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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일본 자연재해에 따른 한국 내 석유 비축지 확보 문제와 집단 이주 타진 등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

by 전경일 2012. 3. 13.
작금의 일본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몰아친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1948년 대지진(진도 7.1), 1995년 고베 대지진(진도 7.3)과 더불어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본이 겪은 초비상 국가 재난 사태이다. 3.11 대지진 이후에는 ‘4년 내 도쿄 대지진 가능성이 70%’(아시아경제 2012.1.25)나 되고, 도쿄를 비롯한 일본 수도권 일대에 직하(直下) 지진 우려가 커지면서 일본이 향후 대내·외 정책에 있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자연 재해 등 위기시마다 일본은 국내·외에서 위기의 해법을 찾아왔고, 내부 결속을 위해 주변국(민)들에 대한 침탈을 감행했음을 상기해 볼 때, 최근 자연재해와 함께 일본의 극우주의적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자칫 일본발(發) 한반도 위기 국면으로 치달을 조짐마저 읽힌다.

최근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몇 가지 징후를 드러내 보이는 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현상들은 앞으로 매우 중시해서 봐야 할 점들이다.

그 중 하나는 일본이 관동지역의 지진, 쓰나미 등 재난에 대비해 부산, 경남, 거제 일대를 석유 비축 후보지로 삼고자 우리 정부와 협상 중(CBS 2011.12.3)에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의도는 일본 내 재난 발생 시 즉각적인 재외 비축 석유를 운송하려는 계획으로 아사히신문은 일본 경제산업성이 한국의 지식경제부에 석유 비축지 확보 문제를 비공식적으로 요청해 동의를 이미 얻었고(2011.1)이르면 올해 안에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의 석유 비축지 확보 움직임과 별개로 이미 일본 석유판매 대기업인 이데미쓰코산(出光興産)과 JX에너지(JX닛코닛세키에너지)는 한국기업과 손을 잡고 석유제품 중 하나인 등유를 한국 내 비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한국과 에너지 저장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재팬에너지(Japan Energy Corporation)가 선두에 서고 있다. 이 회사는 일제의 조선침탈이 강화되던 1929년에 설립된 회사로 당시 일본 군국주의의 연료 공급처를 자임해 온 많은 군수기업들과 그 활동상이 일맥상통하였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자연재해에 민감한 일본으로써는 “에너지 확보는 안전보장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곧바로 쓸 수 있는 석유 제품을 비축해 두려는 것으로 그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일본이 석유비축법 개정안을 2012년 정기국회에 제출하기로(매일경제 2011.12.4)한 것이나, 일본 정유업계 관계자가 “일본 정부가 한국 정유업체와 미리 계약을 체결해 유사시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형태로 석유 비축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처한 자연 재해적 환경요인과 함께 자원 확보, 저장 수단으로써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와 함께 일본 내에서는 대지진 이후 ‘유사시 한국과 전력공급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외견상 양국 모두 자연 재해가 지닌 불예측성의 특성상 향후 어떤 재해를 서로 입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한일 간 에너지 협력을 통해 주변국의 어려움을 상호 대비케 하는 것은 선린적 방책이 될 수는 있다. 이 점은 나아가 경제적 가치를 제고하는 한일 교역의 한 방편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다뤄 볼 필요가 있다.

즉, 일본 법규에 대한 이해를 우선시해야 한다. 1997년 일본은⟨신(新)미·일 방위협력지침(뉴 가이드라인)⟩과 1999년 5월 ⟨주변사태법⟩을 제정하고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내각은 ‘한반도 유사시 대량 난민이 도래하는 것에 대처한다’는 구실로 <유사법제(有事法制)>를 제정해 일본 주변지역에 자위대가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는 일본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신군국주의로 방향을 튼 신호탄으로 볼 수 있는 사건으로 향후 동북아 국가들의 안위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바였다.

일본이 최근 제1야당인 자민당을 통해 일왕(일본 내 ‘천황’이라 불리는)을 ‘국가원수’로 명기하고 비상시 총리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긴급사태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유사법제>제정 이후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매우 중시해서 보아야 한다. 이 법은 오는 4월 28일까지 최종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평화헌법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표시해 온 일왕을 '국가원수’로 표기함으로써 이제 왕의 위상은 구체적이자 실재적으로 국정 전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총리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 총리는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이나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상황을 ‘긴급사태’로 규정하고 자체 판단으로 재정을 동원할 수 있으며, 국민의 사적 권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총리의 권한 강화를 위해 헌법에 ‘긴급사태조항’을 추가한 셈이다.

또한 현행 헌법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허용하는 한편 군사재판소의 설치도 추가할 계획(연합뉴스, 2007.5.3)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일본이 근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설 시기 군부가 취한 법적 근거나 행태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일본 내 헌법 개정안은 일본이 국가적으로 대외정책을 취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우리에게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국제관계의 가변성을 심도 깊게 통찰할 것을 요구한다. 즉, 일본 내 긴급 사태 발생시, 혹은 한반도 내 유사시, 한국 내 일본의 국가적 자원인 석유 자원 보호 조치를 위해 일본 자위대(자위군)의 파견(병)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왜 자연 재해에 대한 대비책 이상으로 한반도 내 석유 비축지 설치를 희망하고 있는지 잘 알게 해 준다. 즉 겉으로의 목적 이상으로 이면에 깔린 저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의 법제적 움직임과 더불어 최근 일본 후쿠시마(福島) 지역 주민이 전북 장수를 방문, 집단 이주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전북도와 장수군은 5일 “후쿠시마 지역의 교회 목사 A씨가 서울의 개발업체 관계자와 함께 지난달 초 장수군청을 방문, 집단 이주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12.3.5). 장수군은 “이 목사가 ‘어린이들이 원전사고로 고통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들은 안전한 지대에서 아이들이 자라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하며, 장수 나들목(IC)과 가까운 계남면과 천천면 일대를 둘러보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한국 언론의 관심은 어떠했을까? 다분히 단순 호기심과 궁금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 민간 단체의 움직임의 저변에 깔려 있을 수 있는 '집단 이주 타진' 문제의 중층적 의미 및 목적에 전혀 접근하고 있지 못하다.

일본 주민의 한반도 이주 문제는 역사적 선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왜구의 한반도 침범이 극에 달했던 시기는 려말선초이다. 왜구 문제를 풀기 위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조선정부 들어 등장한 것이 이른바 ‘항왜(降倭)’인데, 이는 평화적 통교자와 귀화자를 우대하려는 조선 정부의 양면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목적의 회유책은 이후 조선 정부의 회유와 포옹책으로 귀화한 일인 무리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왜인들의 경제적 비중이 늘게 되고, 더욱 심각하게는 조선의 군사기밀을 일본에 제공하는 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회유책을 폈지만, 많은 수의 왜인들이 진심으로 귀화하거나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활이 곤궁하거나 일본에서 살 수 없어서 조선에 온 자들이 허다했고, 심지어는 통제가 가해지자 곧바로 침략적 근성을 드러내 조선 연안을 침구하기도 했다. 자신의 욕구가 관철되지 않자 평화로운 왜인에서 약탈집단으로 돌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회유책을 썼지만, 끝내 왜구의 본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조선 정부가 ‘신(信)’을 강조했지만, 왜인들의 일시적인 귀화는 조선의 향화정책과 왜구의 욕구가 맞아 떨어지며 생긴 일이지, 왜구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전경일, <남왜공정>)

근대 들어서, 일본의 조선 식민 정책이 극성을 부리던 1930년대에 일본은 대대적으로 일본인 800만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키고, 그 수에 머금 가는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켜 조선을 완전히 '일본화' 하려 했다. 창씨와 개명은 그 중 하나로 문화와 영혼을 박상(剝喪)시키려는 책동이었다.

당시 일본이 취한 척식 정책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 신군국주의 팽창책의 대(對)한반도 정책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반복성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도요카와 젠요, <경성천도>) 당시 일본의 이민 송출 목적은 ‘자신과 더불어 국가를 운반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일본을 한반도 내로 확장하려는 확장책의 일환이었다. 이 점에서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 문제는 역사적으로 일본 팽창주의와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福島) 지역의 주민이 전북 장수를 방문, 집단 이주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일본의 자연 재해로부터 벗어나려는 목적이 클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민간 차원의 이주 타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국가의 국민(國民)이 이주하려는 것은 그 지역의 문화와 습생에 동화나 귀화의 성격을 띨 때 양 문화 집단간 갈등 요소가 완화된다. 물론 적(籍)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도 정체성과 관련되어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들의 집단 이주 타진이 귀화 목적인지, 혹은 일시적 피난 목적인지도 불분명하며, 이들에 대한 보호 구실로 일본 정부가 한국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없이 흥미 위주로 접근하는 것은 자칫 한일 간 민감한 문제를 국제적 안목 없이 관망할 소지마저 있다. 게다가 경제적 효익만으로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구한말 일본의 조선에의 군대 파견(병) 이유 중 하나는 재한 일인의 안전 보장이 목적이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는 매주 중요한 역사적 선례임에 틀림없다.

한국은 올해 4.11. 총선, 대선 등 정치적 격변을 치르느라 대외 문제에 대해 별로 신경 쓰고 있지 못하다. 정권의 향배와 함께 심각한 내부 경제 문제로 모든 관심이 온통 내부에 쏠리고 있다. 이 시기, 일본의 극우주의적 활로 모색은 매우 심각한 사전 포석으로 자연재해의 일(一)해법과 헌법개정안을 통해 일본 내부 문제를 외부에서 풀려는 시도로써 한반도를 엮고 들어가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내 자연재해에 따른 한국 내 석유 비축지 확보 문제와 집단 이주 타진은 바로 이 점을 잘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중요하게 21세기 전체를 좌우할 국제 정치 역학관계를 포석하는 시기이다. 일본의 교묘한 한반도 착근 책략을 꿰뚫어 보는 정치·외교적 혜안이 필요하다. 앞서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 밝혀진 바는 없다. 이는 우리가 늘 내부 쟁투에 골몰할 때, 일본이 한반도 진출(침탈)의 호기로 삼아온 역사적 선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또한 늘 그 방식이 교묘하고, 지속적이며, 좀이 쓿듯 야금야금 한반도를 부식해 들어 온 일본식 침탈 방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한일사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인식과 국제 정세를 어떻게 끌고 갈지에 대한 뚜렷한 방책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거대한 동북아 변동 요인의 징후 앞에서 우리는 가십거리로 국제 정치의 밑바탕에 깔린 본질적 욕구를 몰인식하는 면이 크다. 그런 까닭에 한반도를 둘러싸거나, 한반도를 매개로 하려는 일본의 대외 정책에 깊이 있게 천착하고 있지 못하다.

이 같은 문제를 보다 멀리 내다보는 정치가가 전무하다시피 한 게 아쉽기는 하나, 그 또한 현재의 한국 정치의 한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국서(國書)를 보내 와 일본은 조선 침략 의도를 분명히 밝혔으나, 이를 단순한 협박 수준으로 위암 삼았던 조선 정부는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운양호 사건과 이듬해 강화도 조약 이후 34년만의 한일 병탄도 진행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선린을 위해서도 우리의 깊이 있는 역사 통찰이 필요한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