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창제와 관련되어 중요한 기관의 하나가 ‘언문청(諺文廳)’이다. 이 조직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세종 26년 실록을 통해 유추해 보건데, ‘의사청(議事廳)’이 ‘언문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언문청이「훈민정음」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 주무 기관이라면, 그것은 적어도「훈민정음」원안이 창제된 세종 25년 12월 이전에는 이미 조직되어 활동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세종 28년 11월 8일에 가서야 실록에는 ‘언문청’이 설치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온다는 점이다. 세종 28년 11월은「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세종 28년 9월)된지 2개월 후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을 다 만들어 놓고, 왜 그제서야 세종은 언문청을 만들었을까?
여기에 바로 「훈민정음」창제의 비밀이 숨어 있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훈민정음」 창제 프로젝트는 세종 혼자서 (세종 25년 12월 이전부터) 몰래 진행한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얘기다. 왜냐하면 세종의 지시를 받고 신숙주와 성삼문, 그리고 손수산이 황찬(黃瓚)을 만나러 요동으로 출장갔었던 게 세종 27년 경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의「훈민정음」개발 작업을 백업 해 줄 수 있는 조직은 어떤 형태로든 그 이전에 있었고, 다만 오랜 기간 잠수(潛水)를 탄 게 분명했다.
또 당시 황찬이 파스파 언어를 연구한 학자라는 것과 그가 요동으로 귀양 왔다는 정보를 세종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 문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여기에 바로 세종이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 TFT가 있다.
세종이 당시의 싱크 탱크인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여 유망한 소장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에 몰두하게 한 것은 취임 후 2년 되는 때이다. 또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가 어느 정도 아웃풋 형태로 나오기 시작한 때는 세종 10년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그렇다면 세종은 그 무렵부터 집현전의 몇몇 핵심 요원들을 비밀리에 불러 자신의「훈민정음」창제 계획을 알리고, 비밀 TFT의 요원으로 활동할 것을 지시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여기엔 신숙주와 성삼문이 제격이었다. 더구나 신숙주는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러나 뒤에 배치시킨 정인지와 최항의 역할은 일단 잠수하는 쪽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 자신만 조직도를 꿰뚫고 있는 「훈민정음 TFT」를 비밀리에 조직해, 오랜 기간 업무 지시를 하며, 프로젝트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자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중에 별도로 책방(冊房)ㆍ묵방(墨房)ㆍ화빈방(火L房)ㆍ조각방(彫刻房) 등의 인쇄시설을 갖추고 환관과 서리 및 몇몇 장인(匠人)들로 구성된 실무진을 꾸려 놓았던 것이다. 또한 스스로 「훈민정음」창제에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훈민정음」창제에 관한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훈민정음」이 완벽한 O/S라는 사실을 해례를 통해 확인한 다음에야 그는 그 비밀 TFT를 ‘언문청’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오픈하면서 조직 개편을 단행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세종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인「훈민정음」창제는 세종실록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한글’이라는 말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문을 포함해 간략한 언급만이 있을 뿐이다. 새 문자가 어떻게 창제되었는지, 그 소리들이 어떻게 실제의 물리적인 조음을 묘사하는지에 대한 설명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예들이 「훈민정음」에는 나와 있지만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실록에는 「훈민정음」이 ‘언문’으로 조금 나오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자로 되어 있는 음악 기호의 도표 가운데에 드문 드문 쓰였을 뿐이다.
[비밀 TFT 운영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세종이 이토록 비밀리에 「훈민정음 TFT」를 운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의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려는 계획에 대해 안팎의 간섭과 저항을 애초부터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안으로는 대명사대에 물든 골수 신료들의 저항과, 밖으로는 이 일이 알려질 경우 예상되는 중국의 압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훈민정음」공포 과정에서 최만리 등이 강력하게 저항하는 판에 처음부터 이를 드러내 놓고 개발하겠다고 했으면 개발초기부터 반대여론이 들끓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세종은 바로 이 점에 신경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훈민정음」개발 성과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조직된 TFT에서 나오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TFT는 한 국가의 CEO인 세종 자신이 직접 프로젝트 매니저로 참여해 추진해서 얻어 낸 매우 뜻 깊은 과제였던 것이다.
[이렇다 할 ‘나랏 말씀’이 없어서 ]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말을 적던 고대 문자가 있었다. 삼황내문(三皇內文)ㆍ신지비사문(神誌秘詞文)ㆍ왕문문(王文文)ㆍ각목문(刻木文)ㆍ고구려문자(高句麗文字)ㆍ백제문자(百濟文字)ㆍ향찰(鄕札)ㆍ발해문자(渤海文字)ㆍ고려문자(高麗文字)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이 고대문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정체를 지금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세종 이전에는 우리말은 있으되, 그 말을 적는 글자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기원전 4,5세기 경에는 한문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우리말 구조와 전혀 다른 한문으로 생활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또 우리의 사상 감정을 한문 구조로 표현해 내는 것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한자의 소리나 뜻(훈)을 빌어 우리말을 적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이것이 바로 이두(吏讀)나 향찰(鄕札)이었다. 그러나 이두는 어떤 사람이 한 때 창작한 조직적인 것은 아니었고, 각 시대에 여러 사람의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던 방법이었다.
(다음회에 이어서...)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