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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일본 재침의 현재성: ‘강화도 조약과 ‘한일합방’

by 전경일 2012. 8. 13.

일본 재침의 현재성: ‘강화도 조약과 ‘한일합방’

 

1598년 임진왜란 실질 전쟁이 끝나고, 1607년 조․일 간 국교 재개가 이루어진 다음 269(278)년 후인 1875년(고종 12년) 일본은 운양호(雲揚號)사건을 일으킨다. 그 결과 일본은 이듬해 조선 정부에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근대 일본이 조선 재침을 목적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침략 행위였다. 이때 일본은 부산에서 영흥만(永興灣)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를 측량하면서 함포(艦砲)시위를 벌였다. 또한 운양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재차 출동시켜 초지진(草芝鎭)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발포하도록 유도한 다음 이를 빌미로 침략 행위를 자행했다. 일본 침략의 첫머리는 이렇듯 작은 분란을 통해 우리의 대응을 유도한 다음 자신이 피해자인 양 위장하여 그에 대한 보복적 성격을 국가적 전란으로 키워나가는 특징이 있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과 강화도조약 등 각각의 사건들은 일본에 의한 ‘전쟁 유도설’의 성격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임진왜란 시 토요토미는 국서를 통해 ‘정명가도(征明假道)’에 불응할 시 침범하겠다는 조선 측이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조선이 불응함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명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강화도 조약은 우리 병사들의 발포를 유도한 다음 이를 빌미로 침략 행위를 자행한 특징이 있다. 철저히 전란 사태를 만들어 내고 이를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근대 들어 조․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3년 앞선 1872년 10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란 이후 조․일 양국은 통교(通交) 대행으로 대마도번을 활용했는데, 일본 명치정부가 부산 왜관(倭館)을 임의로 대마번으로부터 접수 처분 명령을 내린 다음, 일본 외무성의 공관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부산 왜관을 마치 자신들이 차지해온 소유지로 인식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당연히 조선 정부로서는 일본의 ‘불법 점거’내지 ‘침탈’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근대 일본의 침략 행위는 양국 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오던 그간의 외교적 근간을 송두리째 허물어뜨려 버리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간 상호 대등히 예를 갖추면서 교린 관계를 유지하고 국서(國書)를 교환해 왔던 전례를 깨고 재침의 침략성을 드러냈다. 그 무렵 일본 내부에서 ‘존황사상(尊皇思想)’, ‘정한사상(征韓思想)’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며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뇌리에 깊게 틀어박힌 건 이 점을 잘 드러내 준다. 이들은 고대 왜의 진구(神功) 황후가 ‘삼한을 정벌’한 다음부터 조선은 일본의 ‘조공국’이므로 과거처럼 종속관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침략 사상면에서 토요토미 시대로의 완전한 회귀를 의미했다. 근대 일본의 이 같은 조선 침탈은 역사적으로 한․일 간 오랜 전쟁 국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입증해 준 것이었다.

 

침구의 결정판, 한․일합방

 

역사는 단일 사건으로 종결성을 갖기 어렵다. 역사의 연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근대들어 왜구 침구의 결정판인 한․일합방에 주목하게 한다.

 

1909년 4월 10일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수상과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무대신은 한․일합방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하고 합방을 위한⟨제1호 방침서 및 시설 대강서⟩를 내놓는다. 이어 7월 6일 일본 각의는 한․일병합을 추진키 대한(對韓) 정책을 결정하고, 같은 날 일본 천황이 직접 승인한 재가를 얻는다. 일왕이 재가한 합방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병합에 관한 건

 

제1,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할 것. 한국을 병합하고 그것을 제국 판도의 일부로 하는 것은 반도에서 우리 실력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제국이 내외의 형세에 비추어 적당한 시기에 단연코 병합을 실행하고, 반도를 명실공히 우리 통치하에 두고, 한국과 제외국과의 조약 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은 제국 백년의 좋은 계책이다.

 

이와 함께 일제는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의 정책 목표인⟨대한(對韓) 시설 대강⟩을 만들고, 한국 병합의⟨대방침⟩을 확정하는 등 치밀하게 합병을 준비해 나갔다. 그런데 이때 고무라는 병합의 조칙에서 한국의 식민지 통치는 일본 헌법에 의하지 않고 천황 대권으로 행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침략의 정점에 일본 천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의 황실은 전혀 정권에 관계하지 않도록 하고, 황제는 완전 폐위되며, 그 일문(一門)은 도쿄에 이거(移居)시키도록 하고 있다. 때를 같이 해 친일 조직 일진회의 회장 이용구는 ‘정합방론(政合邦論)’을 내세우며 황실을 존치하는 가운데 구(舊)독일 같이 연방제를 이루자는 한․일연방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용구의 이 같은 생각은 고무라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무라가 구상한 것은 ‘한인(韓人)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끓어’ 버리기 위해 황실 숭상이라는 한민족 반일 운동의 정신적 기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즉 ‘합방’이 아니라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병합, 즉 한국의 완전한 ’폐멸(廢滅)’이었다. 즉 일진회식 합방론과 그 농도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친일파들의 주장이 배제된 것이다.

 

일본은 병합에 즈음해 내외 형세를 고려해 시기를 정했고, 병합 후 한국 통치 준비 여부를 고려하는 등 모든 면에서 치밀하게 합병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다 1910년 5월 30일 테라우치가 통감에 취임하면서 한국 병합 계획 추진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리하여 일본 각의는 4일 후인 6월 3일 ‘신영토(조선)’에 대해서 제국헌법은 시행하지만, 사실상 조선 통치의 근거는 헌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초헌법적 존재인 천황의 대권에 의한 것이라는 정책을 확정한다. 천황의 명을 직접 받아 조선을 통치한 자가 총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총독은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한 천황 직속으로 절대적 지위와 권한을 천황으로부터 받아 받아 ‘조선에서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 즉 천황-조선총독의 직결 명령과 보고라인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일제 강점기 행정권과 입법권을 조선총독이 병행해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병합에 즈음한 조서와 조선총독부관제 제3조를 통해 천황은 총독의 역할과 관계를 밝힘으로써 자신이 조선 침략의 최상부에 있음을 확인했다.

 

․ 짐은 특히 조선 총독을 두고, 그로 하여 짐의 명령을 받아 육해군을 통솔하고 제반의 정무를 통할

하도록 한다.

․ 총독은 천황에 직속하고 위임의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고 또한 조선 방비의 일을 관장한다.

총독은 제반의 정무를 통할하고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주를 하고 재가를 얻는다.

 

이제 남은 것은 병합 계획을 실행하는 방법론이었다. 이에 대해 가쓰라가 작성한〈한․일합병 처분안〉은 다음과 같이 메모하고 있다.

 

모든 준비를 하고, 그들로 하여금 병합의 필요성을 열망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을 최상으로 한다.

 

이런 계획 하에 합방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고쿠류카이(흑룡회)측에서 작성한 합방운동사인《한․일합방비사(韓日合邦秘史)》에 따르면, 1909년 10월 일본 정재계의 흑막의 실력자였던 스기야마 시게마루(衫山茂丸)는 가쓰라와 만나 합방청원서 제출의 내락을 얻고, 일진회를 통해 조선 병합의 총지휘관이었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와 도쿄에 있던 송병준이 작성한 ⟨한국 황제, 통감, 한국 수상에게 보내는 합방 건의서⟩를 가쓰라에게 보여준다. 이를 우치다는 이토 사살 사건 후인 11월 일진회 명의로〈합방 청원서〉를 재작성하고, 스기야마가 야마가타, 가쓰라, 테라우치에게 제출했다. 데라우치는 이에 대해 이완용(수상)이 합방 청원을 받아들여 황제에게 합방의 승인을 요구하고, 황제가 천황에게 합방을 제의한다는 식의 수순을 취하고자 했다. 다만 만약 그 수순이 맞지 않으면 통감 자신이 획책하는 것으로 했다. 이 건에 대해 초대(初代) 총독인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연극을 시종 나는 모르는 것으로 하며, 그들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다.

 

일본 정부는 청원서가 제출되기를 기다려 대처하며 또 ‘쟁투’ 발생하면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 각서를 스기야마에게 주었다. 한편 12월 1일 우치다가 지참한〈합방 상주 및 청원서〉를 받은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문언을 수정한 후에 4일〈일진회 성명서〉를《국민신문(國民新聞)》에 부록으로 발표함과 동시에〈합방 상주문〉,〈총리 이완용께 올리는 합방 청원서〉,〈통감께 올리는 합방 청원서〉등을 제출했다.

 

1910년 2월 2일 가쓰라는 스기야마를 불러 내훈을 내린다. 거기서 가쓰라는 일진회의 수년에 걸친 친일적 성의를 이해하고, 일진회의 청원을 수리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합방에 귀 기울이는 것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니 추후도 한국민이 끼어드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아 이후 합방을 위한 요리는 단독으로 진행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때로부터 이완용과 정적 관계로 합방의 방법을 제안하며 친일 행위를 경쟁적으로 벌였던 일진회는 ‘합방 구상’면에서 배제되고 일본의 정책 기조는 한국 내 반발을 의식해 규제로 변하게 된다. 이는 일말이나마 일제가 자신의 구상을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던 일진회로써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그 예로 병합 시기 및 방법도 일진회와 연계되어 추진된 게 아니었다. 물론 정책 노선 상에서 이들이 일제에 배신당했다고 해서 이들의 반민족성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1910년까지 34년간 친일을 위한 조직인 일진회 회원수의 놀라운 증가 추세이다. 1910년 일진회 회원수는 14만 175명으로 이는 일제가 합병을 위해 얼마나 조선 내부에 사상적 침투를 뿌리깊게 전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려 했던 불나방 같은 ‘부왜(附倭)’들이 얼마나 급속히 증가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합방은 이렇듯 치밀하게 조선 내부를 잠식해 들어온 결과였다.

 

병합 절차에 들어간 일본은 근대 국가인 한국을 소멸시켜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타 제국주의 국가들이 반대할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 타국의 한반도 간여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독식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므로 일본이 취한 정책은 이들 강대국과 적당한 선에서 상호 교차 이익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특히 러시아와 영국의 승인 없이는 한국 병합을 단행할 수 없어 러시아와는 1907년 7월 30일 조인된 러일〈제1차 협약〉에서 정한 바와 같이 만주를 남북으로 2등분하고 각자 이익 범위를 획정한 기조를 유지해 나갔다. 이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서로 맞붙은 적국이었지만, 상호 이익을 위해 야합도 불사하는 배반과 타협의 국제정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미국도 만주에 숟가락을 얹기는 마찬가지였다. 1909년까지 미국은 영국과 공동으로 청에 자금을 공여하며 철도를 부설하는 예비협정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다 먹게 된 만주에 미국이 일본과 러시아의 독점체제를 깨기 위해 ‘중립화’ 카드를 내밀며 끼어들자 일본과 러시아는 단합해 이를 거부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도 사실상 반대했다. 이는 일본이 만주에 여러 나라의 연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독식을 꾀하고자 한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만주 문제는 한국 병합과 동시에 병행되고 있었으므로 한국 병합의 사전 승인은 물론 실시 시기까지 러시아와 일본의 협약에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해 러시아는 반발했지만, 일본은 끝내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양보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이 ‘제2차 협약’에 일본의 한국 병합이 기재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은 러시아가 묵인한 것으로 판단했다.

 

1910년 7월과 8월 사이 일본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통상 항해 조약의 1년 후 폐기를 통고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한국이 병합된 후 영국 등과의 관세율 등 조선에서 외국인의 권리에 변동이 없어야 한다며 ‘일본 정부의 고려를 촉구’했다.

 

이것을 받은 고무라는 7월 17일 가토(대사)에게 가까운 시일 내 한국을 병합 할 것을 명한다. 내외적으로 병합이 본격 수순에 들어가자 그간 한국 내 반일 의병 투쟁을 진압하고자 전국 각처 요지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테라우치가 통감에 취임하기 전인 5월 24일부터 서울로 부대를 이동시키기 사작하여, 6월 7일에는 첫 부대가 서울 용산에 당도했다. 이 용산이 한반도 침략의 일본군 최고 사령본부가 들어서는 곳으로 해방 후 미군에 의해 인수되며 현재에까지 미군 기지로 쓰이고 있다. 일본군은 각각 1개 중대만 해당 지역에 남겨두고 함흥 주둔 일본군 보병 제32연대 제3대대, 청진의 제4연대 2중대·제32연대 제3대대, 삭령․개성 주둔 보병 제29연대 제1대대 등이 행군하여 용산에 집결했다. 이때 이들 2,626명의 일본군은 ‘폭도 토벌’을 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서울 인구가 23만명이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일본군대, 헌병, 경찰을 합해 4,000명이 23만명의 서울 시민을 통제하는 것으로 일인(日人) 1명당 57.5명을 견제한 것이었다. 이들은 합병에 따른 한국민의 저항이라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용산을 위수지로 정하고 계엄 태세를 펴며 왕성 외곽을 둘러싼 채 8월 합병시까지 철저히 계획에 만전을 기했다.

 

1910년 7월 15일 한국 병합을 위해 테라우치는 한국 황제 앞의 친서를 휴대한 채 신바시(新橋)를 출발했다. 앞서 병합 지체를 우려했던 천황은 도한(渡韓)하는 테라우치에게 “시모노세키(下關)으로부터 특별히 군함을 타고 도항할 것을 명”했다. 테라우치를 태운 군함 야쿠모(八雲)는 7월 23일 인천에 입항했다. 그로부터 그는 경인철도 특별차로 서울에 입경했다.

 

그런데 이때 천황은 테라우치에게 왜 시모노세키(下關)로부터 특별히 군함을 타고 도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일까? 이는 군함이라는 일본 근대 제국주의 무비(武備)를 과시하려는 의도와 신속한 이동이 목적이었지만, 다른 저의로는 그때로부터 312(318)년 전 임진왜란 시 조선의 이순신 전함에 의해 무참히 패배를 당한 채 철군해야만 했던 기억을 설욕키 위한 심리적·무위(武威)적 위안과 과시 측면에서였다. 더구나 조․일간 오랜 통상 창구였던 부산을 통해 내한(來韓)하지 않고 서해를 통해 인천으로 직접 들어온 것은 임란시 이순신에 의해 서해로 가는 항로가 차단되었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만회 의식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임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들이 도일(渡日)시 도착한 첫 일본 내지였던 시모노세키항에서 출발케 했다는 점에서 한반도 재침을 위한 매우 상징적인 명령이었던 것이다.

 

8월 13일 테라우치는 고무사 외무대신 앞으로 전보를 타전했다.

 

그전부터 내명을 받고 있는 시국의 해결은 내주부터 착수할 것이다. 별도의 장애가 없이 진행할 경우, 그 주말에는 모두 완료될 것이라는 의견이다.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수상)을 관저로 불러 병합의 승인을 요구하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각서를 수교하였다. 이때 이완용과 테라우치간에는 병합에 따른 국호와 왕칭 문제가 있었는데, 결국 일본 제국 정부는 한국의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고, 현 대한제국의 황제는 황제를 창덕궁 이왕전하로, 태황제를 덕수궁 태왕전하로, 황태자는 왕세자 전하로 격하시켜 버렸다. 한편 이완용이 병합을 재가한 것을 명기하는 전권 위임장이 교부된 것을 내외에 증거물로 제시하기 위해 일본은 전권 위임장에 대해 황제의 조칙 형식을 취하고,《관보(官報)》에 공시까지 했다.

 

테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때의 상황과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한국 합병의 조약을 통감관저에서 조인하여 마쳤다․․․ 합병 문제는 이와 같인 용이하게 조인을 끝냈다. 하하하”

 

한편 같은 날, 오전 10시 일본에서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안 및 관련 칙령안의 자문을 받은 추밀원 회의가 열렸고, 천황은 곧바로 재가를 했다.

 

8월 29일 한․일 양국《관보(官報)》에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은 공포되었고, 그날부터 효력이 발휘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

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 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

는 것에 승낙한다.

 

조약문에서 일본은 ‘합의적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이 병합을 신청해 와서 일본이 승낙한다는 식의 주객전도식 술수를 썼다.

 

한국 병합은 일본의 모략과 간계로 꾸며진 것으로 한국에 위압을 가해, 병합 조약을 체결한 것이지만, 여러 나라는 자국의 이익에 충실해 이것을 승인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처럼, 각국은 한반도와 만주라는 타작마당에 모인 개처럼 서로 간 뜯어먹을 먹이감에나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29일 조약문 공포를 신문으로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당시 일본 제2사단 사령부의 요시다 겐지로(吉田源治郞) 참모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날, 경성 및 용산에서는 한인은 게시판의 아래 군집해서 칙어와 기타를 열독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속삭이는 자가 있었지만, 대체로 평일과 다름 없었다. (그 후도) 여전히 평온해서 경비상 특별한 조치를 할 필요를 인정하지 못했다.

 

이것은 시민들이 냉정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가 연설, 집회 등을 금지하고 헌병과 순사가 15시간 마다 배치되어 두 사람이 서로 붙어서 이야기만 해도 경찰관의 심문을 받는 등 경비, 탄압 태세에 “조선인이 겁을 먹고, 숨을 죽이고 팔짱을 끼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을 계기로 일제 병탄의 결과 우리에게 채워진 35년간의 질긴 족쇄는 한반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혹한 왜구 침략사의 결정판을 이루는 것이었다. ‘근대 왜구’의 침범은 이처럼 한민족의 운명을 짓눌렀으며, 이에 맞서 일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항일투쟁은 국내외에서 광범위하며 지속적으로 벌어진다.

 

                                                                                *

여기까지가 고대로부터 근세까지 1149년간 이어지는 왜(倭)의 ‘신라정토 계획’, ‘대(對)고려 침공 계획’ ‘임진왜란’ 그리고 ‘강화도 조약에서 한․일합방까지’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의 전개방식이다. 실로 장구한 세월 동안 일본과 우리는 숙명적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반드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한․일 간 이 같은 국가적 전쟁이나 전쟁 상황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굵직굵직한 전란 차원에서나 진행된 것일까 하는 점이다. 즉, 평소에는 아무 징후 없다가 국가적 사태에 직면해서 갑자기 전란으로 나타난 것일까 하는 점이다. 실은 그렇지가 않다. 역사적으로 663년(전前 포함), 761년, 1274년(1281), 1592년, 1876(1910)년 등 각각의 주요 침략 사이에는 이 같은 전란 사태를 직·간접적으로 매개하는 ‘침구 사건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또 침구 형태도 시기와 조건에 따라 크거나 작게, 강하거나 약하게, 또는 중(重)하거나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침구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구’이다. 왜구 침구는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한반도를 침략하는 본무대에서 각 역사적 대막을 열어가고 이어가는 간막극과도 같은 것이었다. 앞서 꼽은 다섯 번의 국가적 전란 사태를 키워온 매개체이자 촉매제이며, 꺼지지 않는 침략의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한․일 간 끊임없는 불화(不和)와 비극을 불러오는 주역으로 왜구를 지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잦은 침구가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본의 침구 행위와 상호 관련성을 띠고 있고, 뒤얽혀 있으며, 심지어 상호 호응하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즉, ‘왜구’는 일본이란 국가에 의한 한반도 침탈의 연장선장에 있다. 이처럼 왜구 활동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지속시키는 연료이자, 침략을 위한 척후병과 선발대 같은 것이었다. 다른 비유로는, 침략을 불러오는 교두보내지 연결고리로써 계속 작용해 왔다.

 

오랜 왜구 침구사를 통해 한․일 간 현재와 미래사를 내다볼 수 있는 점에서 ‘왜구 문제’는 매우 중요하며 시급하기만 하다. 또한 오늘날에도 엄연히 전개되고 있는 한․일의 갈등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보아야만 한다. 일본과 왜구의 강한 연결고리는 ‘일본으로부터 침략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는다’는 두렷한 명제를 다시금 확증시켜 주고 있다.

 

일본의 책임 회피와 재침론

 

임진왜란 이후 조․일 간 국교가 재개된 지 338년이 지난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연합국에 직접 출두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이는 임란 이후 국교 재개 협상에서 일왕의 정치적 행위가 일체 배제내지 생략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일본의 패망과 침략의 중핵인 ‘천황’

 

1945년 9월 2일 토쿄만에 정박한 USS 미조리호 함상에서 연합군 수뇌부에게 정식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의 대표. 일본은 명치유신과 2차대전을 통해 일본 천황이 국가적 전란의 최상층부에 위치한 전범(戰犯)임을 국제적으로 명확히 드러내 주었다. 나아가 이 같은 일본의 침략성이 오랜 왜구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본 측으로서는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 재개 시 실권을 쥐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로 인해 ‘천황책임론’에 대해 어떤 필요성도, 의무도 느끼지도 않았고, 현실도 불가피했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이 임진왜란 당시의 고요제이(後陽成, 재위:1586~1611년) 일왕의 전쟁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일본 내 상황이 막부의 주장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손 치더라도 일왕이 직접 나서서 임란 전후 문제 처리 시 일본 국익에 위배되는 입장을 표명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주장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 재개는 일본 국가의 종전을 공식 대표하는 상징성이 크게 결여된 것이었다.

 

우리에게 2차 대전 전후의 상황은 임진왜란 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지 우리한데 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종결을 위한 협상 당사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임란 시기에는 조선을 제외한 채 조선 주둔 명장(明將)과 일본 간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식으로 나타났고, 2차 대전시에는 미국과 일본이 전후 처리의 당사자가 되었다. 우리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2차 대전 후에는 패전국인 일본의 국토가 분할된 게 아니라, 한반도가 양분되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역사의 반복성’이 여기에 있다.

 

임란 이후 한․일 관계는 크고 작은 대립 측면에서는 조선 초보다 현격히 줄어들었다. 군사적 갈등과 대립은 줄어들었지만, 임란 이후 오히려 왜는 사상적 면에서 더욱 발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학계는 조선왕조의 쇠망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잡음으로써 이런 부정적 시각을 한․일합방의 필연적 논리로 줄곧 활용해 왔다. 이 같은 논리는 오랜 왜구 전통을 계승한 ‘근대 왜구’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정한론(征韓論)’으로 급격히 점화된다. 이 같은 왜곡된 역사 인식은 일제 패망 후에도 일제에 의해 부식(扶植)된 한국과 일본 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식민사관의 큰 줄기를 이룬다. 2011년의 일본 침구 상황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한국사는 이 점에서 여전히 ‘대(對)왜구전’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임란 이후 전쟁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역사의 연속성을 통해 볼 때 임진왜란은 불확실한 종전의 모습을 띠고 있다. 17세기 이후 일본이 국교관계를 맺은 유일한 나라는 조선이었다. 그러나 양국 간 상호 신뢰를 위한 ‘통신(通信)’은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무색해 진다. 이는 한․일 양국이 추구하려 한 선린우호적 관계가 늘 일본측에 의해 비연속성과 파행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일 간 불화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늘 일본의 침략성에 기인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점에서 오늘날 ‘일본 재침 주시론(注視論)’은 오랜 왜침(倭侵)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임진왜란은 우리 근대사에서 벌어진 한․일합방과 한․일 간 전쟁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미래 역사 전개방식에도 주요 선례로 작용한다. 이 점에서 우리로서는 심대한 자기 회고와 반성이 뒤따라야만 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