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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인재에 대한 철학을 창조의 원천으로 삼다

by 전경일 2012. 10. 9.

세종, 인재에 대한 철학을 창조의 원천으로 삼다

영혼이 있는 정치를 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세종시대의 정치적 담론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기에 국가경영상의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선 실천적 경영철학이 요구되고, 이를 실행할 창조적 정치 집단이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은 세종시대의 인재관은 출발한다.

세종이 태어난 시기는 1397년 4월 10일(음력)이었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명이 건국하고 28년이란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원(元)ㆍ명(明) 왕조 교체는 세계제국 원을 통해 조성된 국제화 무드의 시기에서 한족 중심의 명으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였다. 세계의 경영 패권이 바뀐 시점에 조선에서도 새로운 창업이념인 국가 경영철학이 실질 국가경영에 반영되며 꽃망울을 터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의 붕괴와 함께 인재들은 물처럼 세상 밖으로 스몄고, 다시 세상을 떠돌며 들끓었다. 인재들과 더불어 한 나라와 한 시대를 뛰어 넘는 경영을 하기 위해선 국왕의 정치철학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정치가 바로 잡는 것(政者正也)’이라면 그 주체는 국왕과 수많은 신료들이 목숨을 걸고 이뤄내야 할 몫이었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는 그에 맞는 정치철학이 필요했고, 세종은 이를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유교적 원리에 따라 내면에 체화시킨다. 혼을 담는 경영은 훗날 한글을 통해 그 원리를 담은 문자체계로 드러내는데, <<훈민정음>>이야말로 세종 정부의 정치 철학이 가장 잘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을 통해 세종은 한 시대와 나라를 이끌 철학적 기반인 ‘천지인[天(.)地(ㅡ)人(ㅣ)]’의 삼재(三才)를 녹여 붓는다. 이 세 개의 심볼은 하나로 뭉치며 유교의 모든 사상을 간명하게 드러내 준다. 삼재의 국가경영철학과 자음으로 대표되는 구강계(口腔系)의 발성 원리를 통합해 낸 전무후무한 문자의 착상은 마침내 우리만의 독특한 문자체계로 발전하며, 세종정부가 무엇을 이뤄내자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그 시대의 인재들이 무엇에 열광했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하겠다.

삼재(三才)는 무엇인가? 이는 하늘, 땅, 사람의 조화로운 경영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하늘에 겸손하고 국왕 스스로 솔선할 것을 주문한다. 그것이 곧 신민을 위한 것이다. 이를 부연 설명하자면, 국가 권력은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은 것이므로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에 가 닿는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民惟邦本)”이기에 국왕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고(代天而物)”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양육하는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爲民)”이다. 그러므로 국왕의 책무는 “오로지 애민(愛民)하는 것”이 된다. 경영철학이 이렇게 백성에 가 닿아 있기에 백성 가까이 있는 신료인 ‘근민지관(近民之官)’은 국왕을 대신해 백성 사랑에 온 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을 군림이 아닌 봉사로 이해한 세종은 이 같이 생생한 경영철학을 구현하는 실천자로 평생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국왕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인재들 또한 이 점에서 같았다.

 그런데 이 같은 경영철학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위정재인(爲政在人)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 즉 “일대의 정치가 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대의 영재(英才)가 있어야 한다(세종실록』 6년 7월 갑신)”는 세종의 생각과 인재관 내지 인재 육성은 궤를 같이하며, 신생조선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이를 요즘말로 풀이하면, 사람이 전부이자, 희망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기에 백성을 다스리고, 편안하게 하는 모든 정치활동을 위해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긴요한 과제였다. 세종정부를 이끌 인재는 바로 이 같은 국왕의 정치철학에 힘입어 대거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태종의 눈에 들은 세종은 무(武)에서 문(文)으로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기에 차기 지도자로서 가장 적임자였다. 창업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부채를 짊어 진 태종은 실행중심형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실행은 창조로 전환되며 세종과 같은 경영자상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즉 세종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힐 인물로 전환기의 CEO로 역사적으로 발탁되는 것이다. 이를 오늘날 기업경영에 비유하자면, 거함 GE가 과거 실행중심의 잭 웰치에서 창조 중심의 제프리 이멜다로 전환된 것과 유사하다. 태종이 차기 CEO를 급히 바꾼 것은 나이 어린 충령만 ‘택현(擇賢)’ 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미래상을 이끌 수 없다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현실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의 인재상으로 발탁된 이 스무 살의 젊은이는 주변의 핵심 측근들로부터 국가의 흥망(興亡), 군신(君臣)의 사정(邪正), 정교(政敎), 풍속(風俗), 외환(外患), 윤도(倫道) 등 유교적 철학에 입각한 OJT를 정치(精緻)하게 받은 한편, 그 자신 ‘택현(擇賢)’ 의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듯, 수많은 인재들을 불러 모은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바로 변계량이었다. 그는 요즘 말로 HR전문가로 역사 속에 잠자고 있던 ‘집현전(集賢殿)’을 현실 정치 세계로 다시 불러들인 사람이다. 인재의 요람이자, ‘현명한 자들을 모아 놓은 집’인 집현전은 이렇게 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며, 세종시대 최대의 싱크탱크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집현전’은 당나라 황제 현종 때(724년) 만들어진 황립학술기관의 이름이었다. ‘집현전’이라는 명칭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런 ‘집현전’이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인종대인 1136년부터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집현전’의 활동이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인재를 담아내는 지적 이너서클(inner circle)의 필요성 때문에 세종시대에 이르러 발굴되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 두루 밝았던 세종은 역사를 통해 ‘집현전(集賢殿)’이라는 이름을 찾아냈고, 역사로부터 이 싱크탱크를 스카웃해 자신의 가장 강력한 두뇌집단으로 활용한다. 고제(古制)와 고전(古典)에서 ‘죽었던 신화’를 끄집어 내 리메이크(remake) 하면서 지식경영의 산실로 만들어 낸 셈이다. 조선을 경영하는 모든 사상과 연구의 핵심 브레인 집단은 바로 이렇게 해서 출범하게 된다.

국가최고경영자가 될 무렵, 세종은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국왕의 책무는 무엇인가? 나는 조선의 비전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그에 따라 인재를 발굴하고, 팀웍을 강화하며, 정책을 발휘하는 등 방법상의 문제는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돼 종합 시너지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에 대한 우선순위로 세종은 현대경영이 요구하는 ‘학습솔루션’을 제시했다. 국왕이 직접 참석하는 최고경영자과정 혹은 학습 세미나나 임원회의와 같은 ‘경연(經筵)’은 그의 재임 기간 내내 개최되어 세종이 건강문제로 이를 중단 할 때까지 무려 1,898회나 열린다. 경연을 행한 횟수가 태조 때에는 7회, 정종 때에는 30회, 태종 때가 12회였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세종이 얼마나 강력한 지식 정부의 성립을 추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종은 스스로 제시한 학습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꾸준히 경연에 참석했는데, 이를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임금으로 즉위해서는, 이른 새벽에 옷을 입고 날이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살피고, 그 다음에 윤대하고, 그 다음에 경연에 나갔는데, 일찍부터 조금도 해이감이 없었다.(세종실록』 32년 2월 17일)”

학습은 국가경영을 위해 『성리대전』『자치통감』 『사기』『한서』등 경(經)이나 사(史)를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국가경영에는 보다 고차원적인 학습수준이 요구돼 하나의 전공에 ‘전경지학(專經之學),’ 즉 한 가지 경(經)이나 사(史)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정통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질 때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이 주어졌고, 학습은 철저한 일정관리를 통해 매일 매일 각자가 읽고 연구한 범위는 장부에 기록돼 매월 말에 보고해야만 했다. 임직원을 대상으로 학습 관리 시스템을 왕성하게 가동했던 것이다.

 신생 조선의 업-그래이드 플랜에는 경(經)이나 사(史)만이 요구된 게 아니었다. 대풍평(大豊平)의 세상을 여는 데에는 다방면에 걸친 지식이 필요했다. 따라서 변계량을 통해 기획해 낸 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였다. 이는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한다’는 뜻으로 집현전 학사들 중 몇 몇 젊은 학사들에게 근무를 면제하고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한다는 안식년제와 같은 제도였다. 처음으로 수혜을 입은 신하는 집현전 학사인 권채ㆍ신석견ㆍ남수문 이었고, 변계량이 이들을 추천해 올리자, 세종은 그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너희 젊은이들은 장래가 있으므로 지금부터 그 이름을 지우고 각기 집에서 전심 독서하게 하라(세종실록』8년 12월 11일)”

 말인즉, 장래에 크게 쓰이도록 자기 역량을 더욱 강화해 복귀하라는 지시였다. 이 같은 사가독서는 단순히 일 잘하는 사람들에게만 포상으로 주어지는 자기 공부를 위한 연수과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에서 키울만한 젊은 인재들에게 투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택된 사람들만 받는 독서 휴가였고, 학습 성과는 철저하게 관리된다. 이는 신하들을 일상에서 벗어나겠금 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성장의 해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시도였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들이 특정 영역에서 전문성을 확보하고 나면, 그것을 교육을 통해 전달하고, 이를 지식 경영의 무기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세종이 보기에 이것은 필시 전파교육의 성공 사례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사들 중에 후일 사가독서의 수혜자로 최항ㆍ신숙주ㆍ 이석형ㆍ하위지ㆍ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 등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는 그들의 후학으로, 서거정ㆍ김수온ㆍ강희맹ㆍ이승소ㆍ성임 등도 대상자가 된다. 이들 모두 앞날이 창창한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었다. 세종은 ‘경영=인재 관리’라고 생각했고, 이렇게 재단련된 인재들과 더불어 국가 비전 성취를 위한 경영에 나선다.

발탁된 인재들은 세종시대 창조경영을 이끌 매우 잠재력이 큰 ‘HPI(High Potential Individual)’로써 반드시 육성해야 할 ‘핵심인재’들이었다. 그들을 잘 육성한다면 신생조선은 국가경영의 곳곳에서 크게 쓰이게 될 멀티형 인재들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기에 이들 인재들에게 요구된 학문은 창조의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의 전 분야, 즉 역사ㆍ지리ㆍ도덕ㆍ예의ㆍ천문ㆍ의학ㆍ운학ㆍ종교ㆍ농사ㆍ음악ㆍ문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문성을 쌓는 것이었다. 이는 세종 자신이 조선의 르네상스를 함께 이끌어 나갈 인재상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잘 방증한다. 그리하여 그 시대 국가경영자의 창조적 역량이 발휘돼 이루어진 지식대혁명은 언필칭 크로스 오버형 인재상을 대거 키워 내며, 세종과 더불어 앞선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세종은 자신의 비전을 실천해 줄 실무진을 강화하기 위해 뛰어난 인재 양성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한다. 사가독서와 달리, 신숙주, 성삼문 등은 잦은 해외출장을 다녀오게 되고, 장영실 등은 중국 유학의 기회를 갖게 된다. 세종은 그들을 파견하는 것이 과학혁명을 일신하는 연구개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은 이 같은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세종 3년,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內監)으로 불러서 선기옥형(璇璣玉衡) 제도를 논란 강구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장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들을 중국에 보낼 때에는 예부에 공문을 보내서 역산학과 각종 천문 서책들을 무역하고 보루각,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식(圖式)을 견양(見樣)하여 가져오게 하라.’하고 은냥(銀兩)과 물산(物産)을 많이 주었다.”

 이 같은 세종의 인재육성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지원으로 신생 조선에는 진정 뛰어난 인재들이 대거 포진하며, ‘인재들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세종은 새로운 시대의 문명을 만들어 내는데 준비되고, 성공한 국왕이 되는 것이다. 이 시기 세종과 더불어 창조시대를 열어 나간 천재들, 예컨대, 장영실, 정초, 이천, 남급, 신숙주, 박연 등은 다방면에 걸친 학습으로 국가 경영상의 전 분야에 걸친 지식을 두루 섭렵하며 대표적인 통섭형 인재로 성장해 간다.

 세종의 인재에 대한 사랑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그는 백성을 애민(愛民)하듯, 말단 신하들까지 예를 갖추어 대하였다(지장』) . 또한 인재들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집현전에 소속된 학자에 대해서도 극진히 대했다. 용재총화』는 집현전 학사들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함으로 “내관으로 하여금 손님을 대하듯 하게 하였으니, 그 우대하는 뜻이 지극했다.”고 전할 정도다. 필원잡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이 인재를 기르는 데 탁월한 안목이 있었으니, 그 어느 임금보다도 높고 빼어났다. 집현전 선비들은 번갈아 숙직하였는데, 그들을 아끼고 대접함이 융숭하였으니, 모두 영주(필자 주: 신선이 사는 곳.)에 오른 것처럼 하였다. 어느 날,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는데, 어린 내시에게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를 엿보게 하였다. 바야흐로 신숙주가 촛불을 켜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내시가 돌아와 아뢰기를 ‘말씀대로 서너 번이나 가서 보아도 글 읽기를 끝내지 않다가 닭이 울자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돈피 갖옷을 벗어 그가 잠이 들 때를 기다려 그 위에 덮어주게 하였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서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선비들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국왕이 인재를 사랑하고 극진히 여기자 세종 정부의 신하들은 자발적으로 내면에서부터 하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국왕이 된지 3년차인 1420년에 이 24살의 청년 CEO 는 신하들에게 조선의 비전을 프리젠테이션 하며 집현전을 만들어 내고, 그들이 해야 할 미션과 오블리게이션 및 보상체계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직 운영에 대한 지침을 발표한다. 젊은 피를 찾는 국왕과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갈 당찬 포부에 찬 인재들과의 만남은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유독 세종 시대에 이토록 많은 인재들이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종 자신의 탁월한 안목과 인재 중심의 인사 정책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탁월한 인물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기량을 이끌어 낼 줄 알았다. 제안과 천거제도는 장영실과 같은 IT분야의 숨은 보석은 물론, 박연과 같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음재(音才)’를 얻게 한 배경이 된다. 오죽했으면 세종은 박연과 장영실이 자신과 “같은 시대에 함께 태어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했을 정도였을까. ‘인재 얻는 즐거움’ 은 인재들이 지닌 국왕에 대한 ‘흠모의 정’과 더불어 한 시대의 창조적 역량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다. ‘특별 관리 대상’이 된 인재들에게는 두뇌집단의 핵심 과제가 부여되었고, 그들은 여러 프로젝트를 옮겨 다니며 두루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해당분야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였으면서도, 동시에 국가 경영전반에 있어 CEO를 보좌하기 위해 광범위한 지식과 경험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제너널리스트(generalist)이기도 했다.

 세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인재성’을 찾아내고자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내려 가는 수령들을 직접 면대했다. 자신을 대신해서 백성을 만나는 접점인 수령 중에 다시 가까이 불러들일 만한 귀중한 보석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인재관으로 세종은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인재를 가장 크게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재를 씀에 있어서도 능력주의에 근거해 철저하게 열린 인사 정책과 개방정책을 활용했다. 신분을 뛰어 넘어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인재로 장영실, 박연은 물론이고, 『농사직설』을 집필해 조선 농업의 생산성 증대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정초와, 6진을 개척한 김종서, 그리고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등이 발굴된다. 인재들은 마치 세종이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솟아났다.

원래 부산 동래현 관노였다가 세종정부에 특채로 들어 가 파격적 대우로 종6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된 장영실은 중국 유학의 기회를 가지며, 15세기 당시 세계에서 최첨단인 초정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측우기, 해시계, 대소간의대 및 기타 기계건축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뤄낸다. 또한 작곡 및 음악이론 정립, 그리고 악기 개발에 제작에 까지 간여한 당대 최고의 음재(音才) 박연, 악학제조(樂學提調)을 통해 음악이론 분야를 세운 맹사성, 200여 가지나 되는 악기를 제작한 악기제작 전문가 정양, 남급, 오늘날의 천문대 관장격인 윤사웅, 천문학자 이무림,정영국, 조선 최고의 수학자 이순지 등 수많은 인재들이 이렇게 중앙 무대에 진출한다.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배치한다’는 용인과 합당한 보상체계로 인재들은 모여들었고, 자라났으며, 아낌없이 자기 능력을 드러냈다. 나아가 재능에 맞는 보직배치와 경력관리를 통해 세종은 최고의 인력관리방법을 구현했다.

 어느 시대든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재는 끌어 올리지 않으면 땅속으로 스미는 물과 같다. ‘샘이 깊은 물’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세종이 실시한 집현전 운영이나, 임용시험제도, 특별 발굴ㆍ추천제도, 상시 면접제 등은 인재 발굴의 주요방법이 된다. 거기다가 혁신적인 인재 등용 책은 신생 조선이 짧은 시간 내 국가경영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주마가편(走馬加鞭)이 됐다. 세종은 스스로 이런 ‘인재 풀’의 일원이 되어 함께 땀을 적셨다. 국왕의 이 같은 모범적인 실천에 신하들은 사명감으로 불타올랐고, 세종은 인재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지식으로 두뇌강국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국가 경영의 전 영역에 걸쳐 고르게 나타났다.

 세종이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치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지도력과 결단력에 의한 것이지만, 철학 있는 정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철학은 천지인이 화합하며 상호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참정치의 표본이 된다. 모든 사고의 틀을 혁신시키며, 새로운 조선의 비전을 공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취임 년도부터 마지막 재임 년도까지 시종 “초야에 은거한 사람들 가운데 재주와 도(道)가 높은 자를 찾아 보고하라”는 지시는 그의 인재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국왕 앞에서 인재들은 허망하게 땅으로 스며들지 않았고, 대지를 적시며 한 시대를 넘어 영원한 경영의 전범으로 세종과 함께 남았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인재 중심의 사고로 철저히 무장하고, 이를 실천한 몇 안 되는 국가경영자였다. 『연려실기술』에는 인재에 대한 지극 정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등장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임금이 때때로 혼자 친히 첨성대에 임하여 윤사웅에게 명하여 천도(天度)를 논하다가 술을 내려주고 파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천문관의 근로와 수고를 오늘날 목견(目見)하니 천문관에게 벼슬을 설치하여 직책을 맡기는 것은 본의가 진실로 헛되고 경한 것이 아니다.’하고 윤사웅에게 벼슬을 높여 남양(南陽)을 제수하였다... [이를 두고]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변변치 못한 벼슬아치들에게 하루 동안에 특명으로 네 큰 고을 수령의 책임을 제수하오니, 듣는 사람 중에 놀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연일 두 번씩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고 대답하기를, ‘내 덕 없는 사람으로 참람히 임금의 자리에 올라 삼가고 부지런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늘의 꾸지람이 내렸는데, 오직 이 무리들만이 여러 날 밤낮으로 몸에서 띠를 풀지 못하고, 눈을 붙이지 못하면서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였다. 혹시 이 무리들이 아니었다면 내 결코 하늘의 천상(天象)에 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들이 편안히 앉아 잘 먹는 것에 비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방해하지 말고 빨리 이들을 부임케 하라.’고 상의언에 명하여 각각 갖옷 한 벌식을 2년마다 새로 만들어 주게 하고, 내의원에서 날마다 술 5병씩 주게 하였다.”

 깊고 융숭한 인덕(仁德)에 더해 인재에 대한 혜안까지 갖춘 국가경영자 앞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던지지 않을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신하들의 마음속에는 CEO 세종이 살아 숨쉬며, 혼을 다한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시대의 창조는 마침내 꽃을 피웠고, 후세의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철학 있는 경영은 뭇 영혼들을 흔들어 깨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창조의 CEO 세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