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세종의 창조경영

by 전경일 2009. 2. 3.

 세종과 21세기 창조경영의 조화로움

왕은 젊어서 등극했다.

새파란 22살, 등극할 때만이 아닌, 평생 동안 젊었다. 촌각을 아껴 앞서 나갔고, 이끌었다. 인(仁)을 쌓아서 나라를 열겠다( 累仁開國)는 굳은 신념은 용광로 같은 실행력을 얻었다. 하늘(.)과 땅(ㅡ)과 사람(ㅣ)은 그의 경영의 주제이자 목표였고,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창조해 낼 것인가가 과제였다. 백성과 더불어 한바탕 살아가는 즐거움(生生之樂)을 누리도록 하는 것은 그의 천임(天任)이었다. 재위 32년. 시작이 그랬고, 끝맺음이 그러했다. 그의 숨결은 신생조선의 아침을 들깨웠고, 끝내 불멸의 경영으로 남았다. 전례 없는 국가경영의 극치가 펼쳐진 것이다. 스스로 왕으로 소임을 밝히기를, “오로지 애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국가경영자의 책무가 무엇이길레 이토록 피 말리는 생애를 다했을까?

세종.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그는 스스로 엄격함과 장엄함으로 우뚝 섰다. 뼈를 깎는 혁신이 경영자의 본질임을 몸소 드러내주었다. 휘어지고 구부러짐을 바로잡는(政者正也) 경영철학은 일생을 지배했다. 그 자신 구두선이 아닌 위민(爲民)경영자로 포지셔닝시키고자 했다. 600여년이라는 시대를 뛰어 넘은 창조의 기틀은 조선의 일대 르네상스를 가져와 모두가 풍성하고 평등한 상향식 경제시스템(大豊平)을 지향했다.

지금 우리는 창조적 역동성으로 미래를 열어나가는 새로운 이정표를 얻기 위해 그의 찬란한 경영 앞에 서있다. 세종시대의 경영은 21세 창조경영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그의 경영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경제가 전쟁인 글로벌 시대. 세상은 풍요롭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나, 속내는 치열한 전쟁터가 따로 없다. 한 발 앞이 벼랑끝이요, 그 너머가 대평원이다. 오늘날 경영환경은 목전까지 무한경쟁의 칼날이 닿아있다. 칼날을 받던지, 녹여 없애던지, 양단간 결단이 필요하다. 현 국면을 어떻게 뛰어 넘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우리 내부가 쌓아온 가치의 자산을 살펴봄으로서 우리 힘이 어디서 발원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역사를 심경(深耕)하다보면, 두꺼운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도 꿰뚫어 낼 수 있다. 미래를 살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중차대하다. 시대를 앞서간 창조적 사고를 통해 앞선 시대를 사는 탁월성의 경영을 이뤄낸다면, 도약을 이뤄낼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모방의 덫’에 갇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창발성의 원천인 세종시대의 담론, 책무, 비전을 읽어 내는 통사적(通史的) 접근은 현재의 문제를 풀어 헤치는 해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상 최대의 르네상스는 지금에 이르러 오히려 그 시대의 진지한 고민과 열정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세종과 21세기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유이다.

경영자로서 세종의 자기계발 노력

“내가 지금도 독서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다만 글을 보는 사이에 생각이 떠올라서 정사(政事)에 시행하게 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세종실록』20년 3월 계유)

세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호학열’은 한 시대를 준비하고 열어가는 과정이자, 경영자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는 경영자의 학습된 정도가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비전을 어떻게 제시하고 이끌어 나가느냐 하는게 실마리가 된다.

세종은 16세부터 스승인 이수(李隨) 에게 배우기 시작해 남다른 호학열로 많은 지식을 축적했다. 세자가 된 이후에는 서연(書筵)에서 공부를 하다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는 경연(經筵)에서 학문을 보다 깊이 쌓았다. 특히 16세부터 22세 까지의 5년은 경영핵심과정이 진행됐다. 취임과 동시에 세자 때에 경영학습을 받던 서연관(書筵官)을 경연관(經筵官)으로 고쳐 제수하고, 경연제(經筵制)를 증원했으며, 또 경연청(經筵廳)을 새로 짓게 했다. 경연이란 군신이 공동 학습하는 세미나 장이었다. 경연청에는 정승급에서 충원되는 영사(정1품)에서 서사(정7품)까지 약 20여명의 우수한 관리가 배치되었다. 당대 최고의 지적 멘토들과 더불어 학습역량을 공공히 한 것이다. 즉, 대략 20여명의 전문가들로부터 특별학습을 받으며, 경영수업을 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경영을 위한 세종의 학습열은 열렬했고, 그칠 줄 몰라 역대왕들이 30여회를 넘지 못했던 경연을 세종은 건강문제로 중단 할 때까지 무려 1,898회나 열었다. 얼마나 꽉 짜여진 학습조직이 관리됐는지 알 수 있다. 이런 ‘호학열‘은 애당초 대성할 싹을 보인 세종의 트레이드 마크와 매우 잘 어울렸다.

 

“임금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작은 병이 있었는데도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태종은 환관을 시켜 책들을 다 가져오게 하였다. 오직 구양수(歐陽修)와 소식(蘇軾)의 글만이 옆에 있었는데 그것도 다 보았다. 취임하여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비록 식사 중에도 반드시 좌우에 책을 펼쳐 놓았고, 혹은 밤중이 되어도 힘써 보아 싫어함이 없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 이르기를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을 거두고 한가히 앉아있을 때가 없었다.’고 하였다. 또 근신에 말하기를 ‘내가 서적들을 본 후에는 잊어버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 총명함과 호학함은 천성으로 그러했던 것이다.”

 

세종의 이 같은 학구열은 구체화되어, 세종 2년 집현전 설치운영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그 자신 ‘현명한 자로 임금을 세운다.’는 ‘택현론’의 원칙에 따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한 국왕이다. 왕이 되기 전부터 각 방면에 걸쳐 국가경영에 참고가 되는 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지식경영을 위한 세종의 커리큐럼으로는 국가의 흥망(興亡), 군신(君臣)의 사정(邪正)ㆍ정교(政敎)ㆍ풍속(風俗)ㆍ외환(外患)ㆍ윤도(倫道) 등 각 방면에 걸쳤다. 분과형 (分科形) 학습이 아닌, 통섭형 학습이었다. 세종은 선행학습을 통해 역대 제왕들의 장단점을 파악함으로써 통사적 경영시각을 갖게 된다. 부왕인 태종과 달리 한번도 국외로 나가 본적이 없으면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된 배경이다. 거기다 특유의 지식과 경험을 순열하고 조합해 내는 상상력을 발동하며 당대 거의 모든 지식을 체계화했다. 수불석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말처럼 호학함은 그의 성품에서 나왔다.

왕은 책속에서 더 멀리 더 깊게 세계를 인지했다. 유학이 가리키는 국가경영철학에 중점 둔 것이었다. 유학은 신생조선의 생생한 국가경영이념이자, 실천 철학으로 손색없었다. 명징했고, 팔딱팔딱 뛰었으며, 신선했다. 세종이 책 속에서 국가경영의 아이디어를 얻고, 현실 경영에 활용한 것은 유교적 가르침과 학습력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는 현재를 창조적으로 해석해 조선에 맞는 제도, 기술, 인프라로 승화시켜 나간다. 각 분야는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유관 분야로 네트워크 효과를 발휘했다. 이 점에서 세종시대 창조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두뇌 그룹을 통한 창조 경영의 실천

세종은 문학, 사상, 역사 등 고전을 골고루 섭렵하며 당대의 제 문제를 뛰어넘는 창조적 발상을 하게 된다. 요즘 경영자에게 유행하는 문(文)ㆍ사(史)ㆍ철(哲)이 바로 이것이다. 창업된지 얼마 안된 시점부터, 지속혁신으로 국가창신(創新)에의 뚜렷한 목표를 세운 것이다. 이는 창업과 수성이 교차되며 새로운 시대로 전환해 가는 역사상 중요시점에 나타난다. 그가 기울인 각고의 노력은 뛰어난 개인적 자질과 어우러지며 유교적 원리인 하늘과 세상과 사람, 즉 천지인이 합치되는 경영이상을 구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국왕의 의무였고,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책임의 범주였다. 세종은 이 야심찬 목표를 이루기 위해 두뇌집단의 필요성을 뼛속 깊이 절감한다. 22살의 청년 CEO는 묘책을 역사 속에서 찾아냈다.

‘현명한 자들을 모아 놓은 집’이라는 뜻의 집현전(集賢殿). 이 위대한 씽크탱크는 이 같은 세종의 국가경영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연구 집단으로서 우리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신생 조선의 두뇌 집단을 통해 세종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국가경영 전체를 인지하고 조망하며, 넓은 지적 시야를 확보함으로서 변화하는 세상을 앞서 리드해 나가려는 것이었다. 나아가 조직의 창의성을 높임으로서 국가경영의 수를 고양시키려는 것이었다. 조직운영에 있어 세종은 장기적 안목을 지녔다. 당시 집현전에 선발된 인재들은 이제 스물, 서른 살 무렵의 전도양양한 젊은 수재들이었다. 이들은 세종과 더불어 커가며 이후 17년 후에는 보다 본격적으로 국가경영에 뛰어들게 된다.

세종 재위시 추진했던 과제들의 성격은 다분히 인프라적인 것이었다. 세종은 그 자신 몸에 밴 탐구 정신과 문제의식, 지력(知力)과 경험을 살려 국가 인프라 및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실행자 역할을 자임했다. 남의 것도 가져다 충분히 소화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가치로 재탄생시키고자 했다. 그 전까지 해온 벤치마킹 수준의 경영은 창조가 대신했다. 세종시대 놀라운 경영실적의 배경에는 응당 CEO 자신의 준비된 역량과 희구, 시대적 부름이 함께 했다. 더불어 당대 혁신의 주역들과 함께 상호호응하며 빚어낸 결과이다. 세종은 경영이전에 사람을 알았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흡인력에 한 시대는 물론 전 역사가 빨려 들어왔다.

세종이 백년, 천년을 내다본 상상플랜 하에 지식과 창조의 대장정에 나선 것은 경영자의 사고의 지평이 결국 한 시대의 탁월성의 경영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경영자가 지닌 그릇의 크기가 크게 작용한다. 유학 이념을 현실경영의 기치로 내세우며 몸소 ‘드높은 평화에의 경지’, 즉 ‘융평(隆平)’ 과 ‘절대 풍요의 경지’를 나타내는 ‘풍평(豊平)’의 경영을 실천한 것은 국왕의 책무 이상으로 지극한 애민에의 지향을 드러내 준다. 창조적 두뇌집단은 이 같은 경영철학을 구체화한 지적기반이었다.

오늘날은 모든 면에서 부분 해법보다는 전체 해법이 중요하고, 이전에는 누구도 감히 생각해 내지 못한 힘이 진정한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부분적 리더십이나, 부분적 지식ㆍ가치관ㆍ세계관은 한계에 처해 있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계(視界)에서 스스로 일으켜 세우고 그 시대 사회와 가치, 존엄성을 높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게다가 세계화라는 거친 풍랑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원거리 바다로 내몰고 있다. 내몰리지만, 한편으론 속도의 즐거움도 누리고 있다. 모든 게 굳어 있다면, 전혀 변화 없다는 얘기일 테고, 그렇다면 자원이 부족한 우리에게는 기회의 면적이 훨씬 줄어든다는 얘기다. 변화가 주는 기회는 두려움보다 훨씬 크다. 주역 <<계사상전>>에 경영은 궁리(窮理), 강구(講究), 도모(圖謨), 시무(始務), 변화(變化) 가 연속 순환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다. 이 같은 키워드들은 세종이 주목하고 끌어안은 참다운 가치라 할 수 있다. 다른 시대, 다른 리더십의 본질을 알고 세종을 CEO로 지명한 태종의 혜안과, 세종시대를 주도한 창의적 발상은 세종 자신과 그와 함께 한 위민(爲民) 철학으로 무장한 지식인 그룹이었다. 이들에 의해 한번 창조된 지식은 조선사회를 밝히며, 이후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가치로 인정되기에 이른다.

세종시대 창조경영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종시대 경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15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는 크게 세 축이 있다.

첫 번째,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인지와 기회 포착의 창조성이다.

어느 시대나 경영자의 탄생은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의 고유한 담론에 영향 받는다. 시대적 모순이나, 가치, 바람과 무관할 수 없다. 이를 외면하느냐, 받아들여 새로운 국면을 열어 나가느냐 하는 것은 동시대 만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경영자의 역량과 리더십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세종이 태어난 1397년은 중국에서 명이 건국하고 난지 28년 지난 때였다. 대륙 패권을 놓고 벌인 원ㆍ명 왕조교체는 세계제국 원을 통해 국제화 무드가 조성된 시기에서 한족 중심의 명으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한 시기였다. 원 제국하의 세계 질서는 강력한 문명의 교류가 일어나는 세계화의 현장이었다. 원 제국하 이슬람 문명을 원천으로 하는 과학기술은 명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를 맞이한다.

대제국 몽골이 숨을 멈춘 다음, 동서양의 문명의 교류가 남긴 이 유니크한 가치는 주인을 잃은 채 새로운 가치를 주목하는 창조적 집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 신속하게 내부 안정을 꾀한 조선은 관심을 밖으로 돌린다. 세종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감지하며 거대한 과학기술의 기회 앞에 우뚝 선다. 개방성과 기회, 통찰력이 삼박자를 내며, 이슬람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도입되는 계기이다. 세종이 원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학의 이념인 대천이물(代天而物) 사상과 국가경영의 일치를 이루고자 한 취지였다. 나아가 원제국의 자산(asset)을 나누어 가지려는 현명한 경영적 판단에서 나왔다.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기에 세종은 선진 문물의 벤치마킹을 통해 신생 조선에 기회를 부여하고, 외부에서 빌려온 것도 조선의 항아리에 집어넣어 새롭게 주조(鑄造)해 내고자 했다. 세종시대 과학적 창조경영의 원류는 바로 이슬람의 유산인 셈이다. 그 당시 회회교도(回回敎徒, 이슬람교도)가 조회에서 이슬람 경전을 암송해 나라의 풍속을 따르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창조 사회의 일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세종은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 맞게 독창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유에서 더 큰 유를 창조하는 ‘본유(本有)의 시대’를 열어젖힌다. 이는 리더 스스로 자신의 ‘독특한 역량’을 알고, 이를 국운 융성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다이내믹 코리아를 만드는 원동력으로 삼은 것을 뜻한다.

세종 시대의 독특한 가치는 변화하는 환경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내 각종 프로젝트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데서 출발한다. 안보이거나 묻혀있는 것 중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 이를 이노베이션ㆍ인벤트 해 나감으로써 본질적인 국가경쟁력을 제고한 것을 뜻한다. 조선의 국왕은 이 같은 역사적 과업에 직접 참여했다. 세종이 손수 관리하고 지도한 프로젝트만 보더라도 이를 극명히 알 수 있다. 이 시기 프로젝트들은 창조적 혁신을 목표로 했다. 출판ㆍ인쇄 분야에서는 『농사직설』1429, 『태종실록』1431, 『삼강행실도』1432, 『팔도지리지』1432, 『향약집성방』1433, 『훈민정음 해례본』1446, 『동국정운』1447, 『사서언역』1448, 『고려사』 1450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새로운 지식 지형도가 그려졌다.

세종시대 창조경영의 핵심은 원래 외부역량이었어도, 이를 창조적으로 수용ㆍ혁신해 독창적인 가치로 승화시켜 낸 것이다. 예컨대, 낮과 밤에 시각을 측정하는 시계인 <일성정시의>는 이슬람 기술을 벤치마킹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이에 머물지 않고 장영실을 통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낼 것을 주문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옥루>이다. 이는 중국 송ㆍ원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이슬람의 모든 물시계에 대한 문헌을 샅샅이 연구한 끝에 창조해 낸 결과물이다. 장영실이 임금의 시계를 만든 것은 스스로 경천근민(敬天勤民)하는 시간을 알고 싶어 하는 경영자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세종이 장영실 등과 더불어 혼천의 제작시, “중국의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이는 모방을 창조의 프로토 타입으로 생각하고 접근한 경우에 해당된다. 즉, 어플리케이션(응용)만이 아닌, 원천분야를 개척하라고 한 것이다. 또한 <칠정산> 내ㆍ외편처럼 중국과 이슬람 기술을 원용해 이를 조선의 독창적인 달력으로 혁신해 낸 것도 원천영역에 접근한 사례에 해당된다. 시간을 알아내려는 CEO의 노력과 성과는 제왕의 창조적 경영의 구체적 성과로 볼 수 있다. 세종은 자신이 경영하는 때를 알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박연의 음악이나 악기제작, 우리 고유의 달력 개발은 세종으로서는 상당히 큰 리스크를 짊어진 과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같은 ‘표준’은 중국 황제의 영역으로 생각되어, 독자 행보는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이를 교묘히 파고들어 기득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인물이 최만리 일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세종은 혁신의 걸림돌을 슬기롭게 무화(無化)시켜나가며 정면으로 도전해 나갔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각종 프로젝트들은 생명력을 얻었다. 원천 소스에로의 접근은 파생기술을 가져와 합금술 분야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왔다. 인쇄분야에서의 이노베이션은 경자자(庚子字)의 혁신을 가져왔고, 인쇄효율은 500%나 신장된다. 활자기술의 혁신은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는 세종이 꿈꾼 지식사회를 강화하는데 적절한 수단이 되었다. 갑인자를 통한 1일 인쇄 부수는 2000%나 향상되었다. 이 무렵, 출판은 백성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자, 결과물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농업 분야에서는 <<농사직설>>을 통해 새로운 농법이 제안된다. 이 시기 등장한 새 농법이 매년 농사를 짓도록 토지 사용을 극대화한 ‘연작상경법(連作常耕法)’, 작물들 사이사이에 파종한 ‘간종법(間種法)’, 규칙적으로 거름을 주는 ‘시비법’ 등이었다. 조선이라는 토양에 기름을 뿌리고 씨를 내어 다수확을 거두어 내려는 혁신을 위해 세종은 실무진들을 전국방방곡곡에 돌게 해 나이든 농부들에게 최상의 농법을 물어 이를 메뉴얼화 했다. 그 결과 농업생산성은 벼농사의 경우 파종 후 수확이 4000%나 향상됐고, 고려 초 대비 같은 면적에서 약 300~600%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고려 말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를 하삼도(전라, 충청, 경상)에서 재배에 성공해 6진 개척시 북삼도(함경, 황해, 평안)에 보급한 것은 국토확장과 경국대업을 일체화시킨 정책이었다. 10년 내 전국에서 목화가 생산되고 그로인해 의복 문화가 급신장되기에 이른 것은 혁신의 확대재생산이 급속도록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의학 분야에서는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는 의술을 개발하고 우리 땅에서 나오는 토산 약제를 활용한 우리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향약구급방>>을 간행하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방대한 의학ㆍ약학 관련 서적을 편찬한다. 이와 더불어 <<향약채취월령>>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통해 이 땅에 맞는 신토불이적 의학을 세우겠다는 주체적 의식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방방곡곡에서 채집한 토산약재에 약 이름과 채집된 고장의 이름, 건조시킬 때의 방법 등을 상세히 붙였다. 하나의 데이터도 유실이 없게 한 후 정밀한 교정을 통해 인쇄 보급 하였다.

세종시대의 창조적 경영혁신은 생산 현장에서 노동력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때 아이를 낳는 임산부들을 위한 보급판 의학서인 <<태산요록(胎産要錄)>>이 보급되며 400%의 농촌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소아 사망율을 현격이 줄이며 생산인력을 보다 크게 확대했다.

세종은 기회 발굴과 창조적 혁신, 쉼 없는 노력으로 경영의 극치를 이뤄 낸다. 이 시기 원숙한 창조적 여건은 생산성 향상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쳐 오늘날 그 어떤 생산성향상 운동보다도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결과를 도출해 냈다. 사회 전 분야의 혁신과 창조적 풍토는 경제안정과 문화강국의 선순환적 구조를 만들어 내며 세종 시기를 완전히 차별화된 르네상스기로 격상시킨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인지와 기회포착의 창조성이 밀알이 되어 대풍평(大豊平)의 세상을 열어젖힌 것이다.

두 번째, 조직 운영상의 창조성이다.

세종은 능력을 중시했다. 그런 인재관은 ‘택현론’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자신의 능력을 알았기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한다. 가문과 혈통으로 관직을 얻던 ‘음서제(蔭敍制)’를 축소하고 능력을 중시하는 과거제를 확충한 것은 인재확보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원천적으로 핵심인재의 가치를 알고, 조직운영의 효율성ㆍ실효성을 높이고자 한 정책적 배려였다. 흔히 요즘의 경영학에서 얘기하는, ‘사람의 문제(people’s issues)‘에 세종이 보다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것을 뜻한다. 집현전을 통한 창조적 인재 육성이나, 안식년 휴가처럼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운영해 인재들의 지적 리프레쉬(refrech)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식기반 사회를 이끌고자 한 세종의 창조경영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경영=인재관리‘라는 생각 하에 핵심인재를 발굴해 이를 집중 육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발탁된 우수 인재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보상을 실시하고, 현대 경영의 주요 화두인 성취동기를 강하게 부여함으로서 각종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예가, 대소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종6품인 상의원의 별좌에 임명한 것이다. 이 직책은 왕실천문ㆍ지리ㆍ역법 연구기관인 서운관의 천문학 교수 및 고을의 현감과 같은 지위였다. 관노(官奴)에게 주어진 파격치고 일찌기 이 같은 예가 없었다.

세종은 왜 그런 능력에 부합하는 파격인사를 단행한 것일까? 이는 프로젝트의 오너십을 부여하기 위한 조처였다. 현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파격적인 인재 발탁에 이어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시켜 최첨단의 이슬람 과학기술을 도입할 것을 지시한다. 장영실을 발탁 인사하며, 세종은 “그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가 있을 뿐 아니라, 성품이 특별히 영특하고 매양 강무에서도 열심히 노력해서”(세종실록』15년 9월 16일 ) 뽑는다고 밝히고 있다. 핵심인재의 역량을 알아보고, 이를 더욱 업 -그래이드 시키는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적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이끌 수 있도록 배려한 셈이다. 세종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장영실은 15세기 당시 세계에서 최첨단이었던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초정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를 발명하고, 측우기, 해시계, 대?소간의대 및 기타 기계?건축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낸다.

또 다른 예로, 조선 선박에 비해 일본 선박이 경쾌하고 빠르다는 사실에 주목해 원인을 분석해 조선 기술을 개량하고자 세종 27년에 일본 기술자를 초빙 귀화하게 해 ‘호군(護軍)’의 벼슬을 주어 배를 만들게 했다. 호군(護軍)은 당시 장군(將軍)급의 정사품의 무관직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외국인에 대해서 취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음악 분야에서는 당대 제일의 음재(音才)인 박연을 통해 작곡 및 음악이론 정립, 그리고 악기 개발 제작 일까지 수행케 한다. 이런 혁신성과로 세종은 고려시대 음악을 모방해 쓰던 전임 CEO들의 관례를 무시하고 새롭게 창조해 낸다.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중인의 신분이 맡아하던 산학에 이순지가 뛰어들게 된 것은 세종의 인재관에 매료된 것이다. 세종의 부름을 받들어 그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인재중심주의의 결과였다. 이 같은 창조적 인재 육성책에 따라 핵심인재들은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특이점은 이 무렵 핵심인재들은 각종 프로젝트에 참여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조립하고 분해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더욱 배가시켰다는 것이다. 지식이 누적되며, 모방의 단계를 뛰어 넘어 창조의 임계치, 즉 크리티컬 매스에 이르게 된 셈이다.

세종 시대 인재들의 특징인 다방면에 걸친 지식의 어우름과 통섭형 지적 경험은 연구방면에서 복합 시너지를 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각 방면 지식과 연구 활동이 크로스 오버되며 새로운 창조적 영역을 개척해 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활자분야의 진척은 합금술의 발전을 가져오고, 인쇄술이 개발되자 종이제조 능력을 배가시키고, 이는 일본산 닥나무의 도입을 가져오는 식의 상호 유기적 발전구조를 잉태해 내는 것이다. 즉, 혁신을 통해 산업역량이 선순환복합 시너지를 내기에 이른 셈이다.

이는 곧 지식이 경제와 문화적 역량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 뜻한다. 결과적으로 원천적인 ‘종자지식(seed knowledge)’이 전 분야에 걸쳐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대 세종 프로젝트에 참여한 핵심인재들은 가히 르네상스형 인간과 같이 사물에 대한 폭넓은 사유를 만끽하고, 만능형 지식인상을 구현해 냈던 사람들이다. 이는 물론 유교적 경영 이상을 마음껏 드러내기 위한 혼신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통해 각 방면의 ‘종자지식’을 성장엔진화 하는 작업을 실행해야만 한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경영의 지혜를 뽑아 올리는 작업은 어렵지 않다. 관심만 가진다면, 원천 자원은 무궁무진하다. 요는 경영자의 안목이다. 경영자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세종이 취한 조직 구성의 원칙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태종이 취임 초에 자기가 쓰던 신하들은 다 버리고 새로 인재들을 뽑아 쓰라고 하지만, 오히려 태종 시대의 구신들을 고위직에 배치시키고, 자기가 뽑은 신하들은 하위직에 포진시킨다. 신ㆍ구 세대 간 자연스러운 권력 이동과 균형을 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세대간 갈등을 사전에 막고, 지식이 유연하게 상호 교감되도록 하는 배려에서 나왔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의 축’ 과 육조(六曺)를 중심으로 한 ‘실행의 축’은 연구와 실행을 통합해 양자 간 의견이 합치되도록 했으며, 이는 조직 운영상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또 두 축을 통합해 상위직을 정승들이 겸임토록 함으로써 양자가 자연히 합치 되도록 했다. 상생의 조직 문화를 이루도록 한 세종의 혜안에서 나왔다. 이처럼 세종의 국가 경영에는 크게 두개의 축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조직 운영상 균형미의 절정은 과업과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하는 현대식 팀장제를 도입한 점이다. 각 프로젝트들은 프로젝트 매니저와 실무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대적 경영에서 각 기업들이 실시하고 있는 조직운영방식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가히 21세기형 조직운영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의 균형감각은 실질 국가 경영에 적용되며 인재 발굴과 운용, 국가 경영상의 전략에 반영되어 경영의 극치를 이룬다. 따라서 권력 밖으로 밀려 나는 ‘소외’나, 그로 인한 ‘일탈 행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경영자가 중심을 바로 잡고 나가는 것이 세종시대 균형을 통해 창조적 조직 운영을 하게 된 배경이다.

균형감은 고제를 연구ㆍ발전시키는데 있어 원칙과 방법 모두를 찾는데서 잘 드러난다. 원칙과 방법 모두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양쪽 모두를 세우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국가경영상 절대 균형미를 이루는 르네상스적 조화를 꾀하고자 했다. 하늘인 백성을 위하는 균등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려는 의지는 전 국가 경영에 반영되었다. 국왕의 이 같은 노력은 국가조직을 창신하는 데 있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세 번째, 실행의 창조성이다.

세종 시대의 특징은 그 시대를 이끈 세종만큼이나 창조가 생활 속의 규범이자, 생활법칙이었다. 세부적인 느낌, 디테일, 델리케이트한 감각이 요구되는 감성적 시계(視界)를 확보한 것은 그 시대 창조성이 매우 세련되었음을 알게 한다. 즉,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과학기기, 활자, 서적, 백자, 분청사기, 해시계, 대간의대 등 그 시대의 산출물들은 높은 미학적 안목을 지닌 것들이었다. 이는 오늘날 디자인 경쟁력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없다. 실용성과 간결성이 명품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고, 이는 그 시대의 정신과 문화적 역량을 가늠케 한다.

더구나 문화적 자신감은 각 방면에서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듯 눈높이가 향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경제적 풍요와 지적 호기심, 그리고 다양한 실험 정신과 창작 혼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분위기가 없었더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시대에 디자인 품격 높았던 이유는 경제적 여유와 함께 정신적 풍요, 그리고 이를 밑받침해 주는 범국가적 창조적 분위기 때문이다. 이런 품격은 세종 자신과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창조적 실행력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나타나는 프로젝트는 바로 <훈민정음> 창제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이란 지상 최고의 문자를 창제함으로써 실질적인 ‘백성사랑’을 표현하고 ‘소통’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 놀라운 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큰 문화유산이자, 정신적 뿌리이며, 국가경영철학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창조적 결정체이다. <훈민정음>은 세종 이전까지의 가장 ‘치명적인 짐’이었던 ‘불통(不通)의 시대’를 청산하고 시공을 뛰어넘은 ‘소통’의 세상을 여는 데 이바지 한다. 이는 국가경영자가 지닌 철학의 발로이며, 동시에 그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는지 잘 보여준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 글자를 창제해 소통을 이끌어 내고, 민족적 정체성을 확보한 것은 그의 경영실적 중 가장 빛나는 성과로 볼 수 있다. 한글은 그 원리에서 드러나듯 영구히 디지탈 소통의 장치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다. 세종의 창조경영의 정점인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프로젝트 주역 중 한명인 정인지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는데, 그 글자는 고전(古篆)과 비슷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합쳐진 이후에 문자가 된다. 무릇 한자 및 우리나라 말을 모두 가히 쓸 수 있다. 비록 문자가 간단하지만, 그 전환이 무궁무진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한다.”(세종실록』 25년 12월)

이 ‘간단하면서 무궁무진한 글자’는 세종 28년 9월에 가서 만인에게 공표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커뮤니케이션과 지식독점의 시대는 서서히 새로운 표현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문자의 창제는 경자자의 업 그래이드 및 갑인자 활자개발과 수많은 서적의 출간으로 이어지며 지식경영을 선도해 나간다. 또한 <<농사직설>>을 편찬함으로서 농업에서 혁명적인 생산성 증대를 꾀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세금부과 방침을 정하는 등 실로 현대적 경영방식의 전형이 되고 있다. 이는 <<향약채취월령>> 편찬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두 실행상의 창조성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창조경영은?

세종시대에는 지금의 한국사회보다 더 큰 위험과 경제적 위기가 현안 문제로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상상력과 실행력으로 이런 모순을 뛰어 넘는다. 창조는 극한의 상황에 처해 적극적 해결 노력이 있을 때 발현된다. 영혼을 울리는 미래와의 교감이며, 뼈를 깎는 노력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기존 방식에 머무는 게 아니라, 뒤집어엎고, 뛰어넘고, 혼을 기울이는 영혼의 분투(奮鬪)를 통해 얻는 것이다.

세종은 취임과 동시에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세우고,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목표, 국가 경영 전략, 실행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창조적 리더로서 국가경영상의 제 문제를 구석구석을 파악했다. 스스로 훈련된 내적역량으로 인해 자신이 꿈꾸어 왔던 비전을 추진할만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세종이 지닌 시대의 요구에 대한 강렬한 필요 인지, 다양한 경험, 일에 대한 열정, 자기긍정, 긍정적 마음가짐 같은 것들은 그 시대 창조적 활동이 성공 가능케 하는 요인들이었다. 여기에 사람과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를 분석적으로 파악해 개념화해냈다. 전체로서 누락 없는 부분을 이뤄냈고, 부분의 합은 전체를 일구어 냈다. 상상력 넘치는 국가조직을 이뤄냈고, 인간심성에 소구해 사람문제에 대응해 나갔다. 백성에게 다가간 방식도 이와 같았다.

세종이 구축한 창조적 경영시스템은 21세기형 경영자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준다. 변화의 중심에 우뚝 서서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이를 극복해 내려는 실행력을 보인 것은 세종을 창조적 경영자로 더욱 부각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나아가 그가 지닌 백성사랑의 경영이념은 경영자의 강한 의지에 힘입어 놀랍도록 강렬한 생명력을 얻고 있다. 창조적 개인이 창조적 기업을 만들듯, 창조적 국가경영자가 천ㆍ지ㆍ인이 합치되는 참다운 세계를 구현해 낸다.

오늘날 창조경영을 위해서 경영자들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조직 내 가장 큰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세종시대와 다를 바 없다. 문사철(文史哲)에 빠져드는 CEO들의 관심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면에서 세종의 자기혁신의 노력은 21세기 경영자상으로 과분할 정도이다.

세종 시대와 같이 오늘의 한국사회는 대륙과 해양의 거센 도전 앞에 끼인 너트 크랙커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가 어떻게 세계에 반응하고, 활로를 개척해 나가느냐에 따라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얼마든지 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 외래의 사회모델, 기업모델, 기술과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성과를 얻어왔지만, 우리만의 독특한 가치와 핵심경쟁우위를 확보하는 데에는 미흡했다. 다양한 국가ㆍ기업 모델을 경험하면서 여러 벤치마킹의 사례가 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내적 창조력은 간과되어 왔다. 한국 사회의 성장을 이끌 독특한 가치와 전략, 실행 계획을 창조해 내지 못하면, 지금까지 지탱해 온 경쟁력은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 미래를 사는 가장 강력한 기반은 창조적 사고이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 등 전 분야에서 창조성을 성장의 드라이버로 삼아야 우리가 처한 기미(羈?)국면을 깨뜨려 버릴 수 있다. 지금은 새로운 경영에로 도약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세종시대의 창조적 발상과 열정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창제가 예로부터 하기 어렵다...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 졌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라.”(세종 15년 1월 1일)

박연이 편경을 제작 할 당시 세종이 하는 말이다. 뜻을 바로 세우면, 힘을 다해 이룩하는 것은 이 민족이 보여 준 충분한 역량에 해당된다. 왕은 죽었으나, 그의 위대한 경영은 영원히 계속된다.

<참고문헌>
전상운,「세종시대의 천문 기상학」, 「세종시대의 산업기술」, 『세종문화사대계 2』, 1999.『세종문화사대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조남욱,「세종의 통치이념과 그 현대적 의의」, 『세종시대 문화의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원, 1998.
이태진, 전상운, 「15세기 한국의 과학기술과 농업발달」, 『세종대왕』, 신구문화사, 1998.
안덕균 주해, 향약채춰월령,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3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휴먼비지니스, 2006.
신인본경영의 원천, 창조적 경영자, Chief Executive, Vol. 50, January 2007.
창조적경영자의 결단력, Chief Executive, Vol. 52, March 2007.
상상경영, CEO, 2007.
창조경영, Excellence Korea, January 2007.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휴먼비지니스)
신동아 2008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