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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대륙적 기풍의 수준 높은 공연 예술

by 전경일 2011. 6. 21.

후한서는 고구려에서는 “밤만 되면 각 읍과 부락의 남녀가 귀천에 상관없이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놀이를 통해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놀이를 통해 남녀 간의 만남이 밤마다 이루어지다 보니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도 훨씬 넓어졌다. 젊은 남녀는 이렇게 공동체 행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났고, 자신의 배필을 골랐다. 이 같은 풍속은 고구려가 공동체의식이 매우 높으며, 동시에 개방적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결혼제도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에서는 연애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또한 성도 개방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방적인 면은 풍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서로 마주치면 잘 안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공동체의식을 확인하는 작업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던 것이다.

개방적 태도는 공연예술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공연예술은 수준이 매우 높아서 훗날 중국의 궁정 무악으로 채택돼 수대(隋代)의 칠부기(七部伎)와 당대(唐代)의 9부기, 10부기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즉, 고려악, 고려악기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고구려의 공연예술에 대해서『수서(隋書)』나『구당서(舊唐書)』및『통전(通典)』등 중국 문헌에서는 그 내용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는 “고려악에 악공들은 새 깃으로 장식한 자색 비단 모자를 쓰고, 큰 소매가 달린 황색옷에 자색 비단띠를 띠었으며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끈을 매었다.”고 쓰여 있다. 또 “4명의 춤꾼들이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동이고 금귀고리로 장식했다. 그 중에 두 사람은 적황색 바지를 입었는데, 그 소매가 매우 길었으며 모두 검은 가죽신을 신고 쌍쌍이 서서 함께 춤을 추었다.”고 되어 있다. 나아가 이 춤에 사용된 17종의 악기를 밝히고 있다. 대단한 문화 지향적 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문화는 그 특징이 대륙 지향적이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서역에 가까웠으므로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를 창조적이고 독특한 예술로 발전시켰다. 고구려 무용은 동맹을 비롯한 여타 제천의식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샤머니즘 무속에서 탈피하여 세련되고 체계화된 춤으로 발전된다. 춤은 고구려인의 용맹스럽고 강건한 기질이 반영돼 동적이고 직선적이었다. 몸동작을 씩씩하게 놀리는 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는 춤꾼이 모두 남자이며 이들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칼, 창 또는 북을 들고 씩씩한 몸놀림을 보이며 춤을 추고 있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전투적 기상을 좋아한 데서 나온 춤일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무용으로는 호선무, 광축무, 지서무, 고구려무 등이 있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무용수들은 대개가 소매가 길고 넓은 옷을 입고 손이 보이지 않도록 춤을 추고 있는데, 남녀가 옆으로 늘어서서 함께 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수묘의 벽화에서도 의식무용으로 연희된 ‘검무’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나라 무용으로 보이는 그림을 통해 볼 때 왕실에서는 서역의 문화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무용은 바다건너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대제국 고구려의 문화 역량을 마음껏 드러냈다. 고구려 사람들의 춤 동작에 대해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찬미하고 있다.

 깃털모양 금장식 절풍모를 쓰고
하얀 신 신고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재빨리 넓은 소매 저으며 훨훨 춤추어
마치 요동에서 날아온 매처럼 나래를 펼치누나. 

金花折風帽白馬小遲回
翩翩舞廣袖似鳥海東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