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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누르하치: 글로벌 CEO

변방에선 반드시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by 전경일 2012. 6. 7.

변방에선 반드시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여진 세력이 흥기한 것은 엄청난 악조건에서였고, 그것도 한족의 턱 밑인 동북면 변경에서였다. 여진족은 태생부터가 야생성과 관련이 깊다. 여진족의 이러한 야생성은 새로운 국가를 잉태하는 강력한 국가력(國家力)의 하나로 인식된다. 그것은 말(馬)을 통한 기동력과 사냥을 통한 잠재적 군사 훈련을 통해 강화된다.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둘러싼 이민족의 흥기는 바로 이 같은 악조건을 역으로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원이 없는 까닭에 대 중국 무역 이권을 장악하기 위한 여진사회 내부의 투쟁은 오히려 내부 경쟁력을 검증하고,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한족이 여진족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요새들은 여진족에게 새로운 축성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여진 부락 자체를 요새화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적을 제압하는 수단이 오히려 적에 의해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적과 근접한 변방이란 지역은 변화의 훈풍이 부는 기회의 접경지대이기도 했다. 이처럼 변경은 가까이서 적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산 경영 교육의 장이었다.

 

경쟁자에게서 배운 경쟁력은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예고한다. 누르하치는 군사력을 장악하는 방식을 칭기스칸에게서 배웠고, 그의 노회한 전술들은 오랜 시기 중국에 의해 취해진 전략에 대한 학습으로 얻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 대항하고자 몽골과 전략적 제휴를 맺었던 것은 한족이 취한 이이제이 정책의 변용이었던 것이다. 이는 적과 가까이에 있었기에 얻을 수 있는 수확이었다. 비유하자면, 이는 오늘날 유능한 기업들이 경쟁자 가까이 진지를 구축하거나, 경쟁자가 곤혹스러워할만한 기술로 시장을 흔들어 놓는 것과 비슷하다. 선진국의 많은 신생 기업을 보면 창업과 동시에 엑싯 플랜(exit plan)을 세우는 것은 설립 목적에 따라 경쟁사와 경쟁 방식을 설정하고 자기 사업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에서건 1, 2 등을 하는 기업들이 M&A 대상으로 삼는 기업들의 상당수가 자기 사업영역을 침범하는 잠재적 경쟁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잘 밑받침 해 준다.

 

성공의 임계지수에 이르다

 

적국의 선진적인 국가경영기법, 즉 정치, 경제, 행정 등 모든 면에 대한 벤치마킹은 누르하치의 눈을 뜨이게 했다. 여기다가 그는 자신이 갈고 닦은 군사력을 경쟁력의 하나로 더 추가한다. 팔기(八旗)가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뜻을 모아 가는데, 어느 정도 임계지수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 바로 이 지점이다. 오늘날 기업들이 연속적인 성공을 위해 핵심 제품을 확보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개 준비의 시간이 긴 까닭은 없는 가운데 자원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르하치의 경우 북쪽의 4개 주요 부족들을 통일하는데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여진 사회 내부를 통일한 것은 어느 정도 임계량에 도달한 것을 뜻한다. 지난했던 30년 세월 동안 누르하치가 취한 정책은 협상, 혼인, 전투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종합전 양상이었다. 이 모두 중국 정벌이라는 임계치에 이르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전사(戰士)에게 혼인은 사치스러운 일이다. 이는 새로운 전사를 재생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적을 혈연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순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누르하치에게 개인적인 일은 사치스러운 짓에 불과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작은 욕망을 떨쳐 냄으로써 중국을 인수 합병하는 대과업에 한 발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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