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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부산포해전: 성공 혁신을 재혁신의 기회로 삼아라

by 전경일 2014. 8. 26.

부산포해전: 성공 혁신을 재혁신의 기회로 삼아라

 

승리를 재혁신의 기회로 삼으면 더 큰 승리이자,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승리에 이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일회성 승리로 끝나고 만다. 어느 기업이나 한 때는 잘 나갔었던 때가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자세이다. 부산포해전은 재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매우 뜻 깊은 전투이다. 장군은 성공적인 혁신을 안주가 아닌, 재혁신의 기회로 삼았다.

 

부산포 해전은 1592824일부터 92일까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부산포 등지에서 치러진 전투를 말한다. 이 해전에서 장군은 적선 152척을 격침시키고, 6척을 불태운다. 이 해전은 이순신에게 과거의 전투를 돌아보고 이를 보완하는 계기가 된다. 지금까지 3차에 걸친 해전에서 연전연승하고, 귀항 후 그간의 작전 수행결과를 반영해 전쟁 준비에 온 힘을 기울인 해전이라서 그렇다.

 

특히 여러 번 출전에서 항상 군량이 부족해 먼 거리를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점을 되새겨 장군은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비상용으로 비축해 두었던 군량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을 받는다. 또 해상에서 패전한 적이 육지로 도주함으로써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에게 수륙합동 공격을 제의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동시 출전의 약속을 받아낸다. 여수 앞바다에서 전라좌우도 함대를 합동으로 편성해 81일부터 훈련과 정비를 실시한 후에야 장군은 출전했다. 그 점에서 철저히 준비된 전투였다. 준비를 했다지만, 이때도 적과 아군의 전선 수는 3:1로 아군은 숫적인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적을 선제기습공격하여 부산 선창을 향해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함대는 장사진(長蛇陣, 종렬진)’을 형성하며 포구로 돌진하여 적선 4척을 격파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대형을 원용한 것이다.

 

이 부산포 해전은 장군이 출전한 해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전투였다. 적이 육지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 지상전투에서 노획한 아군의 편전(片箭), 대철환(大鐵丸), 수마석(水磨石)을 발사하며 저항한 탓에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생긴 것이다. 이 전투에서 장군은 너무나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한다. “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느냐?”며 비분강개해 이순신을 떨쳐 일어서게 했던 녹도만호 정운을 잃은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쉰, 아까운 장수의 전사였다.

 

이 전투를 통해 장군은 육군의 지원을 받지 않는 한 적을 격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큰 의미가 있었으니, 3차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비점을 보완해 출전한 점이다. 또한 전라·경상우수사, 조방장 등과 작전을 상의하고 토론했으며, 탐망선을 운용해 지역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획득한 점이다. 작전 계획에서는 집권화를 이루고, 실행 면에서는 분권화를 이루었다. 이는 조직의 의사결정력과 실행력을 절묘하게 결합해 전술운용의 효과성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 조선수군은 드디어 남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왜의 보급로를 끊어 버린다. 이로써 전쟁 이후 1년여의 시간이 지난 1593년 초부터 아군은 각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격으로 이행하는 재혁신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5차 출전(웅포), 6차 출전(당항포), 7차 출전(장문포, 영등포) 등은 부산포 해전 성과의 확대재생산 과정이었다. 이처럼 재혁신은 중요했다.

 

오늘날 포춘 50대 기업을 살펴보면, 잘 나갔던 기업들도 95퍼센트 정도가 정체를 경험한 바 있다. 기업은 창업, 성장, 성숙, 재구축의 일련의 과정에 놓여 있다. 성숙 이후 재구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장과 추락의 기로에 놓인다. 인식의 덫에 갇혀 기존 사업의 방식에 빠지거나 시너지에 과도한 집착을 하다보면 위험요소만 높아간다. 또 과도할 정도로 숫자의 유혹에 빠져 목표, 기대치 및 자신의 역량을 과신함으로써 오만의 함정에 빠져 들 수도 있다. 시장 기회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도 기회와 위험요인이 공존하기에 항시 경계되어야 한다. 제조업의 교과서라고 불리던 일본 토요타자동차의 좌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토요타는 과거의 성공방식인 과도한 효율성 만능주의에 빠져 계속 같은 방식을 강화한 결과 공용화 부품에서 품질 문제를 야기하고, 과도한 해외생산 능력의 확충 및 원가절감 면에서 추락하며 위험에 빠졌다. 현재 전 세계 40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휴대폰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80년대 휴대폰 시장을 석권한 압도적 1위 업체는 모토로라였다. 당시 시장점유율이 60퍼센트에 달할 정도였다. 이런 모토로라가 맹주 자리를 내놓게 된 배경은 기술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데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쇠락의 원인이 됐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 온 회사가 노키아였다.

 

노키아는 저가형 디지털 휴대폰으로 개인휴대전화의 대중화 시대를 열어젖히며 일대 기린아로 등장했다. 그러나 강자로 군림했던 노키아도 2000년 초 휴대폰 시장이 디지털 컨버전스로 변화할 때 뒤늦은 대응으로 삼성전자에 혁신의 주도권을 내준다.

 

삼성은 단숨에 글로벌 톱3 업체로 도약했다. 반면, 노키아는 바(bar) 타입의 저가폰을 고수하며 시장점유율이 20퍼센트 대까지 추락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노키아는 2000년대 중반 플랫폼 전략을 통해 저원가로 다변화된 시장수요를 창출하며 다시 시장점유율을 40퍼센트대로 끌어 올려 1위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리하여 20093분기가 되면 세계 휴대전화 점유율(대수기준)상 노키아 37.8%, 삼성전자 21.0%, LG전자 11.0%, 소니 에릭슨 4.9%, 모토로라 4.7%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들 밑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최강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플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애플의 등장과 함께 이들 기업의 혁신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시장은 급전환 된다. 이 처럼 경쟁은 엎치락 뒤치락한다.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진화를 지켜보며 깨닫게 되는 게 있다. 모든 혁신 기업은 주도기업이 기존의 사업방식과 성공모델을 고수하고 있을 때 획기적으로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놀라운 혁신을 통해 기존 시장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노키아도 2009년 크게 흔들렸고, 삼성도 애플에 발목이 붙잡힌 것은 이 때문이다. 변화의 시기에 창조적 도전과 뼈를 깎는 혁신의 노력을 하지 못한 기업은 변화의 크레바스에 빠지며 사라지게 된다는 교훈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면에 다른 분야의 강자들, 예컨대 IBM, Intel, P&G 등은 성장과 정체를 반복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재혁신 기반을 구축했기에 초일류기업으로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순신 혁신을 통해 오늘날 기업들은 지속혁신이 지속가능경영의 전제조건임을 알게 된다. 부산포해전에서 장군의 재혁신 체제 구축은 이후 전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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