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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세종의 리더십

by 전경일 2009. 2. 3.

스물 두 살의 새파란 나이, 아직 어리기만 한 젊은이가 국왕으로 등극해 한 나라의 명운을 진두지휘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총명한 임금은 능수능란한 역량을 발휘해 가며 한 나라를 반석 위로 올려놓은 것은 물론, 민족과 후세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았다. 개인적 운명은 물론 나라의 명운을 건, 피를 말리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세종! 조선의 제4대 국왕이자, 우리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자애로운 성왕, 그는 어떻게 위대한 나라 만들기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었을까? 태종 이방원의 삼자로 태어난 세종은 왕재(王才)이기는 해도 왕이 될 수는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런 그가 형인 양녕을 제치고 국왕이 된데에는 부단한 노력과 천부적 자질이 결정적으로 반영된다. 세종은 16세부터 이수(李隨)에게 배우기 시작해, 남다른 호학열로 지식을 축적해 나간다. 『자치통감강목』을 백 번이나 읽었고, 역사를 통하여 선정(善政)한 제왕들의 국가경영을 몸소 실천 하고자 했다. 이 점이 그를 부각시킨 요인이 됐다. 그리하여 태종은 충령을 차기 국왕로 지명하며 다음과 같이 자평하고 있는 것이다.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정치에 대한... 소견이 의외로 뛰어나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공부하는 인재상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탓인지, 임금이 된 22세부터 54세(1450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 32년 동안 국사를 맡아하며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종시대 모든 업적은 학습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 이르기를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을 거두고 한가히 앉아있을 때가 없었다.’ 또 근신에 말하기를 ‘내가 서적들을 본 후에는 잊어버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 총명함과 호학함은 천성으로 그러했던 것이다.”(세종실록』 5년 12월 경오) 공부하는 국왕의 이미지는 선죽교를 낭자하게 한 피의 혁명 이후 인재 고갈에 목말라 하는 조선으로 하여금 인재중심의 인사정책을 펴도록 했다. 그 무렵, 요즘으로 얘기하자면 인사전문가인 변계량과의 만남은 역사 속에 묻혀있던 ‘집현전’의 컨셉의 발굴해 내며 새로운 인재들의 시대를 예고하게 한다. 젊은 피를 수혈해 새로운 조선 만들기에 이 젊은 왕은 혼신의 정열을 기울이며 뛰어 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세종이 조선을 지식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학습이 중요하고, 공부에는 보다 깊은 전문성(expertise)이 필요하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임금과 신하들이 벌이는 조찬 세미나인 경연을 평생 시행하였고, 경영관들에게 한 가지 경(經)이나 사(史)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정통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나아가 요즘의 안식년 휴가처럼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제도(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해 학자로서 신하들이 자기계발을 다하도록 한다.

공부는 철저하게 관리되고, 장기적인 국가경영의 포석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발된 학사들은 학습 진도에 대해 일일이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전문지식을 높이기 위해 경학ㆍ사학 외에도 과학ㆍ음악ㆍ의학ㆍ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문자학ㆍ음운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깊이 연구해야 했다. 훗날「훈민정음」, 정대업ㆍ보태평, 각종 과학 및 IT기술, 의학서적의 발간 등 세종시대 생산과 문화의 대 전기를 여는데 이 같은 연구과제들은 크게 기여하게 된다.

세종이 신하들과 더불어 지속학습을 통한 지속경영의 조건을 만들고자 한 데에는 국가 경쟁력의 기반이 지식에 있음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나라 만들기에 이 같은 피나는 노력을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았고, 말 그대로 멸사봉공했다. 신하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인내하고, 기다리며, 후원하고, 쟁간(爭諫)케 하는 토론을 권장하며, 결단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국왕의 리더십은 칼날처럼 서릿발 같고 한편으로는 솜털처럼 부드러워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잘 엿볼 수 있는 게 최만리를 비롯한 ‘한글반대파’ 들의 준동이었다. 이는 세종 리더십의 시험대이기도 했다. 「훈민정음」은 개발이 완료되었어도, 세종25년 겨울까지 반대 여론 때문에 이를 시행에 옮길 수 없었다. 문자를 주요한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던 당시 기득권층은 한글창제에 과도할 정도로 반발했다.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직제학 신석조ㆍ직전 김문ㆍ응교 정창손ㆍ부교리 하위지ㆍ부수찬 송처검ㆍ저작랑 조근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한글을 “신기한 재주에 지나지 아니하는 글자“로 폄하하며, ”중화 제도를 따르지 않고 언문을 지은 것은 보고 듣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라고까지 겁박해들어 왔다. 이에 대한 세종의 대응은 음운학자 다운 토론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그들 ”무리가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꿔서 대답하자“ 끝내 그들에게 의금부에 하옥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세종의 대응은 여기서 끝났을까? 아니다. 세종은 반대파들조차 끌어안는 모습을 취해 다음날 다 풀어 주며, 동참을 유도해 내는 것이다.

세종의 인간미 물씬 넘치는 소프트 리더십은 『연려실기술』에도 잘 나타난다. 세종은 홀로 친히 첨성대에 임해 옷도 풀지 않고 일하는 신하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갖옷 한 벌씩을 2년마다 새로 만들어 주게 하고, 내의원을 통해 날마다 술 5병씩을 주게 하기도 한다. 노고에 대한 칭찬과 위로였다. 이처럼 세종 리더십의 핵심은 정감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집현전에서 밤새도록 연구하다가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자신의 겉옷을 덮어줬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신하들은 마음속에는 국왕에 대한 흠모의 정이 뒤따랐다. 상명복종만이 아닌, 심금을 울리는 경영을 했던 것이다.

스 물 두 살에 왕위에 올라 온갖 어려움을 겪고 국왕으로써,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완성된 경지를 보여준 세종의 진면목은 리더로서 부단한 공부를 통해 수신(修身)하고자 하는 경영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같은 자기 수련을 통해 세종은 백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600여년 전의 국왕으로 살다 간 그의 삶이 오늘날에도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세종은 리더로서의 따뜻한 마음과 맑은 영혼을 간직한 위대한 성왕이자, 스스로 완전한 인간을 이룬 인물이다. 그의 궤적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리더들은 어디에 서야 할지 묻게 한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휴먼비지니스). 대교사랑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