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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CEO산에서 경영을 배우다

세상에, 산이 달라졌네

by 전경일 2010. 4. 3.

올랐던 산이 낯설어질 때는 산 아래에서 어떤 변화를 겪은 것이다.

몇 해 지나 올랐던 산을 다시 올랐을 때, 뭔가 낯선 느낌에 젖을 경우가 있다. 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세월에 따라 산도 달라졌겠지만 사실 산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것이다. 산은 늘 그랬듯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지만 산꾼은 산 아래에서 무수히 많은 변화를 겪고 다시 산을 오른다. 인생사에는 숱한 변화가 찾아들고 산꾼의 삶과 사업은 그 회오리에 휘둘리게 마련이다. 어느 것 하나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산만이 홀로 제자리를 의연히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산이 달라졌는가, 아니면 내가 달라졌는가? 산꾼 경영자는 산행을 하면서 산 아래에서 던졌던 화두를 다시 끌어안고 간다. 답을 찾지 못한들 어떠랴. 그들은 이미 산행만으로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 빠져든다. 변화에 휘둘려 그 낯선 칼날에 베어져도 그들은 오늘도 걷는다. 걸으면서 세상사를 조망하고 대자연에 지친 심신을 풀어놓는다.

하지만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계절의 변화처럼 무궁무진한 자연 변천사의 현장에서 그 조화를 읽어내고 원칙을 가려내 이를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야만 중심을 반듯이 세울 수 있다. 결국 경영의 길은 뚜렷한 주관적 선행의지를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햇봄이 찾아든 지리산에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린 떡갈나무 숲을 지나며 구인성 사장 일행은 잠시 멈춰 섰다. 목덜미로 상쾌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잠시 간단한 행동식(行動食)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다시 7부 능선을 향해 치달을 요량이었다. 서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도착해 노고단까지 버스로 이동한 다음 새벽행군을 시작한 지 4시간 남짓 지났다.

7, 8년을 의기투합해 산꾼으로 동행한 그들은 별별 사연을 다 겪으면서도 경영현장에 서 있는 경영자의 커뮤니티라는 인연의 끈을 끈덕지게 이어왔다. 물론 경쟁도 하지만 신산한 나이에 접어들며 정보도 교환하고 경조사도 챙길 때가 됐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사람들이다. 저가 중국산의 도전, 한미 FTA의 향방, 환율, 구인난, 갈수록 쪼그라드는 이익 등 사방팔방이 도전거리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밥그릇이 날아갈 판인 터라 사업의 깔딱고개를 오를 때 서로 의지가 됐고 자연스럽게 협력이 강화됐다.

무엇보다 그들을 긴장시키는 것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글로벌 무한경쟁과 무관한 것은 아닌지, 언제 어디서 추격해올지 모르는 경쟁자에게 추월당하는 것은 아닌지, 나만의 눈으로 사업을 바라보며 비즈니스 지형도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상시적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반성의 자세였고 본질이 아닌 겉모습에 취해 발을 헛디디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산행은 남달랐다.

“봄꽃이 지천인 산야를 누비며 내가 스스로 경계하는 것은 이 풍경에 혹시 현혹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산의 꽃무리에 취하면 탄성을 지르면 그만이지만, 만약 내가 사업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경영의 어느 지점에선가 실족사하고 말 겁니다. 화려한 봄꽃들을 볼 때마다 사업을 하며 온갖 화려한 것에만 눈을 빼앗겨온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돈, 명예, 사회적 위신, 체면에 신경 쓰느라 사업의 본질에 제대로 다가가지 못할까 염려되는 겁니다. 봄 한철만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한살이 경영을 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럴 때는 밤잠이 안 옵니다. 하지만 산에서 비박을 할 때면 그런 두려움은 훌훌 날아가죠. 자연은 내게 엄청난 잠언이자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원로회원 임우성 회장이 이제 막 봉오리가 벌어지는 나무를 가리키며 구 사장의 말을 받았다.



“내 생각에 사업이란 저런 거요. 저 나무들을 보세요. 왜 위에서부터 봉오리가 벌어질까요?”

나는 임 사장이 가리키는 나무 끝을 올려다보았다. 수없이 산을 올랐지만 나뭇잎을 키워내는 봉오리가 위에서부터 펼쳐진다는 것은 처음 깨달은 사실이었다. 임 사장이 말을 이었다.

“그건 성장 때문입니다. 위로 영양분을 끌어올려 성장을 도모하고 햇빛을 가장 많이 받는 위의 잎으로부터 광합성을 받아 줄기와 뿌리로 영양을 내려 보내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기존의 뿌리와 줄기는 이들이 제 역할을 잘하도록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안정과 성장의 선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산행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에 경영의 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 테면 경영 애니미즘이라고나 할까요? 가르침은 어디서나 얻을 수 있어요. 산 아래에서든 산 위에서든 아니면 길 위에서든 사무실에서든... 내가 우리 회사의 성장에 목말라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자라지 않으면 지진아가 되거나 고사(枯死)하고 마니까요.”

나를 비롯해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젊은 회원들은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 듯했다. 그들은 고참 회원들이 머리가 희끗한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사업을 하는 이유가 산을 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세상과 사업을 조망하는 통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업은 하늘을 찌르는 나무를 키워내는 일입니다. 그런 나무조차 겨울이 되면 나뭇잎부터 먼저 떨어뜨리지요. 바로 이때가 속으로 알차게 성장을 도모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겨울에 자란 부위의 나이테는 짧고 나무는 단단해집니다. 내실 다지기지요. 우리도 사업을 이렇게 할 수 없을까요? 산은 참 많은 걸 가르쳐줍니다.”

나는 산꾼 경영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가 그렇듯 산도 화산폭발이나 지각변동을 통해 지금의 봉우리를 키워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임 회장이 다시 배낭을 둘러매자 누구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오히려 그들 속엔 의지가 솟구치는 듯했다. 오늘밤에는 그들이 비박하는 언저리에서 하늘까지 쭉쭉 자라는 나무를 떠올리며 잠을 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경일, <CEO 산에서 경영을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