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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더 씨드(The Seed): 생존을 위한 성장의 씨앗

문익점이 원에 파견된 배경

문익점이 원에 파견된 배경

 

이른바 잘 나가던 문익점이 일생일대의 대변혁을 겪게 된 것은 역사적 우연이자 필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홍건적의 난이 전 국토를 휩쓴 혼란의 시기, 문익점의 인생도 당초 궤도를 크게 벗어나 남다른 역사적 임무를 맡게 된다. 불행으로 다가왔으나 행운이었고, 일생일대의 기회이기도 했다. 계품사 이공수와 함께 서장관으로 원에 특사로 파견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이른바 공민왕 폐위사건으로 알려진 일대 반역행위를 바로잡고, 외교적 노력으로 사건을 풀고자 한 국왕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고려를 뒤흔들어놓은 공민왕 폐위사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세계 제국을 이뤘던 원이 쇠퇴하면서 중국은 끊임없는 반란으로 매우 혼란했다. 주원장(朱元璋), 진우량(陳友諒), 명옥진(明玉珍), 장사성(張思誠), 방국진(方國珍) 등 한족(漢族) 무리들이 곳곳에서 일으킨 반란이 원을 내부적으로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이 파병을 요구해오자, 부득이 고려는 유탁(柳濯), 최영 등 원이 지명한 40여 명의 장수들과 2천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참전토록 했다. 그러나 원의 지휘계통 혼란으로 진압에 실패하자 장자성(張子誠) 등 반란군은 더욱 기세를 올리게 되었다. 이처럼 100여 무리에 달하는 한족 반란세력이 들끓으면서 이미 원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부 혼란으로 고려에 대해 실력행사를 못 하고 있던 차에,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원 순제(順帝)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막대한 타격을 받아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이를 틈타 순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내세워 고려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이는 그동안의 약해졌던 고려에 대한 간섭과 통치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원의 고려에 대한 지배는 그야말로 나라의 자존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이었다. 고려는 약소국의 비애를 고스란히 감내해내야만 했다. 약 1세기에 걸친 지배 기간 동안, 원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과 폐위를 서슴지 않았다. 충렬왕과 그 뒤를 이은 충선왕 때부터 원은 왕으로 책봉된 충선왕의 국새(國璽)를 마음대로 빼앗아 전위한 충렬왕에게 다시 넘겨주는 등 경악을 금치 못할 일들을 지속적으로 벌다. 충렬왕이 죽은 뒤 다시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1313년(충선왕 5) 충숙왕에 전위하고 원도(元都)인 연경에 계속 머물렀는데, 무고로 토번(吐蕃, 티베트)으로 유배 보내지기까지 했다.

 

이후 충숙왕도 무고를 받아 원제에 심한 질책을 받고 왕인(王印)을 회수 당하기까지 한다. 충숙왕의 뒤를 이 충혜왕 또한 무고 국새를 환수 당했다. 이에 다시 충숙왕이 복위되었다. 몇 년 뒤 충숙왕이 자 충혜왕은 맹렬히 복위운동을 했으나 원에 의해 거부당하고, 형부(形部)에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어 복위 환국했다. 충혜왕이 원제의 명을 받을 때 사신은 왕을 마구 발로 차며 포박하고 시종들에게 칼부림을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는 등 안하무인 그대로였다. 그러고는 국왕을 말 한필에 태워 칼로 협박하여 원에 끌고 갔다. 그러고는 연경에서 2만 여리 떨어진 게양현(揭陽縣)에 유배시켜 버린다. 왕은 갖은 고초 끝에 유배 도중 죽었다.

 

이어 충목왕이 들어섰으나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자 원제는 12살의 충정왕을 세다. 하지만 인망이 강릉대군[江陵大君, 몽골 이름은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에게 돌아가자 충정왕을 강화로 추방하였다가 독살시켜버리고 강릉대군을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가 바로 공민왕이다. 이때 공민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노국대장(魯國大長) 공주로 잘 알려진 원 위왕(魏王)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의 딸 보탑실리(寶塔失里)를 맞아들여 원 내부에 정치적 배경을 든든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민왕도 원의 폐왕입주(廢王入主) 앞에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원제의 명령은 이처럼 절대적이었다. 고려에 대한 절대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그런 원에 자주(自主)의 기치를 내세운 공민왕은 눈엣가시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국왕을 축출하려는 공민왕 폐위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렵 원이 공민왕을 폐하고 내세 덕흥군은 누구일까? 덕흥군[德興君, 몽골 이름은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 도망가 있던 인물이다. 순제에게 그는 공민왕을 폐하고 고려를 대리 통치는 데 적격이었다. 공민왕을 폐하려 한 이 계획에는 원 조정 내외의 실력자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부원배(附元輩) 최유(崔濡)의 암약과 기황후(奇皇后)가 적극 개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부원배 기철(奇轍)의 누이동생인 기황후는 공민왕이 1356년(공민왕 5) 기철 일당을 축출하고, 여세를 몰아 반원정책의 깃발을 높이 든 데 반감이 많았다.

 

공민왕은 이 무렵 원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치로 관제를 문종 대(代)로 다시 복원했다. 나아가 원의 국정감시기관인 정동행중서성리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혁파하고, 영흥에 있던 쌍성총관부를 몰아내어 철령(鐵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했다. 또한 원의 연호인 지정(至正)을 폐지하고, 변발(辮髮)․호복(胡服) 등 몽골풍을 없애버렸다. 이런 일련의 반원 조치에 불만을 품어온 기황후는 부원배 최유와 결탁해 순제를 움직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오빠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것이다.

 

공민왕 폐위사건은 이런 복잡한 정황 속에서 벌어졌다. 고려를 뒤흔든 이 사건은 이처럼 얽히고설킨 국내외 정세를 반영하며, 한편으론 문익점이 목화씨를 입수․귀국하는 데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두 차례 홍건적의 난을 물리친 뒤, 공민왕은 1362년(공민왕 11) 6월 원에 전리판서(典理判書) 이자송(李子松)을 파견하여 홍건적 평정을 보고하면서 노획한 원 황제의 옥새 등을 바다. 또한 그 해 9월에는 첨의상의(僉議商議) 강지연(姜之衍)을 하정사(賀正使)로, 전리판서 이서용(李瑞龍)을 하춘추절사(賀春秋節使)로 거듭 원에 파견다. 이미 흔들리는 원 제국이었지만, 원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셈이다.

 

그런데 12월 들어 ‘왕을 갈고 새로 세운다’는 이른바 폐왕입주의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신하들 가운데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 것에 대비, 이부상서(吏部尙書) 홍사범(洪師範)을 서북면체핵사(西北面體覈使)로 삼아 내부에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있는지 점검하고, 조사케 하는 등 즉각적인 조처를 강구다.

 

공민왕 폐위 음모가 고려에 처음 알려진 것은 공민왕이 제2차 홍건적의 난으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갔다가 개경이 수복된 후 환도하는 도중 청주에 머물 때였다. 이에 공민왕은 12월 22일 찬성사(贊成事) 유인우(柳仁雨) 문하평리 황순(黃順)을 하성절사(賀聖節使)로 원에 파견했다. 소문은 사실로 드러나, 원은 1362년(원 순제 22) 12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했다. 공민왕을 책봉한 것도 원 순제였고, 폐위하려는 것도 원 순제였다.

 

확실한 정보를 접한 공민왕은 귀경을 재촉해 다음 해인 1363년 2월 12일 개경 흥왕사에 도착했다. 다음날 백관으로부터 환도의 하례를 받고, 궁궐의 수리가 끝나는 동안까지 그곳을 임시 어궁으로 정다. 그런데 1363년 3월에 김용(金鏞)이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흉계로 죽이고, 흥왕사 행궁에 머문 공민왕을 시해코자 김수 등 50명을 거느리고 행궁 침실을 야습다. 황급히 환관 이강달(李剛達)에게 업혀 대비(大妃) 침실에 숨은 왕은 위기일발의 위난을 모면했다. 대신 왕으로 가장하여 침실에 누워 있던 환관 안도치(安都赤)가 희생되었다. 이것이 바로 흥왕사의 변(變, 김용의 난)이다.

 

이 변란은 공민왕 시해로까지 이어질 뻔한 매우 위중한 반란이었다. 고려 조정 내부의 세력을 이용하여 왕을 또 다시 마음대로 바꾸려는 이 같은 역모에 온 나라는 발칵 뒤집혔다. 다급한 대책 마련이 우선이었지만, 공민왕은 수순을 살폈다. 물론 처음엔 방법도 유화적일 필요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고려사』 최유전(崔濡傳)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일찍부터 고려에 불평을 품고 원나라에 머물러 있던 중 기철이 복주(伏誅)당하자 기황후가 공민왕을 몹시 원망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을 알고 승상 삭사감(搠思監) 및 황후궁의 내시인 본국인 박불화(朴不花)를 아첨하여 섬겨 높은 벼슬을 따내는 한편, 김용이 안우(安祐) 등 제장(諸將)들을 죽였으므로 대응해올 것을 믿고 드디어 불령하게도 황후를 달래어 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울 것을 획책하여 순제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고 공민왕은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역모 시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서둘러 찬성사 이공수와 밀직제학(密直提學) 허강(許綱)을 원에 파견했다. 이때가 1363년 윤3월 1일의 일이었다. 『태조실록』은 이때 문익점이 서장관으로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전에 연경에 간 사신 일행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년인 1362년(공민왕 11) 12월 폐왕입주의 조칙이 내려졌을 때, 그 이전부터 연경에 살고 있거나 사신으로 간 고려인들은 모두 억류되어 있었다. 이 무렵 덕흥군을 국왕으로 받들고 고려에 입국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 이때 최유와 덕흥군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에 시해되었다고 거짓을 전했기에 김첨수(金添壽), 유인우, 강지연(康之衍, ‘姜之衍’을 말함), 황순, 안복종(安福從), 문익점, 기숙륜(奇叔倫), 나영수(羅英洙), 홍법화(洪法華)를 비롯한 고려인은 거의 다 이 칙령을 따랐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본다면, 문익점은 『태조실록』에 나온 사행 시점(1363년 윤3월 1일)과 달리 1362년(공민왕 11) 12월 22일 찬성사 유인우, 문하평리 황순과 함께 하성절사 일행으로 연경에 간 것이 된다. 즉, 이공수 일행에 포함된 일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혼돈을 자아낸다.

 

어찌되었건 원에 간 이공수 일행 파견 목적은 외교사절 특성상 즉각적인 대항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파견 목적은 그간 홍건적의 난으로 불가피하게 안동까지 피난을 가게 되어 원 조정과 정상적인 사절 왕래가 불가능했던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함으로써 원 순제의 오해를 풀려는 데 있었다.

 

공민왕은 직면한 위기를 어떤 외교적 수완으로 풀려고 했을까? 『고려사』에는 이공수가 원에 올린 「진정표(陳情表)」와 「하평해개적표(賀平海盖賊表)」의 두 표문이 기록되어 있다. 사태는 위중했지만, 이들 표문에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내용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이미 공민왕은 원 순제가 자신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기정사실화하기보다는 원 조정의 동태를 살피며 대응해나가고자 했다. 이를 항의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왕권이 도전받는 상황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기에 적절한 대응법이 될 수 없다는 걸 공민왕은 간파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정표」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도리를 말하고 항상 성세(盛世)의 홍은(鴻恩)을 입어왔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그런 터에 뜻밖의 구적(寇賊, 즉 홍건적)을 만나 잠깐 원 조정과 격절(隔絶)했으나, 다행히 적을 평정한 지금은 성심으로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충성을 다짐할 테니, 넓은 도량으로 독단을 돌리고 살펴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복위를 직접적으로 청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공민왕이 최유가 홍건적의 난에 자신이 훙거(薨去)했다고 거짓 보고한 것을 원 순제가 믿고 덕흥군을 왕으로 내세웠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고 자신이 건재하고 있음을 순제에게 인지시켜 덕흥군을 세우려는 조치를 철회시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쌍성총관부를 혁파함으로써 원 조정과 각을 세운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외교적 술어로 자신을 더욱 낮추는 자세를 취했다.

 

한편, 「하평해개적표」는 1362년(공민왕 11) 8월 23일 원이 집현원시독학사(集賢院侍讀學士) 흔도(忻都)를 파견하여, 원의 요양행성동지(遼陽行省同知) 고가노(高家奴)와 더불어 개주(蓋州)․해주(海州)의 홍건적 잔당을 평정한 것을 치하하는 내용이다. 『고려사절요』에는 같은 날 이공수와 허강을 원에 파견해 「진정표」를 올렸다고 하지만, 표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고 사행 중에 생긴 여러 가지 사실을 자세하게 언급해놓고 있다. 이 기록은 고려 외교 사절단의 활동과 관련되어 정황을 더 자세히 알려준다.

 

즉, 기황후의 공민왕에 대한 증오, 최유와 김용의 동정, 덕흥군의 옹립, 이공수가 서경(西京)의 태조 왕건의 묘[태조원묘(太祖原廟)]에서 행한 공민왕을 복위시키겠다는 맹서, 기황후의 이공수에 대한 설득, 이공수의 공민왕에 대한 변호 및 그가 병을 청탁하여 덕흥군을 따르지 않은 일 등이 수록되어 있어, 사행 목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계품사를 파견한 같은 해(1363년, 공민왕 12) 4월 15일, 공민왕은 밀직상의(密直商議) 홍순(洪淳)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수림(李壽林)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다시 원에 파견한다. 그런데 이때의 사절단은 이전의 이공수 사절단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즉, 김용 일당이 진압되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공민왕을 위협할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에, 공민왕은 자신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려 했던 원 조정의 처사에 대해 부당성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항변하고자 한 것이다. 반란을 물리친 자신감이 표출된 셈이다.

 

이때 원의 어사대․중서성․첨사원 등에 백관(百官) 기로(耆老, 연로하고 덕이 높은 사람)의 뜻이 담긴 항변서를 바쳐 국왕의 복위를 간청했다. 또한 고려 본국에서는 경복흥(慶復興)과 안우경(安遇慶)이 원에 폐왕입주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공민왕 폐위 결정은 원도(元都)에 있는 고려의 불령한 무리들이 조장한 허망한 말을 따른 것이니, 이들 흉도들을 강력히 처벌하여 보공거참(報功去讒)의 의지를 보여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정삭[正朔, 황제가 바로잡아주는 정령(政令)]이 반포되지 않았고, 원에 간 사절단들도 억류되어 있었기에, 사신들은 본국인 고려와의 교류가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제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에 시해되었다는 최유와 덕흥군의 말만 계속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덕흥군 편에 선 사람들과 그 반대로 충신의 절개를 지킨 사람들 사이에 이후의 운명이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1363년(공민왕 12) 5월, 역어(譯語, 통역관을 말함) 이득춘(李得春)이 원에서 돌아와 덕흥군을 왕으로,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아 요양병(遼陽兵)을 일으켜 동으로 보낸다는 정확한 정보를 전해왔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월에, 이전의 고려왕에 대해 취했던 방식대로 원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온 이가노(李家奴)는 공민왕으로부터 왕인을 거두어갔다. 전운이 감도는 이때 이공수, 홍순, 허강, 이자송, 김유(金庾), 황대두(黃大豆), 장자온(張子溫), 임박(林樸) 등이 대나무 지팡이[竹杖中]에 밀서를 숨긴 밀사를 통해 최유와 덕흥군의 동태를 고려 조정에 알려 방비케 했다.

 

공민왕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1364년(공민왕 13) 1월, 원은 김용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고 최유는 스스로 좌정승(左政丞)이 되어,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에 있는 자들에게 모두짓 관직을 주고, 요양성의 군사 1만을 징발해 고려를 침공했다. 원나라 군사는 덕흥군을 국왕으로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평북 정주(定州)인 수주(隨州)의 달천(撻川)에 이르렀지만, 최영․이성계․안우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고 말았다. 유인우, 강지행, 안종복 등 덕흥군에 붙은 무리들은 거의 다 잡혀서 죽고, 군사 중 연경으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17기(騎)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고려사』 덕흥군전(德興君傳)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기철을 주(誅, 죽임)함에 미쳐 황후가 공민왕을 원망하니 마침 본국인(本國人) 최유가 원에 있으면서 불령한 무리들과 더불어 황후를 설득, 공민왕을 무고하여 이를 폐하고 덕흥군을 세워 왕을 삼아 기삼보노로 원자 삼기를 모의하여 무릇 고려인으로 원에 있는 자에게 다 거짓 관직을 내리고 또 청하여 요양성 1만을 징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수주달천(隨州撻川)에 이르렀다가 아군에게 패한 바 되었다.

 

한편 원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위왕 패라첩목아가 대군을 이끌고 연경으로 진군하여 간신 박불화와 승상 삭사감을 숙청하고 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어사대부(御史大夫) 독노첩목아(禿魯帖木兒) 평장사(平章事) 노적초(老的炒)와 함께 황제에게, 고려왕은 공이 있고 죄가 없는데 소인들의 모함으로 폐위되었으니 신원하여 북위시킴이 마땅하다고 진언하자, 황제는 이 주청을 받아들였다.

 

1364년 9월 호군(護軍) 장자온이 원에서 돌아와 국왕의 복위와 최유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다음 달인 10월에는 원 한림학사 기전룡(奇田龍)이 국왕 복위의 조서와 덕흥군으로부터 환수한 왕인을 가져옴으로써 공민왕은 복위되었다. 이에 반해 덕흥군은 군의 칭호를 빼앗기고 영평부(永平府)로 유배되었으며, 최유는 11월에 처형되었다.

 

이어 같은 달 이공수를 비롯한 임박, 이자송, 홍순, 허강, 김유, 황대두, 장자온 등이 귀국하자, 조정은 대대적인 환영을 베풀고 그들의 빛난 충절을 찬양했고 높은 관직과 포상을 내렸다. 이공수는 영도첨의(嶺都僉議)에 대배(大拜)되고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이자송에게는 절의를 가상히 여겨 밀직부사를 제수하고 공신호를 하사했다.

 

이처럼 문익점이 연경에 간 시기는 순제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책봉한 실로 정치적으로 미묘하고 위태로운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문익점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정치적 입장의 차, 군신간의 신의의 문제 등이 불거진 상황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살고 죽는 갈림길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복잡한 정세와 개인의 처신 문제가 뒤얽히며 이 시기 전후로 문익점의 행적은 기록마다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