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요동에는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유배와 있었다. 그는 티베트 문자 계통인 파스파 문자에 대해 음운학적 조예가 깊었던 학자였다. 알다시피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몽고)의 원세조는 1269년 티베트의 고승 파스파로 하여금 범어 계통의 음소문자인 위구르 문자를 바탕으로 음절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공문서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이 문자를 개발한 목적은 여러 민족들이 쓰는 다양한 문자를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세종이「훈민정음」을 창제하기 150년 전의 일이다. 세종은 이를 연구시켜「훈민정음」개발에 벤치마킹 사례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파스파 문자와 「훈민정음」은 음소문자로서 음절 단위로 표기하는 점, 아래로 내려 쓰는 점 등에서 유사점을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 무렵 세종은 황찬에게서 음운학을 배우게 할 목적으로「훈민정음」 TFT의 요원이었던 성삼문과 신숙주 등을 파견했다. 이 때 신숙주는 집현전 부수찬으로 있었고, 성삼문은 성균관 주부로 있었다. 또 통역은 행사용(行司勇)으로 있던 손수산(孫壽山)이 하였다.
세종이 한 나라의 CEO로서 충분히 경영 수업을 쌓았고, 고금을 넘나드는 역사를 공부하였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세종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바로 이같은 문자 창제의 선례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세종에게 소강절의 『황극경세서』는 주목할만한 이론서였다. 이 책은 “풍토가 다르면 그곳에 사는 인간의 발음도 달라지니, 정성(正聲)과 정음(正音)이 있어야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다(正聲正音唱和圖)”고 주장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음(正音)’은 그야말로 세종에게 왕도 정치를 펴는 또 하나의 방안을 제시해 주었을 것이다. 이 책과 더불어 태조 8년에 전래된 명나라의 『홍무정운』은 세종으로 하여금 조선의 음운 체계를 바로 잡으려는 의지를 갖게 한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매우 시의 적절했으며, 그 시대의 강렬한 요청 따른 것이었다.
[독자 문자에 대한 세종의 열의는 지대했다]
세종은 한자음을 바로잡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도 이틀에 한 번씩은 중국어 공부를 별도로 할 정도였다. 세종은 16년에 이변ㆍ김하 등을 요동에 보내 그곳 학자들에게 건국 초기부터 중국어 교과서로 쓰이던 『직해소학(直解小學)』의 발음을 물어 보게 했다. 또 세종 20년 3월에는 김하로 하여금 세자에게 사흘에 한번씩 중국어를 가르치게도 했다. 그리고「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뒤인 세종 26년에는 『홍무정운』을 「훈민정음」으로 음을 단 『홍무정운훈의』를 편찬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세종의 우리 백성들에 맞는 독자적인 문자에 대한 의욕은 더욱 강렬하게 타올라 마침내 이러한 열정은「훈민정음」 창제의 연료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훈민정음」이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표기할 수 있는 문자로 창제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최만리 등은 이두만을 가지고도 불편없다고 강변했지만, 그것으로는 일반 백성의 언어 생활이 원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자는 소수만이 아는 문자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표기수단이 없었다. 이것이 세종으로 하여금 명분과 실리를 잘 조화하여 우리의 문자를 만들게 한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역사적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무렵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작업에는 8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였는데, 이처럼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 그 해설서까지 펴낸 것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세종28년 9월 정인지가 지은 서문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저 동방에 나라가 생기고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문물을 창조하고 사업을 성취시켜 주시는 큰 슬기는 오늘을 기다렸다!”
[훈민정음 창제는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하라]
「훈민정음」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개발 완료 시점까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한 명분으로 관료들의 존명 사대를 역으로 이용해, 존명사대를 위해서라도 중국어 학습이나 한자음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용의주도하게 그들의 저항을 피해 나가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세종은 비밀 TFT를 가동해 은밀히「훈민정음」개발을 추진했다. 세종은 지극히 현명하면서도, 능란한 전략 운용을 취했던 것이다.
(다음회에 이어서...)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