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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지속가능 전쟁의 결정판: ‘임진왜란 7년 전쟁’

by 전경일 2012. 8. 13.

지속가능 전쟁의 결정판: ‘임진왜란 7년 전쟁’

 

1275년과 1281년의 ‘대(對)고려 침공 계획’이 무산되고 난지 311(317)년이 지난 1592년, 일본은 마침내 한반도에 대한 대대적 침략 전쟁을 개시한다. 이번에는 불발이 아니라 실질전쟁이자, 대대적인 국가 전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참상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미 전전(戰前) 몇 년간 일본은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전란 중 4년의 강화(講和) 기간을 포함하여 전쟁 상황이 7년간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초(超)장기전 양상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이것이다.

 

임진왜란은 앞서 계획했던 두 번의 대대적인 정벌 계획처럼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계획하고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오랜 왜의 한반도 ‘정토(征討)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한․일관계사의 매우 중요한 획을 긋는다. 따라서 조선이나 일본 모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전장(戰場)이 전적으로 한반도 내지·내해(內地·內海)로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조․일전쟁)은 7년을 참혹하고 지리하게 끌다가 마침내 몇 가지 이유로 전란의 불꽃이 사그러 들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413년 전, 기약 없이 지속될 것만 같던 이 전쟁이 종국에 이르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조선 수군이 해상에서 승리함으로써 왜의 보급망이 절단되고, 결정적으로 해상에서 왜군을 격퇴시킴으로써 수도 서울로 향하는 직항로가 차단되었던 점이다. 이순신 활약상에 힘입어 왜의 ‘전쟁으로써의 지속성’은 좌절되고, 뱀은 마침내 허리를 끊고 마침내 본국으로의 생로(生路)를 찾아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7년 전쟁을 종전에 이르게 한 가장 큰 힘이자, 참전 명국(明國)이 조선의 전쟁 수행 역할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 쾌승이었다. 또한 한반도 내에서 벌어진 전쟁을 통한 주요 국제정치적 ‘교류’였다는데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둘째, 명군(明軍)의 참전으로 국제전쟁으로 변모하며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를 통한 단계적 대륙침략 전략이 좌초된 점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국제적으로 확대된 전란이었다. 일본이 중국과 조선 모두에 동시적 위협을 가한 전쟁을 주도한 적은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항상 중국이 중심이 되었던 동아시아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중국 못지않은 강대국으로 일본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그 결과 전후 동아시아 세계에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탄생한다. 이는 훗날 청일전쟁으로 보다 ‘일본력(日本力)’이 가시화 되는 배경이 된다. 그럼에도 조명연합군의 왜군 퇴치는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이 어느 일방에 의한 타국의 완전하고 지속적인 점령·지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고히 보여 것이었다. 이는 훗날 일본의 조선 침탈이 35년 만에 끝나고 마는 것과 같다.

 

셋째, 전쟁 개전의 전범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으로 일본 내 전쟁 수행 동력이 급격히 상실된 점이다. 이는 일본 내 새로운 체제 변화를 가져오고 이로써 양국은 가능한 한 선린의 교류를 주요 선택지로 활용하게 된다.

 

이런 주요 요인이 작용해 전쟁 발발, 강화협상, 다시 재침으로 이어지는 7년간의 임진왜란-정유재란은 마침내 실질적 종전을 가져오게 된다.

 

이 전쟁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우선 일본의 침략 행위가 일본 내 소수 주전파(主戰波)들(근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나 오늘날 일본의 극우파들과 같은)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전쟁 수행 중 일본 내 내홍(內訌)과 전쟁성과에 대한 반발심 등이 작용하며 침략 주도세력이 급격히 소멸한 점이 전쟁 종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미래의 동아시아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일본 내 극우파들의 준동을 사전에 예방하고 무력화(無力化)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노회함의 극치: 일본식 임란 처리 방식

 

1598년 실질 전쟁은 끝났지만, 왜(倭)로서는 자국 내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닌 터라, 일본 영토 내(內)로 물러가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그 후 토요토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로부터 조선 정부는 종전 협상을 요청받고, 1607년 들어 조․일 간에는 포로 쇄환 등 양국간 산적한 문제를 풀기 위한 외교적 관계가 재개된다. 따라서 1607년까지는 ‘임진왜란 상태’가 종결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과 왜 간에는 실질적으로 전후 9년간이나 길고 긴 ‘준전시 상태’내지 ‘화의(和議)적 전쟁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그 같은 방증이 되는 것으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1604년까지 정체불명의 배가 종종 조선의 남해안에 출몰했다는 점, 둘째, 국교 재개가 왜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재침을 할 거라는 왜측의 협박, 셋째, 조선은 왜와 교섭 중 왜의 재침 의도를 항시 예의주시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임란 발발 이후 4년간 추진된 명(明)과 일본 간 강화협상 이후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1598년 말 왜의 패퇴가 ‘전쟁 상황의 완전한 종결’은 아니었다. 이처럼 7년 전쟁은 조선과 일본 간 국교가 재개된 1607년까지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국제법이 적용되기 어려운 시대임으로 왜군의 실질 패퇴는 전쟁 종결을 의미하고, 1607년 1월의 국교 재개가 종전(終戰)을 확증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조․일 양국이 국교 재개와 함께 확고부동하게 전쟁 억제 장치를 마련해 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예로 1605년 3월 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요청에 의해 탐적사(探賊使)로 국사(國使) 손문욱과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교토(京都)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도쿠가와와 조․일 강화(講和)에 대해 논하게 되는데, 이 회견을 기점으로 조․일 간 화의(和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이 화의를 두고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 종결에 대한 일본 측의 본심을 의심하기는 하였으나, ‘다시는 침략을 않겠다’는 ⟨도쿠가와의 서약⟩을 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종전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606년 11월 임진왜란에 참전한 바 있던 왜장(倭將)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를 통해 전달받은 도쿠가와의 국서는 일본 조정이나 막부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조․일강화를 바라는 대마도 측에서 임의 개작(改作)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 일본 막부는 외교적 문제를 대마도 측에 위임하기도 했고, 임의 개작 국서를 묵인하기는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작 문서를 ‘국가 간 공식 문서’로 공인(公認)하기에는 미흡한 면이 있다. 당시 막부는 천황을 대신해 실권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가 의지만 있었다면 국서에 ‘천황’ 명의를 빌렸을 여지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일본 조정(천황)이 국서에 직접 조인한 것은 아니다. 다만, 왜측의 공신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우리 측의 요구로 막부인 도쿠가와 정권이 ‘일본 국왕’이란 이름으로 강화교섭에 나선 것이었다.

 

이처럼 조․일 양국은 현실적 요구로 국교 정상화에 나섰지만,⟨도쿠가와의 서약⟩을 양측이 모두 진의(眞意)로 받아들였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사정은 이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일 양국은 강화에 나서 7년 전쟁으로 인한 양국 간 감정의 골을 풀고자 했고, 신의와 평등에 기초해 국교정상화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점은 한․일간 교류에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강화 재개로 국제전으로써 임진왜란도 막을 내린 듯 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정말 끝난 것일까? 다시 외교 재개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이들은 전후 처리를 위한 탐적사(探賊使)내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자격이었지 진정한 의미의 통신사(通信使)는 아니었다. 외교 재개에 따라 조선이 일본에 최초로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1636년 ‘병자통신사(丙子通信使)’가 처음이다. 이보다 시간을 앞당겨 1607년 조․일국교 재개 시점부터 따져보아도 사정은 별 차이 없다.

 

조선과 일본 간에는 불확실한 종전이 있었지만, 양국은 나름 과거 전례가 없는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펼쳐 나가며 선린 관계를 다지는 듯했다. 그러나 불완전한 평화는 1636년을 기준으로 볼 때 240년 뒤인 1876년에 벌어진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으로 끝내 재발된다. 또한 외교 재개 시점인 1607년을 기준으로 보아도 303년이 지난 1910년 들어 조선은 일제에 강제 합병 당하며 35년간 기나긴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강화도 조약에서 강제 합방까지 불과 34년이 걸린 셈이다. 이는 실로 한 나라를 완전히 집어삼키기에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근대 식민지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임란은 ‘불완전한 종전’이었다.

 

명(明)의 철군과 임진왜란의 국제 전쟁적 성격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명나라 황제 신종은 일찌감치 종전을 선언했다. 조선으로부터 임진왜란 중 ‘전시작전지휘권’을 양도받은 명이 조선을 대신해 임진왜란 실질 강화(講和) 협상자였다는 점에서 명으로서는 응당 국제관례상 권리행사 측면이 크다. 일본의 전쟁수행 동력이 대부분 상실되었다고 보는 1598년 11월 이후 2년이 지난 1600년 여름 명군(明軍)은 종전(終戰)에 상응해 파병군 2만4천명 중 1천~3천명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했다. 이는 임란이 왜의 발호로 인한 국제 전쟁이었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며, 왜로 인해 조선 강역에 이국(異國)의 군대가 파병되어 온 역사적 선례로 남게 된다. 임란시 중국은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뜻으로 ‘원조선(援朝鮮)’이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 후 바로 철수하였지만, 350년 뒤 한국 전쟁시 똑같이 '전시작전지휘권'을 인수한 미국은 전쟁 후에도 지속적으로 상주하며 한반도를 지금에도 극동기지로 사용하고 있어 두 역사적 시건의 상황 국면이 사뭇 대조되고 있다.

 

100년간 지속된 임란 후유증

조선은 7년간 전화 복구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피해가 얼마나 막심하였던지 전후 100년이 지난 17세기에 들어서야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털어내고 복원과 개혁을 두 축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국가재조(國家再造)’에 나설 수 있었다. 이는 2차대전시 일본이 패망하며 한반도에 유산으로 남기고 간 유일한 상속자인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후 피해 복구에 남북 공히 30년 이상(그 보다 더 일수도 있는) 시간이 소요되었고,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남북 갈등과 한반도 긴장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과 비교해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만큼 전쟁 복구에는 엄청난 시간, 비용, 노력이 투입되고, 사람들의 사고의 전환이 요구된다. 일본이 일으킨 2차 대전의 후과(後果)로 한반도 분단과 냉전이 이루어진 점을 고려할 때, 냉전적 사고로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은 누가 목표로 한 분단 국면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인지 역사를 통해 냉철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