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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해녀처럼 경영하라

해녀로 산다는 것

by 전경일 2013. 6. 18.

해녀라는 직업의 일대기

끈끈한 유대감은 배려 문화에서 나온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성장곡선을 살펴보면 일정한 지점을 통과하면서 성장에서 퇴보로 기울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녀라고 예외는 아니다. 해녀는 초년기에서 청․장년기로 접어들면서 황금기를 맞이한다. 물질기량도 완숙기에 접어들고 삶도 안정돼 간다. 해녀 구성원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때도 이 시기이다. 직장인에 비유하자면, 중간 관리자급으로서 해녀공동체를 좌지우지할 만치 수적으로도 압도적이다. 관리자급이 그렇듯, 이 시기 해녀들은 누구나 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손색없다.

 

사회적으로도 이들의 존재는 대단하다. 해녀공동체는 물론이고 마을공동체의 일거리도 이들에 의해 기획 단계부터 집행까지 이루어진다. 중년기의 해녀는 아랫사람을 격려하고, 상군을 깍듯히 대함으로써 위계질서를 유지한다. 언필칭, 공동체의 중간허리를 형성하는 셈이다.

 

물이 무섭지 않던 나이를 지나 어느덧 때가 되면 갑자기 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마음에서부터 물과의 거리가 생긴다. 물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황금기의 끝 무렵이면 매일 드나들던 바다 물길이 갑자기 천 길이나 된 듯 깊어진다. 한 번 자맥질하기에도 벅차다. 마음 같아선 20미터까지 단숨에 들어갈 것 같지만, 도중에 숨이 차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상군 바다에서 밀려나 중군 바다로 간다. 그나마 활동력이 나을 때의 얘기다.

 

그마저도 힘에 겨울 땐 다시 애기해녀나 톨파리가 물질을 하는 ‘바다’로 향한다. 그게 해녀의 라이프 싸이클이다.

개인에 따라서는 칠십을 넘기고도 거뜬히 상군 바다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들 그럴 수는 없다. 나이 들어서도 상군 바다를 지키는 해녀를 볼 때면 기업의 장수 CEO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들도 언젠가는 거친 상군 바다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뭍에 가까운 낮은 바다로 나와야 한다. 자연의 이치란 사람이든, 물질이든, 경영이든 모든 면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때를 알고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녀 사회의 배려 문화는 끈끈한 유대감이 심적 요소에만 기인하는 게 아니다. 퇴직 후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기에 다행스럽다. 낮은 바다는 상군들이 오랜 물질을 통해 자원을 배려한 끝에 얻게 되는 보험과 같다. 보험금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해녀로서는 ‘끝물’에 해당된다. 하지만 아직 바다에 들 수 있기에 충분한 보람은 있다.

 

 

<해녀회의 활동>

 

해녀회가 하는 일은 대소사를 망라한다. 마을에 새로 이사 온 여인들에게는 언제, 어떤 조건으로 입어권을 부여할 것인지, 다른 마을로 시집간 해녀의 입어권은 언제 박탈할 것인지, 해녀바다는 어떻게 관리하며 해녀 개개인이 주어진 의무를 어겼을 경우에는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 등을 결정한다. 또한 금채기간 동안엔 해녀바다를 어떻게 감시할 것인지, 미역이나 톳의 해경(解警, 許採, 대문)을 언제 어떻게 치를 것인지, 톳 따위의 공동채취, 공동판매, 공동분배를 어떻게 치룰 것인지, 공동수익을 어떻게 관리하며 마을 공공사업이나 공공시설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지도 결정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웃 동네나 이웃 마을과 이른바 ‘바당싸움’이 벌어질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수익과 권익 보장을 위해 무슨 일을 합리적으로 치룰 것인지 등등 해녀로서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들을 결정한다. 마라도 해녀의 향약은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불문율을 명문화한 것인데, 64개조의 규범에는 해녀들의 해산물 채취를 둘러싼 갖가지의 자율적 규제가 주종을 이룬다. 이런 규제나 원칙을 천명함으로서 질서를 유지하고, 상호 기여와 노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해녀회의 주요 활동 사항이 된다.

 

 

 

바다의 신을 통해 팀웍을 다지다

팀웍은 정서적 안정감을 확보하는 데서 시작한다

 

바다에 몸을 던지는 해녀들은 직업 특성상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해녀마을의 바닷가에는 돌담을 두른 작은 신당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인다. 마을에 따라서 두세 군데 있는 신당을 해녀들은 주기적으로 찾는다. 거친 자연으로부터 안전을 구하는 자기암시 효과를 얻기 위해서이다.

  

<해녀 마을엔 왜 신당이 많을까?>

 

 

해녀 마을의 당에는 ‘개당’, ‘돈지당’, ‘요왕당’, ‘영감당’, ‘영등할망당’이란 명칭이 붙어 있다. 개당이나 돈지당은 바닷가의 당이란 뜻이다. 요왕당은 용왕이나 용궁부인을 위하는 신당. 영감당은 고기를 많이 잡아 부자가 되게 해 준다는 도채비(도깨비)를 모신 당이다. 영등할망당은 바다와 바람의 여신인 영등할망을 위하는 신당이다. 이러한 신당에 다니는 신앙인은 대개 어부와 해녀들이다.

 

신당에 찾아가는 날은 신당에 따라 다르다. 대개 7일, 17일, 27일에 찾아 간다. 이런 당을 가리켜 일렛당(七日堂)이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 십이간지 중의 용날(龍日)이나 개날(戌日)에 가기도 한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은 한 달에 세 번 모두 가기도 하지만 보통 한두 번 간다. 해녀들이 신당을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 물질에는 정성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녀 사회의 각종 제(祭)는 정성이 먼저다.

 

신당에 갈 때에는 초, 술병, 쌀밥 한 그릇, 삶은 계란, 과일, 무명실, 백지, 삼색(노랑 빨강 초록) 물색천 등을 준비한다. 형편에 맞게 준비한 공양물이라면 신은 받아준다. ‘지’를 준비해 갈 때도 있다. ‘지’란 하얀 백지에 쌀이나 밥을 주먹만큼씩 싸서 무명실로 동여 맨 것이다. 여기에 사용되는 쌀은 반듯한 쌀알만 골라낸 것이다. 밥도 정성이 들어간 이런 쌀로 짓는다. ‘요왕지’는 용왕의 몫으로 바치는 것이고, ‘몸지’는 자신의 몫으로 드리는 것이다. 몸지에는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는다. 가족 수만큼 지를 만들기도 한다. 지는 기도가 끝난 후 바다에 던진다. 두 손을 합장하고 몸을 깊숙이 숙여 바다에서 안전과 해산물 채취가 잘되기를 기원한다. 이런 무속 행위를 ‘지드림’이라고 한다. 영등굿이나 잠수굿 등 바닷가에서 행해지는 굿의 마지막 절차에도 이런 지드림이 있다. 지드림을 하면서 해녀들은 “용왕할머님, 지 바칩니다. 올해 무사태평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며 비나리를 한다. 안전과 풍작을 비는 것이다.

 

흔히 ‘요왕제는 하늘머리 열릴 때 올린다’는 말이 있다. 일년이 시작되는 정월 초이레를 전후하여 개인적으로 바닷가에서 용왕에게 의례를 지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게다. 무당을 대동할 때도 있다. 남편은 고깃배를 타고 아내가 해녀인 경우엔 대부분 요왕제를 지낸다. 그만큼 물질은 두려움과 맞서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 바다에 뛰어 들 때 두려움을 덜 수 있다면, 요왕제는 멘탈 큐어(mental cure)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안정과 풍요를 바라는 풍어제가 있다.

 

영등굿은 ‘영등할망’에게 마을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치르는 공동의례이다. 영등은 ‘바람의 신’이다. 어부와 해녀들의 수호신이며 해산물의 풍요를 가져오는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해녀들은 영등할망이 전복씨, 소라씨, 미역씨를 가져다 바다에 뿌려주는 것으로 믿는다.

 

음력 2월의 제주는 가장 바람이 매섭다. 이때 부는 바람을 ‘영등바람’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바람 많은 제주라지만, 바람이 불면 해난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2월을 ‘영등달’이라 부르며 제를 지낸다. 영등할망이 머무는 동안에는 배를 띄우지 않고 어떤 어업도 하지 않는다.

 

해녀들의 삶이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웠는지 알 수 있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에 그들에겐 늘 비나리가 함께 했다.

 

 

<영등굿과 관련된 영등 신화>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한수리라는 마을의 어부들이 먼 바다로 고기잡이 나갔다가 표류하게 되었다. 이마에 눈이 하나 달린 외눈백이 거인들이 사는 나라에 표류하여 그들에게 잡아먹히게 될 위기에서 영등이 이들을 살려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문에 영등은 외눈백이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찢겨 바다에 버려졌다. 처참한 주검은 물결에 실려 제주도로 왔고, 어부들은 이를 거두어 성대히 굿을 하고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기렸다. 이후 영등은 해마다 봄이 올 무렵 제주에 들어와 제주도 전역을 돌아보며 해산물의 씨앗을 뿌려주고 어부와 해녀들의 소망을 들어주고 해상에서 안전을 지켜준다. 삶이 늘 위태롭고, 바다농사가 풍년이 되어야 먹고 살 여건이 마련되었기에 만들어진 말이겠지만, 해녀 사회의 비니리를 보는 듯하다.

 

2월 15일이 되면 영등할망이 제주섬을 한바퀴 빙 돌아보고 나가는데 이때 열리는 송신굿(送神)은 영신굿(迎神)에 비해 매우 성대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제차(祭次)가 엄숙히 진행되며 선주와 해녀들이 참여한다. 마지막에는 풀잎으로 만든 띠배[茅舟]를 저녁 바다에 띄운다. 배 가득히 제물을 실어서 영등할망을 바다 저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다. 배에는 굿에 사용되었던 밥과 떡, 술, 과일, 종이돈과 살아있는 수탉 한 마리를 싣는다. 이때 영등할망은 동북풍을 불러 그 바람을 타고 떠난다.

  

영등과 관련되어서는 재미나는 이야기들이 있다. 영등이 들어오는 2월 초하루를 전후로 해녀들이 만일 ‘옷 벗은 영등이 왔다’, ‘영등할방이 올해는 딸을 데리고 왔다’라고 하면 날씨가 화창할 것이라는 뜻이다. 딸이 차려입은 고운 옷이 비바람에 젖고 구경도 망칠까 봐 영등할방이 날씨를 화창하게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일 비바람 불고 날씨가 궂으면 ‘우장 쓴 영등이 왔다’거나 ‘영등할망이 며느리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영등이 우비를 쓰고 왔다는 말이다. 데리고 온 며느리가 고운 옷을 입고 좋은 구경을 하는 것에 심통을 부리느라고 비바람을 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 영등 기간 동안 금기사항이 많았다. 물론 반드시 지켜야 할 것으로 간주됐다. 15일 동안 빨래나 농사일, 고기잡이나 해녀일 등 생업에서 손을 놓기도 했다. 바다의 소라, 고둥은 이 무렵에 속이 텅텅 비어있는데 영등할망이 모두 까먹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현상을 인간사와 연결시킨 대목이 재밌다. 영등할방이 소라나 전복을 비운 뒤 다시 새로운 씨를 뿌려주어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 이 기간에는 심지어는 혼례식을 치르지도 않았다. 장례나 제사가 닥치면 영등할방 몫으로 밥 한 그릇을 따로 마련해 놓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임을 알게 한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