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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가치 발굴을 이뤄낸 탁월한 통찰력

by 전경일 2013. 1. 10.

가치 발굴을 이뤄낸 탁월한 통찰력

다시 조엄과 고구마의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 대마도로 가보자. 조엄이 부산포를 떠나 사스우라에 도착한 것은 1763년 10월 6일 오후 6시경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고구마를 보게 된 조엄은 즉시 종자를 얻어 부산포로 보낸다. 통신사 선단 6척이 10월 10일 사스우라를 떠나자 즉시 배를 부산포로 띄운 것이다. 이때 고구마 종자를 싣고 부산포로 온 배는 대마도 비선(飛船)이었다. 이들 비선은 통신사의 사행 중간보고를 위한 파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부산포에 도착한 것은 10월 중순경. 조엄이 부산포에서 비선편으로 보낸 10월 12일자 가서(家書)를 대마도 깅우라(琴浦)에서 받아 본 것이 10월 26일이었으니 부산-대마도간 연락망이 매우 신속히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조엄이 이렇게 급히 종자를 보낸 까닭은 무엇일까? 단연코, 다음 해 봄에 파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시 실행의 원칙

조엄은 씨고구마 종자를 급히 부산진 첨사 이응혁(李應爀)에게 보냈다. 이응혁의 조부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이복연(李復淵)이고, 부친은 이명수(李蓂秀)로 조엄의 절친한 친구였다. 따라서 이응혁은 친구의 아들인 셈이다. 당시 그는 부산진 첨사로 있었다. 조엄은 이응혁에게 고구마 종자와 함께 사스우라에서 조사한 보관재배법도 일러 주었다. 원천 소스와 매뉴얼이 함께 전해진 것이다.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 파종시기를 놓쳐 한 해를 허비하게 되고 그 사이 종자가 제대로 관리 안 될 위험도 있었다. 또한 다음해 봄 파종 시까지는 돌아올 수 없는 긴 사행 일정이라는 점도 반영됐다. 즉응즉수의 실행력을 보인 것이다.

 

한편, 부산진 첨사 이응혁은 조엄의 부탁을 받고 종자를 받아 소중히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 해(1764) 봄 지금의 영도인 절영도 봉래산 동쪽 해안지대 야산에 이 종자를 심었다. 굶주리는 백성을 위한 최대의 실험작인 구황작물 고구마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재배된 것이다.

 

고구마를 처음으로 심은 조내기

부산은 예로부터 고구마 재배지로 절영도와 다대포가 유명했다. 절영도에서 고구마를 처음 재배한 곳은 ‘조내기’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영도구 동삼1동 삼거리 일대로 알려진다. ‘조내기’는 ‘조엄이 가지고 온 고구마를 캐내는 곳’이라고 하여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고구마 종자를 처음으로 심은 곳에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곳에 사는 이 중 조엄과 고구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정확한 재배 위치도 알 수 없거니와 안내표지판 하나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완전 백업 장치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 급히 부산으로 보낸 조엄은 귀국할 때에도 고구마 종자를 더 구해서 가져왔다. 혹시 모를 실기(失機)에 대비해 백업 장치를 따로 마련해 둔 것이다. 또한 그간 업그레이드 된 재배 관련 정보도 기록해 두었다. 1764년 6월 22일 부산포로 귀환한 조엄은 2차분 종자를 동래부사 송문재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그가 불가피하게 신병으로 사임(8월 20일)하자 ‘고구마 프로젝트’에 비상이 걸린다. 송문재의 뒤를 이어 강필리가 부사로 부임하고, 그런 연유로 2차분 종자와 관련 지식은 다시 신임부사 강필리에게 자연스럽게 인계된다. 그리하여 강필리는 고구마를 타지방에까지 확대・보급하게 되는 것이다.

 

강필리는 조엄으로부터 전해 받은 보관・재배・증식법에, 2차에 걸쳐 자신이 재배・증식하면서 얻은 기술과 지식을 추가하여⟪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라는 고구마 임상실험용 책을 펴냈다. 이 임상실험 보고서는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고 후일 인용된 문헌에서만 보일 뿐이다. 강필리는 인계받은 프로젝트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더욱 열성을 쏟아 부어 완성해 나갔다. 만일 강필리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조엄의 고구마 프로젝트는 지속성은 물론이거니와 성과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채종・재배 등에 있어서도 과학적인 데이터를 공유하고 확장해 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엄이 숨은 가치를 찾아내는 가치 발굴의 눈을 가졌다면, 강필리는 고구마 프로젝트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총괄한 것이다.

 

고구마 의문사(疑問事)의 재구성

그런데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당시 국내에는 몇 년간 혹독한 기근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조엄의 통신사는 1763년 일본에 파견된다. 그런데 고구마는 그보다 48년 전인 1715년에 이미 대마도에 전파되어 전 섬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엄 전에도 제9차(1719년), 제10차(1748년)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왜 그들은 사행 중 고구마를 발견해 가져온 것은 고사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

 

<조선후기 통신사>

차시

연도 및 날짜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인원

특징

제1차

1607년(선조 40)

여우길

경섬

정호관

-

467

국교 회복

제2차

1617년(광해군 9)

오윤겸

박재

이경직

-

428

오사카 전투 직후에 파견

제3차

1624년(인조 2)

정립

강홍중

이계영

-

300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취임 축하

제4차

1636년(인조 14년)

임광

김세렴

황호

권칙

475

병자호란 중에 파견

제5차

1643년(인조 21년)

윤순지

조경

신유

박안기

462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탄생 축하

제6차

1655년(효종 6 )4월 20일-

1656년(효종 7) 2월 20일

조형

유창

남용익

이명빈

488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취임 축하

제7차

1682년(숙종 8)

5월 8일-11월 16일

윤지완

이언강

박경후

성완

475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취임 축하

제8차

1711년(숙종 37) 5월 15일-

1712년(숙종 38) 3월 9일

조태억

임수간

이방언

이현

500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취임 축하

제9차

1719년(숙종 45) 4월 11일-

1729년(숙종 46) 1월 24일

홍치중

황선

이명언

신유한

479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취임 축하

제10차

1748년(영조 24)

2월 12일-7월 13일

홍계희

남태기

조명채

박경행

475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취임 축하

제11차

1763년(영조 39) 8월 3일-

1764년(영조 40) 7월 8일

조엄

이인배

김상익

남옥

472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 축하

제12차

1811년(순조 11)

김이교

이면구

-

이현상

336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취임 축하

1719년 출발한 제9차 사행사 때부터는 고구마가 언급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때는 고구마가 대마도로 전래된 지 4년이 지난 시기였다. 만일 4년 밖에 안 되어 발견하기에 일렀다고 한다면, 그 다음 사행사인 1748년의 제10차 통신사는 33년이 지난 시기임으로 충분히 발견할 여지가 있다. 더구나 고구마는 문익점이 고려 말 원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목화씨처럼 반출금지 품목으로 의혹을 사는 종자도 아니었다. 대마도 측에서는 통신사 일행의 식탁에 내놓기도 할 정도였다. 1765년 겨울 제주도 어등포 사람이 일본 나가사키에 표류하였을 때 대마도 측에서는 ‘식사 이외에 매일 고구마 5개씩을 주기도 했다’는 증언으로 이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의 사행사들은 뭔가 크게 놓치고 있는 셈이다.

 

고구마는 반출금지 품목이었다?

 

조엄의 묘가 있는 원주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엄의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곡식을 보게 된다. 일본인들이 밭고랑에서 땅을 파니 넝쿨에는 과일 같은 곡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처음 고구마를 구경한 조엄은 희한하게 여겨 “저것은 마치 땅 속에서 열리는 과일 같은 곡식이구나”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지금도 고구마를 ‘지과(地果)’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때 조공이 느낀 데서 연유한다. 조공은 이것을 가져다가 퍼뜨리면서 곡식 이름을 ‘지과’라고 하였다.

 

조엄은 대마도 번주가 자기를 대접하는 객관에서, 낮에 처음 본 지과 같은 곡식을 먹어볼 수 없겠냐고 청했다. 조공의 청에 일본인들은 고구마를 쪄다 바쳤는데, 처음 맛을 본 조공은 그 맛이 좋다고 생각하고 생(生)으로 된 고구마의 맛도 보고자 했다. 그래서 다시 생고구마를 청했더니 일본인들은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생고구마는 맛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일본인들의 태도로 미루어 그들이 고구마 종자를 외국인에게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챈 조엄은, 그날 밤 부하에게 금 부치를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농민들에게 접근해서 종자 몇 알만 얻어오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남모르게 종자 세 알을 구한 그는 다음날 시치미를 떼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봄을 기다려 다시 대마도에 들렀다. 겉으로는 일본에 들어가 사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리는 일이라 해서 대마도 번주도 의심 않고 그를 환대했는데, 여기서 며칠을 묵는 동안 부하를 시켜 고구마 심는 법과 가꾸는 법 등을 세밀히 배우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주단지 모시듯 가져온 고구마 세 알을 동래와 제주도에서 정성들여 가꾼 보람이 있어 전국에 보급되어 식량사정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원주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고구마가 반출 금지 품목이어서 구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문익점 일화와 일체화시키며 극적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실일 가능성은 낮으나, 고구마의 성취에 대한 민간의 끈끈한 상상이 결합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이미 1719년(정사 홍치중, 부사 황선, 종사관 이명언, 제술관 신유한)과 1748년(정사 홍계희, 부사 남태기, 종사관 조명채, 제술관 박경행) 두 차례에 걸쳐 대일통신사를 파견한 바 있고, 부산 초량왜관과 대마도 간을 왕래하는 세견선도 수없이 많았다. 대마도-부산 간 교역선은 1707년에는 84척, 1708년에는 65척, 1710년에는 90척이나 되었고 조선정부가 보낸 배도 적잖았을 것이다. 게다가 대마도는 중간 기착지로 사행길의 필수 코스였다. 따라서 누구든 관심만 가졌다면 고구마는 얼마든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또한 두 차례에 동행한 인원만도 954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고구마는 반찬거리로도 내놓았던 식품이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못 봤다? 그래서 조엄 말고 이 전에는 누구도 고구마를 발견, 도입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1719년과 1748년 통신사는 어떤 이가 이끌었기에 고구마를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제9차 정사 홍치중과 제10차 정사 홍계희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홍치중의 경우

제9차 통신정사였던 홍치중은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인물이다. 그 뒤 지평・헌납・교리 등을 지내다가, 1712년에는 북평사(北評使)로 차출되어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대사간・승지를 거쳐 경상도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19년에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는 당쟁이 극심하던 때 노론이면서도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반대해 자신이 소속된 노론 강경파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점은 개인적 처세술이었지만, 당시의 정부 정책과 방향이 맞아 탕평을 추구하는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는 요인이 된다. 그에 따라 그는 좌의정으로 승진되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이 된 뒤, 홍치중은 노론의 온건파를 이끌고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탕평파가 주도하는 노소론의 온건파 연합정권을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재상으로 있는 동안 공명첩 발매의 개선책을 주장하고, 주전과 무명베 통용을 역설하며, 함경도 지역 출신 인물의 조화로운 등용을 주장하는 등 민심을 돌아보는 일을 하였다. 이렇듯 장단점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가 주안점을 두었던 정치적 행위는 주로 제도적인 면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면 조선 경제의 성장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미진해 보인다.

다음은 홍계희의 경우를 살펴보자.

 

홍계희의 경우

제10차 통신정사로 총책을 맡았던 홍계희는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정언이 되었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교리로 특진한 인물이다. 수찬을 거쳐, 1742년에는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파견되어 함경도의 진휼 정책을 살폈다. 이듬해 다시 북도별견어사로 파견되었다. 이 때 지방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 영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공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1743년 부사과로 있으면서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정 혐의를 탄핵했다가, 당색으로 공격했다는 의심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러다가 이듬해 다시 승지로 특채되었다. 1748년 일본 막부의 9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사의 정사로 뽑혀, 부사 남태기, 서장관 조명채 등 일행 475명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다. 이후 그는 1749년 충청도관찰사 때 시무의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이 때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 제정을 주관해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 시행하지만 1762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사도세자의 잘못을 고변해 세자를 죽음으로 내 몬 계기를 만든다.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으나 그보다는 시무에 밝고 경세치용에 많은 관심을 보인 개혁적 실천주의자이기도 했다. 젊어서는 유형원(柳馨遠)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고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권력을 좇아 처세한 탓에 사림들로부터 소인 내지 간신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제9차, 10차 통신정사의 개인적 행적과 정치적 성향만 가지고 각각의 통신사행단원들까지 묶어 평가할 수는 없다. 또한 이들만의 행적을 통해 고구마 전래가 이루어지지 않은 배경을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서 이 두 인물을 살펴보면, 공히 제도 개혁 내지 내부 정치에 집중해 자신의 입신양명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은 이들이 낮은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보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내부 문제에 국한된 시각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즉 조선 백성들이 굶주리는 진정한 원인인 생산성 향상 문제나 성장 엔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제9차부터 제11차 통신사행 전까지 조선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기아 문제 해결이었다. 당시의 심각한 식량 문제는 1719년(숙종 45년)부터 1763년(영조39년)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기근’과 관련된 기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총 45회가 넘는다. 매해 기근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을 살리는 구황문제는 국가적으로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 예로써 조정에서는 빈번한 기근 사태에 직면해 기근 문제 해결을 위한 각종 보고와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나아가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 와중에 백성들의 삶에 흡혈귀처럼 달라붙는 탐관오리의 학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에 기근이 심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 2천 석과 모맥 7천 석을 이송하게(하라.)

・경기도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진청(賑廳)의 쌀 2천 석을 획급(劃給)하도록(하라.)

제주도 안에 크게 기근이 들어 영남미 4천 석과 호남미 3천 석을 들여보내어 진휼하도록(하라.)

올 여름에 대단한 가뭄으로 큰 흉년이 이미 판정된다.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의 심한 가뭄은 근고(近古)에 없던 바(이다.)

삼남(三南) 지방에 큰 기근이 들다.

재이(災異)는 거듭되고 유민(流民)은 길에 널려 있는데 여역(癘疫)은 크게 번져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

지금 북도 백성이 몹시 굶주리어 거의 죽게 되어 다른 도의 곡식까지도 옮기어 수송하는 처지

(이다.)

제주에 기근이 들었으니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진곡 4천 석을 내리게(하라.)

제주에 기근이 들었으니 호남의 곡식을 운반해 진휼토록(하라.)

 

이렇듯 해마다 계속 발생한 기근은 국가적으로 큰 근심거리였다. 굶주린 백성들은 유망(流亡)하고 그런 와중에도 부역은 무거워 양민을 괴롭혀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다. 영조 10년만 하더라도 기민이 모두 7만 1천 9백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이 흩어져 도둑이 되고 돈과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협박하는 상황이 왕왕 벌어졌다. 이에 정부는 거듭 기근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고 피폐하니 조세를 절반 또는 3분의 1을 견감시키거나 함경도에서는 전세(田稅)와 신포(身布)를 차등이 있게 감해 주고 대동미도 감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임시방편이 근본적인 기아 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슬프게도 나의 백성들이 굶주려 부황이 든 나머지... 종신토록 배불리 먹는 즐거움이 없구나!

 

하지만 이런 국왕의 반성이 문제의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태는 더 악화되어 호남지방에서는 큰 기근이 들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변괴까지 나타나고, 결성(結城)지방에서는 춥고 배고파 구걸하던 아버지가 아들 집에 가서 몇 말의 곡식이 있는 것을 보고 가지고 가다가 아들이 밀어 넘어뜨려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런 와중에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턱없이 부족한 구휼미를 풀거나, 임금의 명으로 길에 깔려 있는 죽은 시체들을 묻어주도록 하는 등의 소극적인 조치뿐이었다.

 

기근이 거듭 든 데다 가 전염병까지 겹친 마당에 탐관오리들의 작폐는 극에 달했다. 관원들은 그저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거짓으로 구휼을 했다는 보고를 하는 등 탐오(貪汚)한 짓거리를 자행하고 있었다. 백성들을 생각하는 진정한 목민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정부에서는, 제주도에서 기근이 들자 어사를 보내어 감진(監賑)하려고 했으나 합당한 사람이 없어 난처할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여기까지가 조엄이 통신사로 가기 전 50여 년 동안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이런 처지를 뭇 통신사들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유독 조엄만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접하고 도입을 추진한 것이다. 제9차 홍치중 사행단, 제10차 홍계희 사행단에서는 볼 수 없는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를 구체적이자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점에서 조엄의 고구마 혁명은 단순히 고구마를 들여왔다는 사실보다 목민관으로서 보다 큰 사명감과 책임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국가적 상시 기아 상태를 조엄은 근본적인 혁신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