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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조큐의 난(2)

by 전경일 2015. 7. 20.

지금 일본은 2차 대전 이래 가장 뜨거운 극우주의 열기로 들끓는 가마솥과 같다. 경제 성장이 가져온 경제대국화와 일본 내 경제적 불안정성과 잦은 자연재해, 그리고 잇따른 인재(人災)는 이 가마솥이 폭발의 행로를 찾아 새로운 팽창주의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팽창 기조를 일본은 1823년 사토 노부히로가 제안했던 울릉도·독도 공략책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독도문제의 역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왜구와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 지금의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서로 빈틈없이 맞아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왜구를 다루는 것은 일본의 침구가 끝내 일본은 물론 주변 국가 모두의 불행이 되어 온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나아가 이 일이 단지 과거의 불행으로 국한되지 않을 거라는 우려가 심각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막부시기 일본에서도 이들 무법(無法)비법(非法)불법(不法) 약탈 집단의 심각성을 알고 이를 제어하려는 움직임은 다름대로 있었다.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에 해상 무사단이 활동하자 가마쿠라 막부는 1185년 무가(武家, 막부) 정권을 세운 이래 1232년 해적을 금하는 법령을 만든다. 일본 최초의 무가법(武家法, 막부법)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와 그 후에 공포된추가법(追加法)이 그것이다. 이 법령 제3조에는 해적 행위를 대번최촉(大番催促모반·살해 등의 대범삼통조(大犯三筒條)로 보고 같은 급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1조에는 모반·살해와 함께 해적 행위를 중죄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막부가 해상 교역로의 안정성을 획득하고 해적집단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막부가 해적을 중죄인으로 취급하여 엄히 처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해상 무사단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막부는 어성패식목공포 이후, 11년이 지난 1244추가법(追加法)을 다시 공포하게 되는 데, 여기서도 해적 금지의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추가법은 일본 내 지두(地頭)에게 선박을 동원해 직접 죄인을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는 일본이 나름 국가적 차원에서 왜구 근절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하지만 법령을 공포했다고 해서 왜구가 근본적으로 근절된 것은 아니었다. 비정상적 교류는 일본이 자원을 얻는 한 방법으로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왜구 침구 행위는 철저하게 일본 내 수요·공급 법칙을 따르고 있다. 이런 경험은 지금도 이어져 일본의 동해 침탈과 독도 침구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영토 욕구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준동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에 불을 붙이는 것은 알고 보면 일본 정부가 취하는 강한 ()왜구주의의 수요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분별없는 침구 수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본의 침구 행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13세기 중반 무렵, 막부는 무엇 때문에 법령까지 제정해 가며 왜구를 막고자 한 것일까? 막부가 법령까지 공포하게 된 것은 타국에 대한 피해를 막기 위한 인도주의적 차원이었기보다는 이들 해적 집단이 위협적이지는 않아도 막부의 정국운영에 방해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임진왜란을 앞두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적을 금한 것과 같다. 토요토미는 15887해적금지령을 전국에 공포하고 전국 항구의 지두(地頭대관(代官)들에게 해상 생활자를 조사하도록 명한다. 또한 해적의 거점을 영유하는 급인(給人영주들에게 감독의 책임을 엄격하게 물어 해적무리의 기반을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1589103, 일본에서는 토요토미의 주인장(朱印狀)이 히라도(平戶)의 성주(城主) 미츠라 시게노부(松浦鎭信)에게 발행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천정(天正) 17(1589) 봄에 히라도의 상선(商船)이라고 칭하여 텟구와이라는 당인(唐人)이 대장이 되어 일본에 내항 중인 당선(唐船)에게 해적행위를 했으므로 그와 그의 동료를 포박하여 내게 진상하라. 자세한 것은 고니시가 말할 것이다

 

토요토미는 왜해적금지령을 내렸던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본다. 첫째, 1587년 조선의 손죽도(損竹島, 여수 선죽도)를 비롯하여 각처가 왜구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가운데 토요토미가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조선 정부가 그에 대한 조건으로 왜구 침구·납치의 안내자 역할을 한 부왜(附倭) 서화동과 해적을 모으는 고토(五島)와 히라도(平戶)의 영주 및 해적 우두머리를 압송하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때 유성룡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를 만나 반민(叛民)을 깨끗이 (조선에) 돌려보낸 뒤에 통신에 대해 다시 의논하자고 요구한다. 그러자 소오씨는 그 자리에서 그야 어려울 게 없다며 쾌히 수락한다. 대마도주로서는 어떻게든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는 토요토미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했기에 소오씨는 해적 박송(縛送)에 대한 조치를 일본 내 실력자에게 진정한다. 이것이 토요토미가해적금지령를 내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다른 주장으로는 전국시대를 통일해 가는 토요토미로서는 해적떼가 성가 싫은 존재이자, 지방의 군소 무리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이 같은 무리를 조선 침략의 부대에 통합시키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처럼 토요토미가해적금지령을 내린 것은 일본 내부의 사정과 목적이 반영된 것이지 평화 수호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막부의 조치로 집요하게 발호하던 왜구는 1228년부터 1262년까지 34년 동안 갑자기 침구 행위가 뚝 끊긴다. 그렇다면 이는 막부의 노력의 결과였을까? 나아가 이 같은 조치로 왜구의 침구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시 왜구가 갑작스런 소강상태를 보인 것은 더 큰 전화를 준비하기 위한 일 과정이었다. 마치 현대 들어 일본이 독도문제로 도발하고 나서 잠시 잦아들었다가 더 맹렬한 기세로 다시 침략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소강상태가 불러온 더 큰 침구

34년간의 소강상태를 깨고 왜구가 다시 고려에 침구하기 시작한 것은 1263년부터였다. 왜선 1척이 고려의 물도(勿島)에 침입해 정박 중인 공선에 실려 있는 쌀 120석과 세포(細布) 43필을 약탈해 간 것이다. 이때 약탈 세력은 현 나가사키 현의 북부에 있는 마쓰우라(松浦)지방에 근거를 둔 수군 무사단인 마츠라당(松浦黨) 해적들이었다. 이들의 초기 약탈 성공은 왜구 발호를 확산시키는 신호탄이 된다.

 

왜구 침구의 행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잦아지고 대담해져 1298년에는 중국으로 항해하는 중에 난파된 당선(唐船, 중국 배)를 마쓰우라 지역 사람들이 배 7척을 끌고 가 무차별 약탈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한다. 이때의 왜구 약탈상에 대해 일본 측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왜구 관련 기록인청방문서(靑方文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섬과 포구마다 약탈선이 무리(島島浦浦船黨)를 이루어 선적된 물품을 약탈했다.

 

이들 해적 무리는 약 10년 뒤 일본 상선이 원에 도항했을 무렵인 1307년과 1309년에 다시 크게 발호한다. 이번에는 일본 내해가 아닌 중국 땅에서였다. 왜구와 상인을 오가는 일본인들이 영파에서 시가지를 불태우는 등 약탈행위를 자행한것이다. 이와 같이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에 이르면 왜구 활동은 집단화되고 대선단을 이루어 동아시아 세계 전체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간다. 한번 약탈에 맛을 들이자, 약탈은 곧 가장 손쉽고 이익이 많이 나는 사업이 되었고, 그에 따라 해상활동은 더욱 왕성하게 전개된다.

 

이처럼 일본 가마쿠라 막부 이전부터 등장한 해적들은 조큐의 난을 계기로 중국에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하며 본격적으로 왜구로 활동했다. 고려에서 잦은 왜구의 출현은 일본 내해와 규슈의 해적이 주역이었고, 이들의 확장된 약탈 행위와 관련깊다.

 

한번 자행된 약탈은 곧 확산돼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벌어져 1354년에는 일본 무사들끼리도 서로 약탈하고 경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사회 내부는 어느 틈엔가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고 약탈하는 상시적 약탈사회로 변모한다. 이는 마쓰우라라는 동일지역 내에서 벌어진 행위라는 점에서 내·외부로 해적행위가 확산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자에게 밀리거나 얼마간 유동적인 성향을 갖은 약소 무사들과 거주인들은 근거지를 이탈해 끊임없이 바다를 건너 왜구가 되는 약탈자의 길을 선택했다.

 

일본 내 혼란으로 자국 내에서도 서로 약탈하는 사례는 일본사에 빈번이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 이로부터 57년 뒤인 1411(태종 11) 1월 일본에 파견되었던 양수(梁需)가 일본 국왕의 답서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에 의하면, 왜구는 자국의 배까지 약탈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어제 해상에서 호적들을 만나 겁탈을 당하여 겨우 사지를 벗어나 알몸으로 이르렀습니다··· 간사한 백성들이 주토(誅討)를 피하여 외딴섬[絶島]에 도망가 숨어 있으면서, 해상에 자주 나와 상선을 표략(剽掠)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또 다시 이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왜구들이 일본 선박까지도 약탈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중앙집권 체제가 아니라 각 지방의 수호 대명에게 권력이 분산된 지방분권적 체제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 내부의 혼란은 왜구를 생산해 내고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거대 왜구 생산공장이었다. 이는 규슈의 군사들이 자기 분열과 복제를 반복하며 더욱 잔인하고 악랄한 본성을 드러내며 왜구로서 확대재생산 되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해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약탈지를 확보하는 게 전제조건이었기에 그 불똥이 결국 바다를 건너 고려에까지 번진 것이다. 나아가 고려에 대한 침구는 원거리 항해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대규모 왜구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가능성은 현실이 되어 한반도를 침구하는 잦은 왜란의 형태로 찾아온다. 물론 이는 이후에 나타나듯 일본이란 국가가 직접 총괄지휘자로 나서는 대대적인 침략·약탈·살인 행위의 끝없는 전주곡의 시작일 뿐이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