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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누르하치: 글로벌 CEO

뜻을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 경제

by 전경일 2014. 3. 11.

뜻을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 경제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여진 사회의 힘의 통합이 경제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의 대 중국 교역은 바로 이 같은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누르하치가 경제적 기반을 갖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의 경험이 크게 도움 됐다. 그는 젊어서 춘씨 가문의 데릴 사위였는데, 젊은 누르하치에게 춘씨 가문은 사업적 마인드를 가져다주었다. 누르하치가 거병 후 확보한 재원은 그 같은 경험에 바탕을 둔 무역업이었다.

 

또한 그의 교묘한 대명외교 역시 사업적으로 단련되었기에 얻을 수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춘씨 집안은 일찍부터 한족과 접촉하고 있었던 만큼 명 왕조에게도 우호적으로 보이는 가문이었다. 또 이 가문은 상업적 수단으로 후일 누르하치 정권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정치적 집단이 되어 주기도 했다. 후일 누르하치가 칙서를 활용해 대 중국 무역 실리를 추구한 것이나, 여진내부에서 채취된 1차 상품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하는 것 등은 바로 춘씨 가문을 통해 경제적 실리에 눈을 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르하치 등장 시기 경제적 기반이 허술한 여진 사회는 주로 산야에서 채집되는 1차 제품을 중심으로 교역하였다. 인삼은 명나라 사람들에게는 회춘제(回春劑)로 인식되던 물건이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주요 교역품인 인삼을 무순의 마시(馬市)에서 교역하였다. 인삼은 우수리 강 및 중여진의 제 하천 연안에서 많이 채취되었다. 길림, 영고탑, 봉천 등은 인삼의 1차 집산지였다. 이 당시 인삼은 누르하치 재력에 큰 보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이 중국을 지배한 다음에도 왕실 재정의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다시말해 경제기반 창출의 핵심 제품이었던 것이다.

 

경제는 여진 사회 내부의 통합이나, 대 중국 정복 전쟁 수행, 나아가 중국에 대한 인수 합병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지속적으로 중요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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