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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4)

by 전경일 2009. 2. 3.
 [개혁에 대한 기득권층의 태생적 한계]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최만리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방법으로 오픈 O/S인 한글 발표를 반대한 것이 설령 아니라고 가정할지라도, 그 같은 반대론자에게「훈민정음」은 한자와 글자 모양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정말 글자 같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름대로 논리를 갖춘 지식 계급의 맹목성은 바로 그런 까닭에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사고의 배경이 ‘한자’의 범위내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작성해 백성에게 배포한 것에 대해서도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뒤에 오히려 충신ㆍ효자ㆍ열녀가 배출되지 않았다”며,“하필 언문으로 이를 옮긴 뒤에야 사람들이 이를 본받겠느냐”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논쟁은 세종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이 이처럼 궤변을 늘어놓자, 마침내 세종은 한글반대파 일원을 의금부에 하옥하는 조저를 취한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을 그 다음날 풀어 주게 된다. 세종은 왜 한글 반대파들을 곧바로 풀어주었을까? 세종은 이런 대역사에 잡음이 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논리와 음운학적 실력으로 맞서 그들 스스로 자기의 논리에 무너지도록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풀어줌으로써 CEO로서 자신의 위기 관리 능력과 인덕(仁德)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며, 동시에 중국의 견제에 대한 명분도 충분히 얻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잊지 않고 기억한다. 역사는 한글 탄생을 극렬 저지하려 했던 한글 반대파 멤버들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들고 있다.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길 바란다. 만일 그들이 세종과의 이 논쟁에서 이겼더라면, 「훈민정음」은 세상에 공포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외세(명나라)를 끌여들여 신생 조선을 물론 세종 정부의 붕괴를 가져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나 혁신 앞에서 기득권층의 저항은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직책과 이름은, 부제학 최만리ㆍ직제학 신석조ㆍ직전 김문ㆍ응교 정창손ㆍ부교리 하위지ㆍ부수찬 송처검ㆍ저작랑 조근 등이었다.


[무엇인가 혁신적인 일을 하려면 반드시 소신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세종은「훈민정음」사업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심지어 그는 내가 이 일을 못하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훈민정음」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나갔다. 자신감과 결단력이 없이는 결코 어떠한 성취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누구보다도「훈민정음」창제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료들의 집요한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추진해 나갔다. 심지어 그는 병이 나서 초수리 냉천에 갔을 때에도 「훈민정음」초고를 가지고 가서 쉽없이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초국가적 프로젝트에 자신이 특별히 육성한 비밀 TFT 요원들을 투입해 업무를 지시하고, 개발을 착실히 진행시켜 나갔던 것이다.


[CEO가 PM으로 참여하다 ]


세종은 요즘 식대로 하자면, 스스로 음운 학자이며 동시에「훈민정음」개발 프로젝트의 프로젝트 매니저(PM)였다. 세종의 리더십과 식견 그리고 결단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세종은 측근의 집현전 학사들을 용의주도하게 훈련시켰고, 이들을「훈민정음」창제 사업에 투입시켜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하였다. 정인지ㆍ신숙주ㆍ성삼문 등 당대의 천재들이 이 일에 간여 하였으며, 세종의 지시를 받아 성삼문ㆍ신숙주 등은 13번이나 요동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와야 했다.


(다음회에 이어서...)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