌 정대하고 명쾌하지 않겠는가마는 국사와 민심이 한 가지로 믿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사세를 돌아보지 않고 강적에게 분을 돋우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라며 현실적인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척화론에 묻혀버리고, 조선은 전란을 맞게 된다. 그런 그가 1641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를 보필한 것은 망해가는 명에 대한 사대보은이 아닌, 청이 흥기하고, 세상의 흐름이 실리로 간다는 것을 직시한 현실주의자의 태도였음을 잘 보여준다. 현실에 대한 가장 유연한 대응이 국란 앞에서도 혁신의 씨앗을 뿌리는 유연성을 발휘케 한 것이다.

실행의 측면은 세종 시기, 4군6진 개척 과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원래 6진은 ‘왕이 일어난 땅(興王之地)’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땅이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잦은 침입으로 세종 7년 이래 조정에서는 국토의 경계를 청진까지 물리자는 퇴배론(退排論)이 강력히 대두된다. 싸움을 피하고 국토를 양보하자는 무리들의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나는 나라의 땅을 줄일 수 없다.” 고 국토에 관한 한 굳건한 입장을 취한다. 퇴배론을 물리치고 세종은 오히려 방어지를 전진시키며, 세종 15년 야인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자, 김종서를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해 4군 6진으로 군사를 발동시킨다. 김종서가 사진(四鎭) 개척을 계획할 때 조정에서는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반대파들은 김종서가 자기 한계를 모르고 일을 벌리고 있으니, 그를 잡아 처형하여도 죄가 남음이 있다고 극언까지 하였다. 이에 세종은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종서(宗瑞)가 없었더라면 이 일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종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없었다고 하면 이 일을 주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며 강력한 정책 실행력을 드러낸다. 그로 인해 세종 31년에는 마침내 6진의 완성을 보게 되며 현재까지 나라의 강계를 이룬다. 굳건한 실행력의 승리였던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한마음 한뜻으로 밀고 나갈 때 성공 가능성이 높다. 충분한 논의가 모아지면, 방향성과 일체감을 갖고 추진하는 것은 역사 발전의 정도(正道)다. 국가가 이럴진대, 하물며 기업이야 말해 무엇하랴.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한마음 한뜻’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필원잡기』를 보면, 저 유명한 신숙주 일화가 나온다.

“어느 날,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는데, 어린 내시에게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를 엿보게 하였다. 바야흐로 신숙주가 촛불을 켜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내시가 돌아와 아뢰기를 ‘말씀대로 서너 번이나 가서 보아도 글 읽기를 끝내지 않다가 닭이 울자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돈피 갖옷을 벗어 그가 잠이 들 때를 기다려 그 위에 덮어주게 하였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서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선비들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을 쓰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집현전엔 ‘일해라.’공부해라‘는 말이 필요 없게 되었다. 임금이 신하를 대하길 영주에 오른 것처럼 하였다니 모두의 마음이 흔쾌히 합치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영주란 ’신선이 사는 곳‘이다. 집현전 학사들을 이처럼 대했다니, 어느 누가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조선의 지적 토대, 르네상스는 이런 일체감이 만들어 낸 결과였던 것이다. 혼과 혼이 결합되면, 바위도 가른다. 어느 조직이나 ‘직원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초우량 기업이 되는데 필수요소임에 틀림없다. ‘한’ 마음과 ‘한’뜻이다. ‘두’ 마음이 아니다.

세계에 대해 다면적 인지는 경영환경 변화에 대해 주도적으로 임할 수 있게 한다. 어느 시대, 어느 경영이건 자신을 꿰뚫는 자가 현실의 벽을 뚫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경영은 기업에 심원하고 장구한 해답이 될 수 있다. “한 개의 촛불로 여러 개의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다. 그러니 인문이 제시하는 그 깊고 너른 지식을 함께 나누며 키워나간다면, 그런 조직은 더욱 찬란하게 붉을 밝힐 게 분명하다. 존 단의 시로 돌아카 끝맺음을 한다면, 오늘 그대가 손을 내밀면 섬(지식)들은 이어져 대륙(더 큰 지식)이 된다. 손을 내밀 생각이 있는가?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더 씨드: 문익점의 목화씨는 어떻게 토요타자동차가 되었는가>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SK그룹 사보, 2009.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