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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대륙경영을 향한 드높은 상무정신

by 전경일 2010. 7. 4.

중국 한인(漢人)들의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인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고 적혀있다.

또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보통 걸음걸이가 마치 달리는 것 같다.“는 기록이 나온다. ‘걸으면 뛰고 뛰면 싸우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매사에 얼마나 신속한 자세를 보여주었는지 알게 한다. 절을 할 때에도 발 하나를 빼고 한다고 했는데, 이는 유사시 다음 동작을 민첩하게 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구려인은 매사에 빈틈없었다. 고구려인과 달리 중국에 협조적이었던 부여인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가 함이 있고 너그럽다고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인들을 얼마나 눈엣 가시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고구려 사람들은 상무정신이 드높아 무예를 숭상했다. 평소에도 씨름과 수박 같은 무예를 익혔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구려 벽화들은 이 같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숭무정신은 강한 힘과 격파력 외에도 상대방의 약점을 빨리 알아차리고 즉각 공격에 나설 수 있는 순발력과 민첩한 기동력을 지녔다. 적의 공격을 격퇴하는 전투력은 평소의 무예 숭상과 강한 의지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이렇게 상무정신이 높았을까? 그 이유는 고구려가 처한 지역이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극복하고 생존과 번영을 꾀하려는 고구려인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오히려 고구려를 뻗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기록된 고구려는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3월 3일에는 군민(君民)이 함께 사냥을 했으며, 정월 보름에는 패수의 물놀이를 통해 상호간의 공유의 자리를 마련했다.「온달전」은 사냥대회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봄 3월 3일을 기해 낙랑 언덕에서 사냥을 하여 잡은 멧돼지와 사슴을 갖고 하늘과 산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때 왕이 직접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과 사냥을 나갔다. 이 때 온달은 기르던 말을 타고 왕을 따라갔다.

공동체 의식이 강했던 고구려인들은 공동목욕을 하거나, 공동사냥을 하는 등 조직적으로 행동했다. 고구려군이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어가 공격한 사실은 이처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열린 사냥대회를 통해 쌓아올린 기병전술의 결과였다.

고구려인들은 누구나 목축과 사냥을 하였기 때문에 말타기와 활쏘기가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다. 방목하는 가축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과 들의 짐승을 사냥했다. 이 같은 풍토는 상무적 기풍을 진작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런 평상시의 기마 훈련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철기병은 탄생하는 것이다. 또한 주변의 국가들을 정복하고 나아가 중국이나 백제,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상무적 기풍은 필요했다. 상무정신의 일환으로 각 지방에 설치된 경당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무술을 연마시키는 것이 상시적인 일이었다.

주로 즐긴 놀이로는 장기·바둑·투호·축구 등이 있는데, 장기·바둑·투호는 중국에서도 행해졌고, 축구는 격구처럼 원래 유목민이 즐기는 놀이였다. 국가 차원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에서뿐 아니라 민간오락에서도 무술이 기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예를 숭상하는 상무정신은 고구려인들의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국민들은 함께 산성을 쌓았으며, 무덤 속 그림을 통해 화려한 내세관을 구가했다. 고구려인들은 이와 같이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함께 즐기고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다. 고구려인들은 항상 강고한 공동체의식을 염두에 두고 계속적인 체력단련과 훈련에 임했으며, 이를 통해 700 년 동안이나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상무적 정신은 고구려인의 피에 새겨진 유전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시조 주몽을 모시는 사당에 창이나 갑옷과 같은 무구를 봉안했다. 언제나 그들 의식에는 상무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예로 7세기 초 당군(唐軍)이 요동성을 공격해와 성이 함락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외군(外軍)을 물리치기 위해 주몽사(朱蒙祠)에 기원한 사실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요동성에는 주몽사가 있는데, 사(祠)에는 쇄갑(鏁甲)과 섬유(銛矛)가 모셔져 있다. 이것들은 전연(前燕) 때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성(城)이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무(巫)가 말하기를 미녀를 치장하여 주몽에게 부신(婦神)으로 바치면, 주몽이 기뻐하여 성이 무사하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주몽사당에 갑옷과 창을 모셔 놓고, 이를 하늘로부터 내려진 것이라고 한 것은 시조에 대한 두터운 믿음과 생활 속에 뿌리박은 상무적 기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고구려의 상무적 정신은 불교, 도교의 영향으로 점차 퇴색하여 운명론적인 내세관을 바뀌게 되고, 특히 평양 천도 후에는 안일에 빠져 스스로 상무적 기풍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천하제국을 지향했던 고구려는 후세로 가며 지속혁신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의 부재로 끝내 대제국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