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경영/조선관리 먹거리 혁명 리더십 | Posted by 전경일소장 전경일 2013. 1. 15. 15:39

‘먹거리’ 혁명의 시작

‘먹거리’ 혁명의 시작

 

고구마가 조선에 보다 일찍 소개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누구도 명약관화하게 일반 백성들의 식생활에 깊은 관심과 안목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고구마가 좀 더 일찍 보급되었더라면 적어도 50여년간 조선의 식량, 구휼 문제는 크게 달라졌을 수 있고 수많은 인명을 기아로부터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조엄 이전 통신사에 속한 모든 관료들은 목민관으로서의 사명감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혹은 국가적 외교 현안에만 빠져 다양한 기회를 접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린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 유독 조엄만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아마도 1731년(영조 7)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 온 아버지 조상경(趙尙綱)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한다. 지금 처해 있는 문제의 해법을 밖의 흐름을 눈여겨봄으로써 해결하고자 한 안목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왔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조엄의 지방관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조엄이 부산으로 고구마를 전한 것은 그의 경력과 관련 있다. 그는 1757년(영조 33) 동래부사, 1758년(영조 34)에는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바 있다. 따라서 부산경남 해안지방의 토양이 대마도와 비슷해 고구마 재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다시피 고구마는 우리나라 남부 도서지방이나 해안지방의 토양에 잘 맞는다. 노는 땅이나 야산에도 쉽게 재배된다. 한번 심으면 수확량이 좋을 뿐만 아니라 장기보관도 가능하다. 모든 면에서 최적의 구황작물이었다.

 

조엄은 자신의 사행록 ⟪해사일기⟫를 통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구해 보내게 된 사연을 이렇게 풀어내고 있다.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부른다. 왜음(倭音)으로 고귀마(古貴麻)라 하는 이것은 생김새가 산약(山藥)도 같고 청근(菁根)과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그 잎은 산약 잎사귀 비슷하면서 그보다는 조금 크고 두터우며, 조금 붉은 색을 띠었다. 넝쿨 역시 산약 넝쿨만 한데, 그 맛은 산약에 비해 조금 강하고, 실로 진기가 있으며 반쯤 구운 밤 맛과도 같다.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반청(拌淸)하여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거나 간에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가히 흉년을 지낼 재료로서 좋을 듯하다.

 

들으니 난징에서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의 육지와 여러 섬들에 많이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대)마도가 더욱 성하다고 한다. 그 심는 법은 봄에 양지 바른 곳에 심었다가 넝쿨이 땅위에 올라와 조금 자라거든 넝쿨의 한두 마디를 잘라 땅에 붙여 흙을 덮어주면 그 묻힌 곳에서 알을 안게 되는데, 알의 크기는 그 토질의 맞고 안 맞음에 달렸다. 잎이 떨어지고 가을이 깊어지면 그 뿌리를 캐서 구덩이를 조금 깊이 파고 감저를 한층 펴고 흙을 두어치 덮고 다시 감저를 한층 펴고, 또 흙을 덮어 다지고, 이렇게 하기를 5~6층 한 뒤에 짚을 두텁게 쌓아 그 위에 덮어 비바람을 막아 주면 썩지 않는다. 또 봄이 되면 다시 위와 같이 심는다고 한다.

 

지난해(1763) 사스우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감저[고구마]를 보고 구해서 부산진으로 보내어 취종(取種)하게 했는데, 귀로인 지금 또 이것을 구해 장차 동래 교리배(校吏輩)들에게 줄 예정이다. 일행 중에서도 그것을 얻은 자가 있으니 이것들을 과연 다 살려서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리기를 문익점이 목면 퍼뜨리듯 한다면 어찌 우리 백성에게 큰 도움이 아니겠는가. 또 동래(東萊)에 심은 것이 만약 넝쿨이 잘 뻗는다면 제주 및 다른 섬에 재배함이 마땅할 듯하다. 들으니 제주의 토성(土性)이 (대)마도와 많이 닮은듯하다고 하니 그 감저가 과연 잘 번성한다면 제주도민이 해마다 손을 벌리는 것과 나창(羅倉)의 배를 띄워 곡식을 운반하는 폐단을 거의 제거할 수 있겠다. 다만 토질의 적성(適性)이 아직 확실치 못하고 토산(土産)이 다 다르니 과연 그 번식이 여하할지를 어찌 기필(記筆)하겠는가.

 

조엄의 언급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 우선, 구체적으로 재배법과 저장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볼 때 성공적인 확산을 위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사행 중 일본에서 육종서를 보았거나, 왜인들에게 재배법을 상세히 물어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귀로에 종자를 다시 더 구해서 동래부의 하급관리들[교리배]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였고, 조엄 외에도 일행 중에 얻어가는 자가 있었다는 점은 본격적으로 재배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뜻한다. 초기 도입 시 파급력이 큰 사회 중간계층들을 통해 확산력을 강화시켜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문익점이 목면 퍼뜨리듯’ 보급하고자 했다. 이는 조엄이 목표로 한 바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으로, 전국 확산이라는 야심찬 구상의 발로였다. 그가 고구마 도입・확산에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초발혁신가이자 확산가적 태도를 취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단순히 고구마 전파자가 아니라, 종자와 지식의 전래자이자 혁신가・확산자임 자처한 것이다.

 

양대 민생 문제를 위한 해법: 목화씨와 고구마

 

1364년 문익점이 중국을 통해 가져온 목화씨와 1763년 조엄이 일본을 통해 가져온 고구마는 400년의 시차가 있지만, 의료(衣料) 혁명과 식생활 혁명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식주 분야의 혁명적인 대체제이자 대안책이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혁신가들의 활동이 수많은 혜택을 가져오고 이를 통해 민생이 크게 향상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엄은 스스로 말하듯 문익점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우리나라 혁신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갔다.

 

나아가 생산성 향상을 통해 제도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 고구마를 심어 제주도민이 해마다 손을 벌리는 것과 나창(羅倉)의 배를 띄워 곡식을 운반하는 폐단을 거의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앞서 제9차, 10차 통신사들이 제도 개선에 주안점을 둔 모습과는 전적으로 차별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전래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첫째, 서양 해양 세력의 동진(東進)의 결과, 고구마가 들어오게 되었다.(전 지구적 변화 환경)

둘째, 가장 현실적인 기근대책으로 조선에 고구마가 전래되었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대안 확산)

셋째, ‘가치’를 알아보고, 실행한 초발혁신가가 있었다.(가치중심의 혁신력)

 

이 세 가지 요소가 먹거리 혁명을 가져온 원천이었다. 모든 혁신의 탄생이 보여주듯 열린 세계와의 조우, 강력한 수요(needs), 글로벌 기회에 주목한 혁신가가 이 신상품을 확고하게 견인해낸 셈이다. 물론, 그 혜택은 굶주린 백성들의 허기를 달래는데 막대한 기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