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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김연아에게서 배우는 초우량 기업의 조건

by 전경일 2010. 2. 26.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준비했던 것을 모두 보여줄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김연아 )

"긴 대결이었다. 분하다. 트리플 악셀은 좋았는데..."(아사다 마오)

끝났다. 긴 도전과 승부의 한 장정이 마무리된 순간이었다. 피겨 여왕 김연아에게는 7살부터 목표로 해왔던 올림픽에서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고, 아사다에게는 분통 터지는 날이었을 것이다. 손에 땀을 쥐었던 경기가 끝나고 관중석과 전 세계 TVㆍ인터넷을 통해 지켜본 시청자 모두에게 감동을 준 세기의 대결은 한일 간의 뒤엉킨 복잡한 감정을 뒤로 하고 오늘 피겨 역사의 새 장을 넘겼다.

2010년 2월 26일부로 피겨여제는 새로운 항로를 열어 나간 셈일 터다. 대한민국 100년 피겨 역사는 물론, 빙판위의 예술가로서 김연아의 삶이 새 전기를 열어나간 것이다.

"올림픽이라는 꿈을 향해 달려왔고 여기까지 왔다."

인터뷰에서 밝힌 김연아의 꿈이다. 비단 연아 만이 아닌, 아사다도, 높은 수준의 예술 앞에 무릎을 꿇고 일찍 짐을 싸야 했던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사람의 극적인 대결과 라이벌 의식, 그리고 전략을 지켜보며 불현듯 초우량 기업의 조건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김연아의 승리를 가져오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솔직히 그 어느 때보다 부담은 없었다. 올림픽이라 마음 비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잘 따랐다. 준비가 잘돼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다."

김연아는 경기가 끝난 후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철저한 준비와 완전한 몰입의 경지를 이뤄 냈다는 의미였다. 나아가 아사다가 끊임없이 경쟁자를 의식하는 추격형 전략을 추구할 때 김연아는 아주 강력하고 살이 베일 듯한 집중력으로 초우량 기업처럼 자신을 향한 싸움을 해왔다는 말이 된다. 추격자는 남을 의식해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눈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덜 미더운 자신에 불안해해야 하고 성공보다는 실수에 집착하게 된다. 역대 최고 점수를 올린 김연아에 바로 이어 링크에 나선 아사다는 "경기 내내 잘해야 한다,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결과 계획했던 점프를 하지 못하는 등 준비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몰입이 아닌, 의식으로 나타났고, 승부는 보다 완벽히 거기서 갈렸다.

                [사진 ⓒ 연합뉴스.극도의 몰입은 초우량기업이 취하는 방식이다.]

김연아의 빙판예술이 초우량 기업과 같은 부분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그것은 '딸'(직원)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내와 사랑으로 키워낸 '어머니'(CEO)의 끈덕진 지원과 눈물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기대는 피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끝없이 자신의 기록을 바꿔 치워버리는 혁신 의지로 나타났다. 수많은 부상과 시련은 상처 주위의 근육이 굳은살이 되는 인고과정과 함께 했다. 하루 10시간씩 강행군을 한 것은 피나는 노력만이 성취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점을 기술 경쟁에 직면한 기업들에게 통렬히 드러내 준다. 이것 말고 초우량 기업이 되기 위한 경쟁의 엣지가 따로 있는가?

여기에 피겨 여제를 만들어 낸 힘은 또 있었다.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백락(伯樂)과 같은 이들이었다. 백락은 같은 말을 보고도 천리마의 숨은 능력이 있는 말을 귀신같이 골라냈다. 누구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숨은 재능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어린 김연아를 본 코치들은 "유난히 팔다리가 길고 재능이 있어 한 번 가르치면 바로 소화한다"며 타고난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비유컨대, 경영구루다운 코칭과 CEO의 정신력까지 포함함 멘토링을 아끼지 않았다. 둘은 정신적이나 정서적으로도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 나가는 '호흡'이란 게 뭔지 잘 보여줬다. 인재를 알아보는 백락과 같이 7살 소녀의 꿈이 현실이 되도록 함께 위대성을 발현하고 창조해 나간 것이다.

여기에 부응하듯 김연아는 욱일승천하듯 세계적인 선수권 대회에서 기량을 쌓아나갔고, 경험의 폭을 넓햐 나갔다. 그 경험은 처음엔 낮설었지만, 강한 매혹적 야생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글로벌 무대에서 그가 얻은 자신감과 크고 대담한 목표는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고, 이제 김연아는 꿈을 현재화하는 작업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올림픽이었다.

김연아에게 2005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의 우승은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본격적인 가동이자, 세계적인 기업의 탄생을 알리는 과정과 다를 바 없었다. 비유하자면, 야후와 구글의 초기 경쟁시, 야후의 직원들은 몇 배로 올라간 주가로 야후를 확인했지만, 구글의 직원들은 조직의 활력과 매일 매일 치고 올라오는 세계적 방문자수와 언젠가는 우주선까지 쏘아 올리겠다는 구글 플랙스(낙서판)에 적힌 크고 야심찬 메모들로 보여줬다. 그 차이가 오늘날 두 기업을 가른 건 채 10년도 되지 않는다.

김연아에겐 올림픽 무대에 서기 위한 호된 시련도 있었다. 4년 전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에는 불과 2개월 차이로 나이 제한에 걸려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했다. 한시적 불운이었다. 그 4년간 그는 4년 후를 위해 본격적으로 시니어 무대에 뛰어들어 많은 경험을 쌓았다. 목표가 좌절됐지만 전략적 방향수정을 통해 경쟁의 엣지를 더욱 날카롭게 가져왔던 셈이다. 목표의 유연성이 최고의 기업을 만든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김연아와 아사다의 다른 차이점은 무엇일까? 바로 '선수'(기업)가 무엇에 집중하느냐이다. 아사다는 트리플 악셀이라는 고난이도 기술에만 매진했다. 오늘날 짓이겨 질때로 짓이겨진 토요타를 연상시킨다. 글로벌 경쟁에서 기술은 대단히 중요하고, 주요 평가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세계 1위는 남다른 차별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김연아에게서 나타났다. 김연아는 점프의 교과서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인상 깊은 점프 기술을 하나 둘씩 갖춰나가며 스스로 경쟁력을 키웠다. 그것이 빙판위의 예술에 다가가는 방법이자, 진정한 차별화의 원천이었다. 2002년 한국 월드컵이 신화창조를 할 수 있었던 배경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이것이다. 히딩크는 체력 같은 기본을 강조했다.

늘 초우량 기업들은 '기본'에 충실한다. 그 기본은 시장에서 정의 내려져 온 기본을 갱신하고, 폐기 시켜버릴 만한 기본이다. 기존의 주춧돌을 파내고 다시 세우는 혁신이 아니라면 '기본'이 될 수 없다. 그 '기본'이 김연아에게는 이번 올림픽에서 17.4점이라는 가산점을 움켜쥐게 만드는 힘이 된다. 김연아로 하여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여자 싱글 부문) 역사상 전무후무한 228.56점을 획득케 한 것은 기존 시장에서 기본력을 확보하며, 이를 확장해 시장우위를 점하는 글로벌 기업의 전략과 그래서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경기 후 김연아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연기를 하고나서 눈물을 흘리는 선수를 보며 어떤 느낌일까 했는데 경기 끝나고 처음 눈물을 흘렸다. 너무 기뻤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알 것 같다는 뜻이다. 김연아처럼 자신을 뛰어넘은 기업만이 아는 게 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엔돌핀이 조직 내부에 돌며, 성취는 일상적인 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는 승리가 뭔지를 알 것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긴 대결이었다"는 아사다의 말에 섞인 울음은 이 소녀가 얼마나 (시장의) 강자에게 영혼마저 끌려 다니며 힘들어 했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칭기스칸이 유럽으로 말채찍을 몰았을 때, 성문을 연 유럽의 국가들은 하나같이 기에 질려 있었었다. 누구도 이런 과감한 생각을 실행에 옮길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트리플 악셀이라는 자신의 첫 연기이자 주특기에 신경을 쓴 아사다는 실수 후 바로 가졌던 자신감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고백한다.

"(나는) 그 다음 순간부터 긴장하기 시작했다."

초우량 기업이든, 경쟁에서 도태되고 마는 기업이든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둘 다 다 시장에서 할 것은 다 해봤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했기 때문에...(괜찮다)"(아다사)

"내가 준비했던 것을 모두 보여줄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김연아)

경기가 끝나고 바로 있은 (전혀 사전준비 안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의미심장하다. 인터뷰를 보며, 아사다에게 무엇을 "전부했느냐?"고 묻어 보는 것도 의미로운 일테지만, 그보다 이런 질문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녀가)할 수 있는 것들"은 정작 무엇이었나?"

김연아에게는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물론, 무엇을 "준비"했느냐는 질문도 의미 있겠지만, 그보다는 여기서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다고.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모두 보여줄 수 있어서"[다시 말해, 고객만족이 되어서] "너무 기쁜" 거냐고.

둘의 이 미묘한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분명한 얘기일테지만, '차이' 때문에라도 메달의 색깔이 바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금과 은은 너무나 많은 점수 차가 났다. 불현듯, 리콜 사태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토요타가 연상되는 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경영이란, 겸손함의 미학이지 분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직 19살 소녀들의 경기라서 이래저래 대견하고 즐겁고, 무엇보다 피겨스케이팅이 좋아졌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http://humanit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