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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서희, 협상의 원칙을 밝히다

by 전경일 2012. 10. 18.

서희, 협상의 원칙을 밝히다

 

21세기 기업경영은 협상 위에 존립한다. 기업간 사업제휴, 노사간 임금협상, 정부규제에 대한 대응, 각종 비즈니스 의사결정을 위한 상호 설득의 과정, 이 모든 것들이 협상과 직결되어 있다. 기업 경영은 협상으로부터 시작되고 협상의 실행과 함께 사업이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협상의 원칙만 잘 알고 지켜도 기업은 위기조차 기회로 전환해 낼 수 있다.

 

우리 역사상 협상의 가장 모범적인 선례가 있다. 바로 서희와 거란 장군 소손녕 간의 강동 6주를 둘러싸고 벌어진 협상이 바로 그것이다. 혀 하나로 전란을 피하고, 국토를 회복한 서희의 협상 전략은 오늘날 기업 경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기 938년 요(遼)나라로 이름을 바꾼 거란은 중원을 장악할 야망을 가지고 송을 압박하며 다른 한편 그 후미가 되는 고려를 위협해 왔다. 고려는 송과 거란의 대치상태에서 송과 국교를 맺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의 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제정치를 대하는 경직성이 빚어낸 위기의 결과였다. 마침내 993년(성종 12) 거란은 고려를 침입해 왔다. 그 수장은 거란 장수 소손녕이었다. 그는 고려 조정에 공문을 보내어 알렸다. “80만의 군사가 도착했으니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고려로써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목전에 닥친 것이다.

 

거란이 침입했다는 소식에 고려의 성종은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해 막게 했다. 소손녕의 압박에 고려 조정은 크게 두 가지 여론으로 나뉘었다. 거란의 요구대로 항복을 하자는 투항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화의를 청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그것이다. 여론은 할지론으로 기울었다. 이때 서희가 나섰다. 그는 거란이 고려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군사를 동원했다면, 치고 내려오기부터 할 것인데 항복하라고 종용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뭔가 협상할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서희는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며,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때 가서 다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고려 조정이 이런 논의에 빠져 회답이 늦어지자 소손녕은 다시 남하해 청천강 이남의 안융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때 대도수(大道秀)와 유방(庾方)이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에 소손녕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재차 항복을 독촉하기만 했다. 제2차 회담이 벌어졌다. 하지만, 소손녕은 고려에서 보낸 합문사 장영(張塋)보다 직급이 높은 대신을 보내라고 호통을 쳐댔다.

 

이때 서희가 자원했다. 그와 소손녕간의 역사적인 제3차 회담은 이로써 시작된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의 영문으로 갔으나 소손녕은 기세를 잡기 위해 절을 하라고 억지를 부렸다. 첫 샅바 싸움에서 밀리면 모든 면에서 밀릴 가능성이 컸다. 서희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공식 협상 대표자는 서로 대등하게 만나는 예식 절차를 수락함으로써 협상에 들어갔다. 고려로서는 우선,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은 것이다.

 

소손녕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한 논리를 폈으나, 서희는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을 간파했다. 소손녕의 정벌의 본래 목적이 송과 손을 잡고 있는 고려를 거란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에 서희는 거란과 통교를 하지 못하는 이유를 조목 조목 밝혔다.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즉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이 양국 간의 교통로를 막아서 통행이 어려운 까닭에 양국간 통교가 어려우니 이 지역의 여진족들을 축출해 내고 고려의 지배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설득은 먹혔다. 이러한 서희의 논리 정연한 설득에 마침내 거란은 군대를 철수하였고, 고려는 강동 6주의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소손녕에게도 득이 있었다. 당초 정벌의 위압을 가한 목적이 고려와 송의 통교를 막는 것이었기에 그는 싸우지 않고도 목적을 이룬 것이다.

 

협상의 주요 원칙은 위기를 위기로만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일방적으로 수세에만 놓여 있는 경우란 없다. 특히 비즈니스에서 이루어지는 ‘갑을’ 관계는 더하다. 상대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된 것은 달리 말하면, 이 편에서 얻어야만 할 무엇이 있다는 시호다. 그런 상대에게도 피치 못할 아킬레스건은 있다. 상대의 힘을 오히려 유도 기술처럼 역이용해 쓰러뜨릴 줄 아는 기업만이 역경의 순간을 기회로 전환해 낼 수 있다. 물론 이때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 상대도 이 협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어갈 수 있게 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협상은 윈윈을 전제조건으로 한 치열한 상호 설득의 과정인 셈이다. 기업 경영이 날로 글로벌화 되어가고 있다. 기업은 고객불만, 정부규제, 시민단체와 환경단체 등 다양한 이해집단의 요구와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협상하고자 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자칫 곪아가는 상처를 방기해 두었다가는 위기는 기회로 전환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더 큰 위기를 증폭해 낼 수 있다. 서희의 협상에서 배우는 교훈이 먹혀들어가는 대목이다.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