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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통섭과 초영역인재

생물학의 진화, 인문적 상상력이 세상을 바꾼다

by 전경일 2009. 10. 13.

미국 뉴 올리안즈의 한 카페에 들어가 블루스 음악을 듣는다. 선율에 실린 가사는 '볼 위빌'이란 애벌레에 대해 노래한다. "목화를 키웠지만, 반은 상인이, 반은 볼 위빌이 가져갔지..." 마치 우리에겐 경쾌한 선율로 다가오던 스페인어로된 멕시코민요 <라쿠카 라차>가 실은 바퀴벌레에 대한 이야기이듯, 흑인 노예들의 노역으로 상징되던 목화는 이후 섬유 산업과는 전혀 달리 흑인들의 애환을 실은 블루스라는 문화콘텐츠를 전 세계에 전파시킨다. 물론 이 음악이 전 지구적 컨텐츠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흑인 노예들의 삶을 지난하게 했던 1백년 전의 노고도 이제는 완전히 달리 변신했다. 생화학과 식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이뤄낸 것. 목화밭의 해충을 잡고,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제거하던 일들은 제초제의 등장과 함께 사라진다. 어디 그뿐인가? 한 발 더 나가 요즘엔 미생물을 아예 식물 종자에 삽입해 곤충의 애벌레들을 남김없이 죽여 버린다. 환경주의자들은 극구 반대할 일이지만(실제 우려스러운 면도 있다.), 생화학적 적용이 새로운 환경요인을 만들어 내며 새로운 과학시대를 열어 나가고 있다. 이 같은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은 앞으로 더욱 발전해 가까운 미래에는 보다 획기적인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소식이다. 앞으로는 비행기로 유전자가 변형된 식물 종자를 뿌리기만 하면 종자가 자라면서 놀라운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식물은 자라면서 특유의 발광물질로 지뢰가 묻혀 있는 장소를 표시해 주는데, 이 기술은 해파리의 발광 물질을 식물학에 적용한 것이다. 해파리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식물학 분야만 그런 게 아니다. 동물학에서는 도마뱀의 발바닥 원리를 그대로 활용한 로봇이 개발되며 자동으로 건물을 기어올라 고층 건물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전문 청소부들의 임무를 대체할 예정이다. 기술 진화가 안전사고의 위험을 제거하지만 한편으론 특수직업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곤경에 처해 질 판이다. 이 분야는 생물학과 기구공학의 만남이 가져온 결과이다.

변신의 가장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분야가 유전자 공학인데,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일들이 왕왕 벌어지고 있다. 다른 예로, 강철보다 튼튼한 거미줄이 개발되고 있는데, 앞으로는 강철 실을 생산하기 위해 거미의 유전자를 목화에 이식해 솜 실을 뽑아내듯 강철 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학과 기술이 접목되며 줄기세포 논란이 그러했듯, 이제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의 의지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쓰일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따라서 과학의 발전은 사람의 문제, 즉 윤리도덕의 문제로 발전된다.

이 모든 변화를 가져오는 특징은 지식이 넘나들며 경계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는데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해 보이던 과거의 질서 개념과 달리 이제는 복잡다단한 것이 하나의 질서인 '복잡성의 질서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줄기세포든, 무정 수정이든, 이 같은 과학 발전은 인간의 문제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인간이 어떤 잣대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지 궁극적인 질문을 인류는 지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움을 잉태한 이 모든 지적 활동을 창의성이라고 명명 한다면, 과학적 실험과 부단한 연구과정에 뒤따른 인간적 문제에의 귀결은 인문이 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본시 인문의 문(文)은 문양(紋樣)을 뜻한다. 사람다움의 문양을 그려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다워지기 위해서 동양에서는 시서예악의 가르침(詩書禮樂之敎)을 통해 세상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기에 일, 월, 성신 즉 자연현상의 법칙을 따라 만물이 마땅함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상태'인 자연 원리를 따르는 식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천지의 숨은 이치를 찾아내고 사물의 미묘한 본성을 밝히며 인간 만사의 변화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조화로움의 추구가 목표라는 얘기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왔지만, 우리는 문득, 달리던 길에 멈추어 서서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보고, 무엇인 인간다움에 근거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최근 경영관련 단체에서 인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효율성의 경영학으로는 현재의 국면을 타개하지 못한다는데 기인하지만, 그보다는 본질적인 문제로, 끊임없이 달려 왔으나 우리가 어디로, 왜 달리는지 알지 못하고 질주만 해 왔기에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의 등장하고, 인류사적 변화가 용틀림하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지금 어떤 인간적 사유를 하는가? 공자는『논어』위령공에서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의 길을 넓혀 가는 것이지, 길이 인간을 넓히지는 않는다(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말한다. 우주 속에서 인간의 지위를 스스로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일 게다. 바쁠 세상일수록 고전의 가르침은 그러기에 더 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인(人)과 문(文)이 따로 놀지 않고 뭉쳐진 이유이다.
ⓒ전경일, <행복한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