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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문익점: 더 씨드(The Seed)

토요타에서 문익점을 생각하다

by 전경일 2010. 7. 20.

영원히 지지 않는 도전이 있다. 처음에는 작은 도전이었으나, 추구하는 바의 원대함으로 훗날 큰 족적을 이루는 것이 있다.

처음의 흥분감과 신선함은 차차 대중에 보급되어 일반화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혁신이든 초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이 점을 알게 되면 혁신자들의 숨은 공로에 깊은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어떤 기술혁신이나 산업혁신도 밟아온 길은 이와 같다.

우리나라 주요 수출 효자품은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이다. 기술 개발과 도입 초기에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한 나라를 먹여 살리는 핵심 산업이 되었다. 물론 그 수혜자는 대다수 고객들, 국민들이다. 나아가 글로벌 시대, 해외시장의 고객들도 주요 수혜자가 된다.

중요한 점은 어떤 기술이나 산업도 도입․성장기를 거친 후 적절한 시점에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백여 년 전,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가 그렇다. 도입과 더불어 최초의 혁신이 이루어진 다음, 지속혁신을 이뤄내지 못했을 때의 처참한 결과를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문익점과 그가 가져온 씨앗(Seed)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화 도입을 기점으로 이후 6백여 년의 시간을 꿰면,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해야 생존하고 번영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의 결과는 또 다른 혁신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역사는 경영의 산 교육장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역사와 경영이 맞물리는 접점이다. 이것은 또 미래 경영을 위한 열쇠가 된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는 하나의 단순한 농작물의 씨앗이 아닌, 모든 산업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혁신과 창조의 원천 씨앗(Innovative and Creative the Original Seed)’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한 알의 씨앗에서부터 기업의 과제이자 국가담론인 생존과 번영을 위한 혁신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생존조건은 여기서부터 마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익점의 목화씨에는 수많은 피땀이 어려 있고, 혁신의 몸부림이 배어 있다. 또한 사명감과 애정이 녹아 있다. 원나라 사행(使行) 길에 눈여겨보고, 비밀리에 들여온 목화씨는 문익점과 그의 장인인 정천익 일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결과를 빚어낸다. 하나의 작은 의지가 의료(衣料)혁명을 일으킨 폭발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목화씨는 원나라 해외유출 금지품목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사료(史料)에 따라 다른 주장도 있긴 하다. 지금의 말로 하면 원천 기술, 시료, 소스(source)와 같은 것이다. 문익점은 바로 이 원천 씨앗을 가져옴으로써 우리의 의료생활은 물론 일본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가 가져온 목화씨는 단 10알! 그 중 한 알만이 구사일생으로 꽃을 피운다. 그 한 대의 목화 줄기에서 첫해 100알의 씨가 맺히고, 3년에 걸친 집중 재배와 종자 채집의 결과 10년 내 한반도 전역에 보급되기에 이른다. 배양과 재배에 성공하여 보급․확대가 임계치에 도달한 것이다.

그로부터 대략 25년 후인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서며 목면은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가고, 4군 6진의 개척 시 북점화(北點化) 정책에 힘입어 북방 지역의 경제활동과 국토 확장에 크게 이바지한다. 의(衣)생활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신성장 엔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고된 작업이었다.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기후 여건상 서리가 내리지 않는 무상일(無霜日)이 짧고 장마가 길어 재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민․관 협동으로 이루어진 보급 확대로 이전에는 감히 상상치도 못한 혁신을 이뤄냈다. 씨앗의 보급만이 의미 있지 않다. 목화송이에서 씨를 빼내고 이를 다시 자아내는 직기인 씨아, 활,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가 고안․제작됨으로써 섬유혁명은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이때의 의료혁명을 훗날의 산업혁명에 견주어보아도 결코 손색없다. 오히려 더 원천에 가깝다.

지금이야 의료생활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지만, 불과 1백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무명옷을 손수 만들어 입었다. 무명은 백성들의 옷과 이불이 되었고, 목화씨로 짠 기름은 면실유가 되었다. 또한 목화줄기는 사랑방 문화를 만들어내 우리만의 훈훈한 문화콘텐츠를 형성해왔다. 나아가 목화는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으로 불리게 했다. 문화적 상징 심벌이 되었으며 민족공동체를 이룬 산물이 되었다.

목화 전래 후 목화씨와 방직기술은 다시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의료생활은 물론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목면이 전래되기 전, 일본의 서민들은 추위에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목화 도입 후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자, 생활과 경제에 안정을 꾀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는 화승총의 심지나 선박의 돛 등으로 쓰이며 오히려 조선 침략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훗날 개항을 전후로 한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한 일본의 방직기술은 오히려 조선 면업을 초토화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은 원료 공급기지와 소비지로 전락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병참기지화되고 만다. 두 나라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일본에 목화가 전래되고, 그 후 일련의 변천사에서 등장하는 기업이 토요타자동차의 전신인 토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이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토요다 사키치(豊田佐吉)는 실로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평생 직기 개발에 힘써 인력직기를 동력직기로, 동력직기를 다시 자동직기로 발전시키고, 또 평면직기에서 환상(環狀)직기를 개발해내며 자동직기 혁신에 평생을 바친다. 혁신적인 발전을 이뤄낸 토요타는 마침내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기에 토요타자동차를 출범시킨다.



토요타생산방식(TPS, Toyota Production System)으로 잘 알려진 1백 년간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혁신적 노력은 토요타이즘(Toyota-ism)이란 말을 만들어내며, 전 세계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 현재 토요타는 매출 180조 원에, 10조 원 이상의 이익을 내며 ‘지속성장 가능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이후 토요타 리콜 사태는 토요타가 향후 어떤 혁신을 이뤄낼지 가늠자가 된다.)

문익점 자신이 직접 전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목면이 조선으로부터 전래된 것은 부정키 어렵다. 우리는 선도자 역할을 했으나,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 목면을 받아들여 지속적으로 혁신시킨 반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도입 초기의 발전을 근대에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결국 가내수공업에 머문 조선 면업은 끝내 일본 면방직업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일본은 조선의 목화를 받아들이고, 종자개량을 통해 선험자의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는 성과를 낸다. 이 과정에서 혁신의 릴레이 현상이 벌어지고, 산업 전환이 이뤄지며, 토요타는 자동차산업으로 환골탈태했던 것이다.

일본 나고야에 위치한 토요타산업기술기념관에는 방적기 등 일본 기계공업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토요타자동차의 발전 과정도 한눈에 볼 수 있다. 토요타이즘이 확산되면서 한국에서도 많은 기업인들이 이곳을 견학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나 효율성 차원의 벤치마킹을 넘어, 오늘날 한국의 경영자들은 목화씨 한 알을 놓고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토요타 1백 년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속혁신의 노력 없이는 곧 뒤처지고, 잊히고 만다. 또한 개인이나 기업, 국가 차원의 혁신적 노력 없이 발전을 기대할 수도 없다. 문익점 시대의 탁월한 성과는 21세기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문익점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혁신과 도전은 절대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전경일, <더 씨드 : 생존을 위한 성장의 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