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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통섭과 초영역인재

창조경영 시대의 도래(1)

by 전경일 2009. 10. 21.

기업 경영에서 과거와 현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 차이를 알려면 먼저 ‘현재’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현재는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으면서도 그것과 선을 긋지 않으면 새로운 도약을 위한 미래를 열어젖힐 수 없다. 그 점에서 기업의 혁신은 놀랍게도 혁신적 결별을 먹고 자란다. 오늘날 한국 기업의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과거의 모방방식이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같은 모방은 우리를 뒤주에 가두어 왔다.(이점에서 창조적 경영자라면 ‘사도세자의 죽음’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할지 모른다.) 뒤에 놓여 있을 때에는 선발자에 대한 발 빠른 후행학습을 통해 그 뒤를 뒤쫒을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 하지만 1등이 되는 순간, 지표는 달라진다. 더 원대한 앞을 응시해야 한다. 변화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이는 마치 태풍에 맞선 배가 측면을 부딪치게 되면 끝장인 것과 같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방향타를 움직여 뱃머리를 거대한 파도를 향해 정면으로 몰아 세워야 한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의 변화는 기존의 지식질서나 인재상을 유용하게 활용케 하기도 하고, 순식간에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지금 우리 기업은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조건은 달라졌는가?

어느 시대나 가치가 일반적이고, 모방 가능할 때에는 ‘따라함’의 힘을 빌려 성장을 촉진시키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특별한 가치가 요구되는 시대에는 소위 ‘벤치마킹’이라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가치를 창출해 내지도 못한다. 전체 판을 놓고 다시 생각해 보고, 시작하려는 시도에 오히려 족쇄가 된다. 경영 구루의 한 사람인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는 “벤치마킹을 하면 할수록 기업들은 서로 비슷해진다. 전략이란 차별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장을 창조적으로 변전(變轉)시키고자 하는 사고의 지점을 관통해야 성장정체라는 크레바스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

많은 기업들이 성공적인 이탈을 꾀하지 못하고 과거의 사업, 수익원, 비지니스 모델에 매몰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하는 것은 기존 모델에서 탈출, 탈피하는 이탈 방지의 관성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조직과 내부 구성원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업 자체가 그렇다. 왜 창조기업이고, 창의적 인재이어야 하는가?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한 예로 모방형 기업 운용은, 예컨대 유럽에서의 중세처럼 어두운 면에 경영이 가려져 있다. 이는 근세라는 희미한 불빛을 발견하기 전까지 창조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인간 잠재 가치에 신을 끌어다 짓누르려는 도그마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중세는 봇물 터지듯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와해됐다. 중세를 무너뜨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창조 본능이었다. 이 무렵 사회 전반의 역동성을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중세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사태에 직면했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해내야 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정치인도 경제인도 모두 창작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세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모두 창작자였다... 이 시기에는 창조한다는 행위가 이해의 '바른 길'(strada maestra)이었다.”

이 무렵 세상의 구성 원리와 세상을 운영해 나가려는 ‘이해의 바른 길‘을 구한 르네상스인, 즉, 세계인의 창조적 발상과 활동이 없었더라면, 중세는 견고함의 성곽을 에두른 채 훨씬 오랫동안 지속됐을 것이다. 창조의지는 장벽을 넘어서서 새로운 시대를 뱉어냈다. 선후의 문제나 상호 레버리지의 문제를 떠나 새로운 시대는 모두가 창조적 사고를 할 때 이루어졌다는 점을 유럽의 한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조선에서는 이른바 1차 르네상스기로 명명되는 세종대왕 재위시기가 창조적 근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기였다. 과거 친중국적 모방형 사고에서 모방 이상의 혁신을 꾀해 낸 것은 그 시대 새로운 도약의 담론이 현실화 된 것을 뜻한다. 세종이 출생한 시기는 1397년이었다. 이 시기는 1368년 중국에서 명이 건국하고 나서 28년이란 시간이 지난 때였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원ㆍ명 왕조 교체는 세계제국 원을 통해 조성된 국제화 무드의 시기에서 한족 중심의 명으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였다. 원 제국하의 세계 질서는 강력한 문명의 교류가 일어나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현장이었다.

이 무렵 원 제국하 이슬람 문명을 원천으로 하는 과학기술은 명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를 맞이한다. 대제국 몽골이 숨을 멈춘 다음, 동서양의 문명의 교류가 남긴 과학문물이라는 이 독특하고 특별한 가치는 주인을 잃은 채 새로운 가치를 주목하는 창조적 집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신속하게 내부의 안정을 꾀한 조선은 관심을 밖으로 돌렸다. 세종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감지하며 거대한 과학기술의 기회 앞에 우뚝 선다. 개방성과 기회, 통찰의 삼박자가 어우러지며,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급기야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른다.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기에 세종은 선진 문물의 벤치마킹을 통해 신생 조선에 기회를 부여하고, 외부에서 빌려온 것도 조선의 항아리에 집어넣어 새롭게 주조(鑄造)해 낸다. 과학 관련 창조적 자산의 원류는 이슬람의 유산이었으나, 세종은 단순한 모방의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 맞게 독창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러기에 오랜 인류 역사상 이슬람과 서구의 근대 과학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창조 시대의 근간이 되는 것이며, ‘조선식 전통 과학의 새 모델‘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유에서 더 큰 유를 창조한 ‘본유(本有)의 시대’를 열어젖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시대 주요 발명품으로 낮과 밤에 시각을 측정하는 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이슬람 기술을 벤치마킹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이에 머물지 않고 장영실을 지명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시계를 만들어 낼 것을 주문한다. 그 대표적인 발명품이 <옥루(玉漏)>다. 이는 중국 송ㆍ원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이슬람의 모든 물시계에 대한 문헌을 샅샅이 연구한 끝에 창조적 혁신을 통해 우리 것으로 재탄생해 낸 결과물이었다. 청동활자의 경우에도 중국에서는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감히 손대지도 못하고 있던 분야를 태종시대의 성과인 계미자(癸未字)를 발전시켜 세종 때 경자(更子)·갑인(甲寅字)를 만들어 낸 것은 강력한 R&D를 통해 어플리케이션(응용)만이 아닌, 원천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순지, 김담, 정초, 정인지 등의 공동연구 결과물인 <칠정산(七政算)> 내ㆍ외편 처럼 중국과 이슬람의 기술을 원용해 조선만의 독창적인 달력을 혁신해 낸 것도 원천 영역에 접근한 사례로 손꼽힌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활용해 오던 중국(내편)과 세계적 수준의 역법인 아랍(외편)을 완전히 소화해 통섭시켜 낸 것이다. 우리 고유의 역법을 만들고자 한 세종은 강한 창조적 희구를 드러내 “정력을 다해 책을 완성하여 후세로 하여금 오늘날 조선이 전에 없었던 일을 건립하였음을 알게 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칠정산(七政算)> 이 완성됐을 때 그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가고도 남는다. 또한 8년 연구의 산물인《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당대 최고의 석학 14인이 참여해 3년 연구한 끝에 장장 265권의 방대한 의학지식을 모은《의방유취(醫方類聚)》편찬 사업 등도 지식 혁신의 가장 모법이 될만한 사례들이다.
ⓒ전경일, <초영역 인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