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하늘은 언제나 뜻 가진 자를 찾고 있다

by 전경일 2013. 10. 22.

하늘은 언제나 뜻 가진 자를 찾고 있다

 

금성사는 설립 초기부터 국산 라디오 생산에 박차를 가해 1959년 11월 국내최초로 진공관식 6구 라디오를 생산하며 시판에 들어갔다. 금성사가 이룩한 라디오는 처음부터 부품 국산화율이 60퍼센트에 달했다. 이는 한국 전자공업사에 획기적인 성과로 기록될 만한 것이다. 또한 기술적인 면에서도 플라스틱 제품 생산을 통해 축적한 금형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외제를 선호하는 국내 고객은 이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흥, 국산이 어디 가겠어!'

 

외제 선호의 이런 냉소적인 풍토는 참담하기조차 했다. 라디오뿐만이 아니었다. 자체 개발ㆍ생산한 선풍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외제에 밀려 내수가 부진해지자 금성사 내부에서는 전자사업 철수론까지 대두됐다. 새로 진입한 사업에서 맞이한 시련이자 이제 곧 태동된 한국 전자산업의 위기였다.

 

이대로 가다간 철수해야 할 판에 금성사를 도운 건 5.16 쿠데타였다. 군사정부는 한국 경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밀수품 단속을 강화하고, 정부 시책을 홍보하기 위해 1962년부터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 여기에 5.16 이후 한 때 전력이 남아돌아 이의 소비를 권장한 것도 우호적인 사업 환경으로 크게 한 몫 했다. 그러자 라디오는 갑자기 품절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를 통해 금성사는 기사회생의 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라디오 보내기' 운동은 비단 경영수지 측면에서만 기여한 게 아니다. 기술 축적, 인력 확보 면에서 더 큰 진전을 이뤄 금성사는 1964년 종합전자ㆍ전기 공장 준공으로 도약의 온천동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기술 금성'을 견인한 전자기술은 1960년에 선풍기 개발을 시작으로 냉장고(1964), 흑백텔레비전(1966), 에어컨(1968), 세탁기 및 승강기류(1969)에 이르기까지 주요 가전 분야를 국내 최초로 국산화 해냄으로써 국민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이에 대해 『LG전자 50년사』는 자부심에 넘치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지금도 LG전자의 혈관 속에는 일등을 추구하며 도전과 개척의 길을 걸어 온 창업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LG전자의 ‘혼(魂)’입니다. 그 혼을 되살리는 일은 21세기에 ‘글로벌 1등 LG’를 실현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정신적 자산일 것 입니다."

 

이에 따라 사업 규모도 나날이 확장돼 갔다. 구인회가 심혈을 기울인 금성사는 1962년 자산규모 5억에서 1969년에는 18개 품목의 전자ㆍ전기제품을 비롯해 통신기기ㆍ전선 등으로 사업 영역이 확대되며 1971년부터는 고도성장을 이루기 시작한다. 1973년에는 100억 원대의 매출로 창업 10년 만에 239배라는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다. 이어 5년 뒤인 1978년에는 1,000억 원, 1979년에는 2,620억 원을 거뜬히 돌파한다. 이는 1970년대에만 총자산 규모가 39.4배 증가하는 경이적인 성장세였다. 이런 성장은 198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1986년에는 1조원 대에 진입했고, 1988년에는 2조원 대를 상회했다.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이었다.

 

금성사를 키운 효자상품 라디오의 경우에는 1961년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급대수가 53만 대였지만 1974년에는 10배 이상인 556만대로 늘어났다. 이 같은 사실을 보면, 금성사가 산업화 초기부터 전자ㆍ전기 기기 제조업체로 성장하는데 최초의 상품인 라디오가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사회생의 조건으로 작용한 시대적 배경도 크게 한 몫을 했다.

 

금성사는 럭키가 화장품, 치약 등 생필품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 나간 것과 달리, 우리 생활에 미디어 시대를 여는 혁명적인 전자시대를 가져왔다. 전기의 생활화, 전자공업의 일상화가 이로부터 뿌리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들의 삶의 질은 물론, 정보화를 이끈 LG로서는 '메가톤급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성공의 뒤안길에서 살펴보면, 그간 전자산업에 대한 냉소주의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전자사업에 뛰어들 때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이렇게 흠을 잡곤 했다.

 

"미군 PX에서 날이면 날마다 신형 라디오가 쏟아져 나오는데, 무슨 재간으로 그것들과 부딪쳐 이길 수 있겠나?"

 

이때마다 구인회는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PX에서 나오는 외국물건만 사 쓰고 살아야 한단 말이오? 누군가가 해야 하고 먼저 하는 사람이 고생도 하겠지만 고생하다보면 일본의 내셔날이나 도시바처럼 될 수도 있지 않소? 무서워 앞장서지 못한다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거요."

 

그의 기업 철학이 드러난 이 말은 결국 훗날 LG가 전자 시대를 열어 나가는 고삐를 움켜쥐는 계기가 된다. 만일 그때 구인회가 주변 사람들의 만류와 조소에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한국의 전자제품은 볼 수 없고, 밀수가 범람하던 시기처럼 지금도 여전히 외산으로 우리 가정은 꽉 들어찼을 것이다. 구인회의 뚝심과 비전이 대한민국의 미래 핵심 산업을 지켜냈던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