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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조큐의 난(1)

by 전경일 2015. 7. 15.

일본발() 왜구의 발호-조큐의 난(1)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명문(銘文) 이후, ‘왜구가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1152년이다. 일본 측 자료인청방문서(靑方文書)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고려를 대상으로 해적활동을 한 집단에 대한 최초의 증빙이 엿보인다.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長崎縣)의 서쪽에 위치한 고토(五島)의 장관격인 지두(地頭) 기요하라 고레카네(淸源是包)가 고려 선박을 탈취한 혐의로 영주로부터 예소직(預所職)을 박탈당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왜구가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대략 70여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해상 무사단의 활동 지역이 일본열도 내 바다를 넘어 멀리 고려 선박을 대상으로 약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왜구가 어떻게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는지 그 연원을 짚어보는 역사적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약탈 특성상 해적은 곧 성행하게 되어 이들 무력 집단은 독자적으로 섬이나 포구, 나루터에서 선박과 수군을 동원해 약탈에 나섰다. 또 해부로 불리는 바닷가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이들 해적은 바닷가 근처의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약탈 목적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왜구는 왜 크게 발호한 것일까?

 

왜구의 등장과 발호는 일본 내부의 사정과 관련 깊다.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인 1185년 겐지(源氏)와 헤이시가(平氏家)는 시모노세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승리해 1192년 가마쿠라(鎌倉)에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막부를 설치함으로써 일본에서는 약 680년 간 지속되는 무인정치 시대가 열린다. 근대 명치유신(1868)까지 이어지는 막부 정권이 개막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27년 뒤인 조큐(承久) 원년(1219) 1,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実朝)가 조카 구교(公曉)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막부는 새로운 쇼군으로 마사나리(雅成) 친왕을 맞이하고 싶다고 고토바(後鳥羽)상황(上皇)에게 요청했다. 이에 대해 고토바 상황은 승인의 전제 조건으로 막부가 자신의 애첩의 소유 영지를 처분한 것을 철회할 것을 내세웠다.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는 이것을 막부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보고 거부한다. 호조는 친왕을 쇼군으로 세우려 했지만, 고토바 상황의 반대에 부딪치자, 섭관가(攝關家)의 후지와라노 요리쓰네(九條賴經)를 새 쇼군으로 맞이한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로 조정과 막부의 긴장은 날로 높아졌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권력 회복의 의지가 있던 고토바 상황은 조큐(承久) 3(1221) 가마쿠라 막부에 맞서 토벌군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병란(兵亂)조큐의 난(承久)’이라고 부른다. 이 난에서 상황(上皇)의 조정은 패하게 되는데, 이때 공가(公家, 조정) 편에서 싸우다 패한 무사들[武家]은 대다수 서국(西國)의 무사들이었다.

 

난의 결과, 패배한 공가 무사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게 된다. 그러자 이들은 새로운 생존 조건을 찾아 세토(瀨戶) 내해(內海)에서 해상 무장 세력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들이 약탈 집단인 왜구로 극적 변신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왜구 발생에는 일본 내 혼란이 크게 작용한다. 또한 내해의 영주와 토착세력들이 약탈 행위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점차 이웃 국가의 공선(公船)도 약탈할 만큼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곧 통일적인 지휘 체계 하에 무리를 지어 약탈할 만큼 조직화된다. 이 해적의 일부가 조큐의 난이후 원거리 약탈에 나서는 왜구로 바뀌며 고려에서 본격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고려사1223(고종 10) 5월 경남 김해에서 노략질 한 주체를 이들로 지목하고 있다. 2년 후인 12254월에도 왜선 두 척은 경상도 연해를 침범했고, 이듬해 정월에는 경상도 연해안을 침입해 약탈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2274월과 5월에는 경남 김해와 웅진에 다시 출현했다. 일본 측 기록인청방문서(靑方文書)는 왜구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일본 내부의 혼란으로 해상 무사단이 일본열도 내해의 해상수송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원거리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일본 내해에서 시작한 약탈집단이 점차 내해를 벗어나 글로벌화되어 가며 약탈 지역을 과감히 주변국으로 넓혀 나간 것이다.

 

이처럼 고려 초 왜구가 발생하게 된 것은 시기적으로 볼 때 일본 내 조큐의 난과 관련 깊다. 즉 일본 내 정국 혼란이 왜구 발호를 가져오게 한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동북아 지역의 불안정은 일본 내부의 모순에 의해 생겨나고, 그 전화(戰禍)가 이웃 국가에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초기 왜구의 등장은 전격적인 왜구발() 침구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는 일본 내부의 혼란이 다른 국가들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시 군국주의로 치달은 일본이나 오늘날 극우적 행태로 치닫는 일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