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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오래된 새로움, 창조의 CEO 세종을 만나다 <上>

by 전경일 2011. 1. 19.
오래된 새로움, 창조의 CEO 세종을 만나다 <上>
교보문고 독서경영대학 강의노트
 
[21호] 2010년 11월 30일 (화) 곽진영 foodcoop@gamsa.or.kr
교보문고 독서경영연구소(송영숙 소장)가 주관하는 독서경영대학에 대해서는 지난 19호에서 소개했다. 독서경영대학 2기는 1년 과정으로 세 학기로 나뉘는데 ‘창조’학기, ‘소통’학기, ‘실행’학기가 3개월씩 진행된다.
기자는 지난 10월 7일에 시작된 개강식과 창조학기 첫 강의(손욱 전 농심회장, 창조리더십이란 무엇인가?)부터 지난 11월 18일의 독서토론(『상식파괴자』를 읽고)까지 6강을 소화했다. 오는 12월 16일에 마무리되는 창조학기는 첫 강의 주제(세종의 리더십을 통해 배운다)에서 보듯 ‘창조’하는 팀장이 되기에서 세종은 연구 대상이면서 그 자체가 핵심키워드이다. 매주 다른 교수(강사)들이 저마다 다른 독특한 주제로 ‘왜(why)’ 창조하며 ‘어떻게(how)’ 창조하는가를 역설했다.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기행수필을 두 차례에 걸쳐 지난 소개한다.

   
전경일
연구소장
이번 호에는 ‘왜’ 창조하는가에 맞춰 정리했다. 지난 11월 6일에는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의 안내로 세종대왕을 모신 여주 영릉 일대를 답사하였고 현장(여주군박물관)에서 강의가 진행되었다. 손욱 회장이 1강에서 ‘창조경영’에 입각하여 세종의 리더십을 얘기했다면, 4강에서 전경일 소장은 ‘지속가능경영’을 키워드로 세종의 창조적인 삶과 업적들을 기업경영에 적용하는 사례를 소개했다.

11월 6일 오전 8시 30분, 종로구 내수동 교보문고 사옥 앞에 집결한 독서경영대학 2기 동학들은 준비된 버스에 올랐다. 만사를 제치고 하루를 오롯이 내어 대왕 세종을 만나러 가는 길, 버스에 오름으로써 길 위에서 펼쳐지는 강의는 출석체크를 한 셈이다. 그런데 버스는 여주로 가는 고속도로로 가지 않고 양재동 농협하나로마트를 오른편에 끼고 달리고 있다. 영릉(여주) 가는 길에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부터 답사한다는 일정이다. 대모산(大母山) 자락에 위치한 헌인릉은 ‘헌릉’과 ‘인릉’이 있는 아우르는 말이다.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그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곳이 헌릉(獻陵)이며,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를 모신 곳이 인릉(仁陵)으로, 헌인릉(獻仁陵)은 사적 194호이다.


   
교보문고 독서경영대학 2기생들, 영릉 가는 길에 헌릉에 들러 세종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굴곡이 많았던 삶에 대해 강의를 듣고 있다.
떨어져있는 무덤, 헌릉의 태종과 민경왕후일행들은 전경일 소장의 안내로 헌릉을 둘러보았다. 갖은 반대에도 셋째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세종의 부왕인 태종(이방원)을 모신 곳, 한 많은 생을 살았던 세종의 어머니 민경왕후 민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1418년, 재위 32년(54세) 만에 승하한 세종을 처음 모신 곳도 지금의 헌릉 서쪽이었다. 일대가 너무 습하고 모신 곳에서 물이 발견되어 예종 원년(1469)네 여주 현재의 영릉으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찾은 날도 안개가 자욱했고 밤새 내린 서리에 낙엽들은 젖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세종은 승하하고 51년 정도를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신 곳, 부모님 품 안에서 머물렀던 셈이다.

세종은 1420년(세종2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민경왕후 민씨)를 헌릉에 먼저 모셨다. 그리고 2년 후인 1422년(세종 4년) 아버지(태종)를 승하하니 미리 마련해놓은 어머니 옆자리에 나란히 모셨다. 세종이 소헌왕후와 죽어서까지 한 무덤에 다정하게 잠들어 있는 것에 비하면 태종과 민경왕후는 곁에 묻혔으나 생전의 애증(愛憎) 관계를 반영하듯 두 기의 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부모가 자식들을 사랑하는데 치우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장자인 세자(후에 양녕대군)를 폐위시키고 삼남인 도(祹)를 왕위에 올리기까지 태종과 민경왕후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어야했다. 더구나 원경왕후는 남편 이방원을 왕위에 올린 여장부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태종은 의리를 저버리고 9명이나 되는 후궁을 들인다.

태종이 조선개국의 핵심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방원’은 악역을 도맡았다. 그러나 ‘왕자의 난’이 말해주듯 조선 3대왕에 오르기까지 피바람이 잦을 날이 없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민경왕후의 아버지(장인)와 민무부, 민무질 등 오라비들(처남들)을 정치적 술수를 걸어 제거함으로써 외척의 씨를 말린다. 이 사건으로 세종의 부와 모는 죽어서까지도 화해할 수 없는 불통(不通)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권력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욕심을 태종처럼 컬러풀하게 드러낸 사람이 우리 역사에 또 있을까요? 정치란 무엇인가 그 속성을 간파할 수 있는 유일하게 ‘스토리’가 있는 왕이 태종입니다.”
헌릉 앞에서 전경일 소장이 얘기한다. 일행들은 이방원이 포은(정몽주)를 회유하면서 지었다는 <하여가(何如歌)>, 답가인 포은의 단심가(丹心歌)와 포은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들려주었다는 교육관이 담긴 시조 <까마귀 노는 곳에>를 낭송했다.

태종 이방원은 유일하게 ‘스토리’가 있는 왕

이방원은 포은과 야은(길재) 등 정적들을 무참하게 죽였지만 왕위에 올라서는 신하들에게 야은과 포은처럼 충성하라며 한때의 정적을 충성의 심벌마크로 내세운다. ‘피로 점철된’ 거침없는 삶을 살았던 태종도 말년에는 그동안 저지른 일 ‘때문에’ 자신이 역사에 나쁘게 기록될까봐 걱정하였던 소심한 왕이었다. 택현론(擇賢論)을 내세워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려나던 날, 상왕 태종이 아들 세종과 대를 이어 충성할 신하들과 함께 지었다는 시 한 편을 보라. 지은이가 태종으로 기록된 <여군신연귀(與群臣聯句>라는 시다.


임금은 자리를 베풀어 만세를 기약하고(유정현)
백성은 주린 빛 없이 은혜를 고마워하네(태종)
은혜의 물결이 온화한 말씀 속에 호탕하니(하연)
나라 운수는 길이 즐거운 가운데 승평하도다(이원)
온 나라가 근심 모르는 오늘이여(한상경)
군신이 도에 맞추어 조정을 섬기네(태종)
조정 신하가 산악을 불러 수(壽)를 비나이다(혀연)
사자(嗣子)가 몸을 닦아 조종을 받드니(태종)
종사의 안위는 신이 책임지겠나이다(세종)

   
왼편 서쪽이 태종, 오른편 동쪽이 그의 아내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능이다. 두 사람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생전의 애증(愛憎) 관계를 반영하듯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듯하다.
전경일 소장은 태종을 ‘전임 CEO’, 세종을 ‘후임 CEO’에 비유하여 이․취임식날 지은 현재의 기업상황에 맞게 풀이했다. 당시 52세인 태종(1367~1422)이 22세인 아들 세종에게 왕좌를 물려주는 자리였다. “새로운 CEO로서 주식회사 조선을 ‘초우량기업’으로 만들겠다(종사의 안위는 신이 책임지겠나이다)”는 세종의 다짐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회사 창업의 주역이기도 한 내가 그래도 괜찮은 CEO이지 않았느냐” 태종은 일부러 시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업적이 역사에 좋게 기록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이룬 업적의 공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세종 2년, 아버지와 끝내 화해하지 않은 채 어머니 원경왕후가 눈을 감는다. 부왕이 저지른 일 때문에 맺힌 한의 삶을 살다가 떠난 어머니의 마음을 세종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리라. 아버지 덕분에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왕권을 세우고 지키기 위하여, 그 ‘ 때문에’ 희생된 좋은 사람들에게 대한 안타까움과 회한 또한 아버지로부터 대물림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개국 초기의 조선은 무치(武)의 시대를 거쳐 문치(文治)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비록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나라를 다시 세워야하는 소명이 세종에게는 부여되어 있었다.

헌인릉을 빠져나오는 길 위에는 갖은 낙엽들이 수북이 덮여 있다. 일행들이 걷는 길 앞에서는 분말농약을 살포할 때 쓰이는 기계를 짊어진 관리인이 바람을 뿜어내어 낙엽을 한쪽으로 모으고 있다. ‘낙엽을 분다’라고 표현해야 할까, 피의 숙청으로 사라지는 목숨들을 추풍낙엽에 비유하곤 하는데, 왕릉의 고요를 가르는 굉음과 함께 한쪽으로 모여지는 낙엽들 덕분에 일행들이 가는 길이 열리고 있다.

어쩌면 태종은 평생을 관리인이 낙엽을 한쪽으로 모아 길을 내듯이 아들 세종이 위대한 업적을 남길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가장 잘한 일이었다. 아들처럼 후세들의 지폐(만원권)에 실리는 영광을 누릴 수 없었지만 태종은 분명한 철학으로 자식농사를 훌륭하게 지은 것이다. 사주(四柱)에서 생년, 생월, 생일이 현재까지의 나를 살펴볼 수 있는 근거라면 생시(生時)는 ‘말년운’으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다. 그런데 말년(末年) 운(運)은 ‘자식운’이라고도 말한다. 곧 내 자식이 잘 되어야 나의 말년이 평안하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이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노심초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심은 과욕이 되고, 관심도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1강에서 손욱 회장은 『십이지경영학』의 저자답게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으로 나머지 네 손가락의 마디를 짚은 행위에 비유하여 리더십을 설명했다.
“왼손 엄지의 첫째마디가 나머지 네 손가락의 열두 마디를 짚는 행위를 보세요. 엄지손가락이 안 닿는 마디가 없듯이 한 조직의 구성원과 두루 소통하는 것, 그것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조건이고, 세종대왕이 리더십을 발휘한 비법이었습니다.”
‘(장)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을 따를 자가 없다.’라는 말에 담겨 있듯 세종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인재가 가진 역량(강점)을 간파하고 잘 살려주었으며, 신하와 백성들의 성공이 마침내 왕과 나라의 성공이 되도록 이끌었다. 이런 배려는 세심한 관찰과 끊임없는 ‘독서’를 통한 통찰력을 생겼을 때라야 나올 수 있다. ‘사람이 가진 강점을 보고 이것을 잘 자극해주면 성과를 낸다.’로 세종의 남다른 인재관은 압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 태종에게는 그런 안목이 없었을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태종은 셋째아들이 가진 왕재(王才)로서의 면모를 알아보았고, 갖은 반대에도 기어이 셋째를 왕위에 올렸다. 또한 조직의 리더(엄지손가락 첫째마디)로서 태종은 조직원(네 손가락의 12마디)들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아버지가 있어 그 아들이 있지 않았겠나. 조선의 창업과 500년 왕조의 기틀을 세운 것은 누가 뭐래도 태종의 공적이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세종은 목표 설정에서 달성까지 전(全) 과정을 ‘창조적’으로 이뤄냈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다.


   
헌릉 홍살문 아래에서 바라본 정자각. 이 길을 참도(參道)라고 부른다. 미세하지만 경사가 져 있다. 맨 왼 편이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 그 오른쪽이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 그리고 그 오른편이 신하나 일반인들의 길이다. 참배시 맨 오른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엄지 첫째마디가 네 손가락 열두 마디에 두루 닿듯

세종의 비전과 경영철학(핵심가치)을 압축하면 애민(愛民)이다. 세종은 늘 처음처럼 백성사랑이라는 출발점을 잊지 않았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만들 스물여덟 글자가 바로 훈민정음이었다.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애민(哀愍)이 곧 백성을 사랑하는(愛民) 출발점이기도 했다.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애민(愛憫)이 곧 애민(愛民)이기도 했다. 백성과 신하들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니 애달픈(마음이 안타깝거나 쓰라리다) 마음이 생겨나고 그 애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백성과 신하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소해야 했다. 해결책은 전대미문(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음) 것이라 새롭게 창조하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았고, 그렇게 세종은 창조의 군주가 되었다. “배려와 관심에서 상상력이 나오고, 배려하는 마음일 때 ‘불안’, ‘불편’ ‘불만’을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해소하는 데서 창조가 시작된다.”

창조학기 2강(‘창조적 팀장을 위한 지식의 통섭’, 10월 14일)에서 유영만 교수도 미래인재의 핵심역량은 감성능력에 있음을 강조했다. “모든 아이디어는 고객의 불편을 감지하는 데서 시작된다(감수성). 모든 창조는 고객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측은지심). 고객 입장에서, 고객의 아픔과 불편함을 상상해본다(역지사지).” 유영만 교수는 창조학기 1강에서 손욱 회장이, 영릉을 둘러보고 여주에서 진행된 4강(‘세종리더십과 지속가능경영전략’)에서 전경일 소장이 주장한 바와도 ‘맥락’이 닿고 있었다.
지난 10월 9일 세종문화회관, 김황식 총리는 제564돌 한글날 경축사에서 정부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받들어 더욱 겸허한 자세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백성이 하늘'(以民爲天)이라고 여겼던 세종대왕의 지극한 애민정신”을 되새기겠다는 다짐이다. 하루 세 끼를 먹어야 산다. 세 끼를 먹기 위해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의 대가는 환산된 돈으로 지급된다. 헌인릉을 뒤로 하고 여주(영릉)로 가는 버스 안에서 기자는 지갑에서 ‘배춧잎’으로도 불리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세종을 알현했다. 전 소장이 준비한 종묘제례악(악학궤범)을 펴낸 것도 세종 때의 일이다)을 들으며 여주군 능서면 산 83-1에서 만날 세종을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된 새로움이리라. <다음호에 하편이 이어짐>
 <출처: 감사나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