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말을 한자로 적다가 조선에 이르면 이두(吏讀)나 향찰(鄕札)마저도 보조적 수단으로 전락하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다보니 한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으로 우리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말이 아니어서 우리의 생각을 우리 식대로 올곧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때 글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아무나 글을 알아서도, 써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고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뭇 사람들과 달리 대단히 신비한 신적(神的) 존재로 인식될 만하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문맹은 더욱 극심해져 갔다. 그것이 세종이 국가 CEO가 되면서 맞닥드린 현실이었다.
[겨레의 얼을 담아라]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어 우리말을 나타내 보려던 그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제 방법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한자를 그대로 쓰거나(중국문자를 그대로 쓰는 것), 한자를 빌어다 다소 변형해서 쓰거나(이두나 일본어가 이에 해당됨), 완전히 새로운 문자를 창안해 내는 것이었다.
어떤 방식을 취할 것인가?
신생 조선의 CEO이며, 천재적 학자였던 세종은 여기서 세 번째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그는 최상의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도록 오랜 시간 이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이러한 선택은 지극히 옳았으며, 그가 한 민족의 아버지로써 억만년 이어지는 커뮤니케이션 O/S를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더욱 무한한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결정이었다. 이로써 우리의 기록 문화는 새로운 시발점을 찾게 되었고, 우리의 생각과 정신은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국가적 어려움에 처해서도 가장 오랜 기간,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O/S를 가진 매우 독특하며,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민족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지극히 슬기로운 CEO가 전체 백성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고체계를 영구히 경영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지속적으로 창조해 내는 인프라를 갖추게 했던 것이다.
[문자는 역사를 이어 가는 시스템이다]
세종은「훈민정음」을 만들 때, 그것이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용자 편의성은 잘 알다시피「훈민정음」서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문자 형태도 연관성이나 상징성을 부여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우리 민족만의 특정한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그리고 언어적 습관과 그 가치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언어적 습관에서 ‘문자화’를 위한 핵심 포인트들을 찾아냈다. 세종과 백성간의 이렇듯 공유된 동질감은 「훈민정음」창제 아이디어에 그대로 반영 됐다. 더구나 당시 조선의 경영 이념이었던 유학은 문자 개발의 철학적 모태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아이디어를 문자화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유저 프랜들리(user friendly)한 컨셉을 잡아라]
세종은 일반 백성들의 현상태를 파악해 그들에게 친숙하다고 생각되는 컨셉을 잡아내기로 했다. 물론「훈민정음」창제 원리는 당시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지만, 만일 당시의 백성들이 다른 방식의 상징에 익숙해 있었다면, 세종은 ‘한글’의 모양을 현재와 다르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세종은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훈민정음」을 지극히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기하학적인 부호로 구성해 냈다. 수세기에 걸쳐 한글은 붓이라는 필기 수단에 맞추기 위해 모양이 변하였다. 그러나 처음 고안된 상태의 한글은 한자의 부드럽고 흐르는 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표음문자와 한자의 문자상의 조형성을 고려해 기하학적인 새로운 문자가 탄생하기까지 문자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세종의 고민은 실로 깊고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종은 이 과업을 이루어 냈다. 이는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려는 세종의 ‘친친(親親)경영’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다음회에 이어서...)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