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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로마의 길은 지금도 계속 달린다

by 전경일 2016. 4. 6.

로마의 길은 지금도 계속 달린다

 

영국 산업혁명 초기 대표적 기술자 중에 운하 건설자인 제임스 브린들리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영지에서 산출되는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맨체스터까지 운하를 놓을 것을 계획한 브리지워터 공작(3rd Duke of Bridgewater)에게 고용되어 운하를 만든 장본인이다. 이 운하는 워슬리 산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공업도시 맨체스터로 석탄을 운반하는 토목 공사로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1759년까지 장거리 운하가 없었고, 도로 사정도 아주 나빴으며, 석탄과 그 밖의 물자는 말 등에 실어 운반했었다. 동물의 등짐을 빌은 석탄 수송은 효율성이 너무 낮아 나날이 발전하는 공업 분야의 석탄 수요에 부응할 수 없었다. 이를 대체할 뭔가 획기적인 방안이 요구되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골몰하던 중 공작은 여행 중에 우연히 그 묘책을 찾아냈다. 남부 프랑스에서 100년 전에 건설된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랑그도크 운하를 본 것이다. 그 순간 그는 힘겨운 석탄수송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즉시 공사를 맡을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고용한 기술자 브린들리는 단순 기계 수리공에 불과했다. 선박 항행이 가능한 운하를 본 적도 없고, 운하 건설에 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럼에도 그는 공작이 전해준 대운하에 관한 정보 하나로 이 야심찬 계획에 뛰어들었다.

 

브린들리는 탄광과 맨체스터 사이의 드넓은 전원 지대를 관찰하고 나서 운하건설에 결정적인 두 가지 핵심 사항을 파악했다. 하나는, 운하는 강이나 어떠한 물줄기에도 연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기에 범람해 들어오는 강물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조건은 필수적이었다. 두 번째 요소는, 동일한 수평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저지나 고지에 수문을 만들지 않고 운행할 수 있다.

착상은 훌륭했지만, 쉽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맨체스터까지 운하를 관통시키는 데에는 어웰 강과 험한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한 것이다. 난관에 부딪쳐 그는 획기적인 설계안을 그렸다. 바로 강과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아치형 석조 수로교(水路橋)를 가설한 것이다. 길이 약 180미터, 폭 약 11미터, 높이 약 12미터의 대형 구조물이었다. 이렇게 공사를 하면 운하가 강의 수면까지 가닿고 다시 골짜기 높이까지 끌어 올리는데 수문이 필요 없어지게 된다. 착상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브린들리가 제안한 수로교 컨셉이 새로운 아이디어만은 아니다. 이미 2000년 전에 로마인들은 상수도용 수로교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박 항행용 수로교는 그때까지 영국에선 듣도 보도 못한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다른 기술자들과 일반 영국인은 다들 돌았다며 수군거리고 비아냥댔지만, 공작만은 브린들리의 건설안에 감동을 받아 적극 지원했다. 이에 고무된 브린들리는 자기의 확고한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1761년 운하는 마침내 개통되었다. 건설된 수로교의 외형은 아래쪽 강은 배가 왕래하고 그 위에 공중에 뜬 수로로는 석탄을 실은 운반선이 말이나 노새에 끌려 움직이는 식이었다. 누가 봐도 가히 ‘18세기의 경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1761년 브린들리가 개통한 고가식(高架式) 수도교가 착상을 남프랑스의 랑그도크 운하에서 찾은 것이라고 해도 그 원형은 세계 제국을 이룬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B.C.312, 로마의 기술자들은 제국의 수도에 식수를 공급하는 수도 건설을 위해 누구도 이전에 감히 상상치 못했던 대규모 건설공사를 시작했다. 문명생활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로마 수로는 9개가 구축되었고, 총연장이 400킬로미터나 되었다. 수로를 건설한 사람의 이름을 따 아피아 수로라고 불렸다. 그 뒤로도 대규모 공사는 계속돼 A.D.226년에는 마침내 11개의 수도교를 통해 매일 약 98800만 리터의 물이 공급되었다. 그 물은 로마에 사는 100만 시민의 급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로마의 목욕탕과 주방까지 공급된 물은 48킬로미터나 떨어진 야산 위의 수원지로부터 흘러나와 수로와 도관(導管)을 따라서 로마 평야 지점까지 운반된다. 그 뒤 여기서부터 생겨난 수압으로 다시 시내 곳곳에까지 일률적인 경사를 지닌 아치형 돌다리를 따라 연관(鉛管)이나 토관을 타고 집집마다 공급되었다.

 

      

  

(왼쪽)제임스 브린들 리가 설계하고 건설한 수로교(水路橋). 영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대운하이다. 건설 당시 다른 기술자들은 하늘에다 수로를 띄우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비아냥댔으나 브린들리는 수로교를 만들어 냈고, 당시 열악한 방수 기술 하에서 찰흙에 모래를 썩은 방수성 재료를 사용해 누수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오른쪽) 로마 근교의 가르의 다리는 로마 공학의 일대 성과로 수도교 위에 다시 다른 수도교가 걸려 있다. 실용성을 더한 까닭이다. 당시 로마의 기술자들은 A.D.52년에 완성한 클로디안 수도교의 상부를 이용해 아니오 노부스 수도를 통하게 하려고 했다. 오늘날까지도 전체적인 형태나 3단식 아치의 원형이 거의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이 수로교는 B.C.19년 프랑스의 님요새(要塞)에 급수를 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가르강 위의 높이 45미터를 떠받치고 있다. 이 수도로 산의 수원에서 로마로 하루에 19만 킬로리터의 물이 공급되었다.

 

 

로마에서 수로교 원리를 가져왔듯 세계 각국의 도로 또한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 각국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약 2500년 동안 쌓인 도로 공학의 산 경험장이었다. 그 원형은 로마의 도로에 있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등으로부터 도로공학 기술을 물려받아 이를 완성시켰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2200년 동안 도로는 제국의 동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로마공화정 초기 로마에서 외부로 통하는 데에는 네 가지 종류의 길이 있었다. 각도로는 폭이 30센티미터인 작은 것에서부터 2.4미터 크기의 국도까지 다양했다. 그러다 B.C.312년이 되면 도로 폭은 3.6미터 3차선 간선도로로 발전한다. 이 길을 따라 로마군단은 멀리 그리스, 소아시아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점점 로마제국이 강대해짐에 따라 도로는 더욱 연장되었고 폭도 넓어졌다. 기원후 2세기에는 29개의 당당한 군용도로를 포함한 총계 86336킬로미터에 걸쳐 도로가 개설되었다. 로마인의 마차는 멀리 영국에서 소아시아까지 뻗쳤다. “로마의 도로가 유럽을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길은 로마 대광장의 황금 이정표로부터 거리가 측정되었다. 그 중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부설시킨 폼페이의 도로는 적 침입 시 군대를 신속히 국경으로 움직이기 위해 부설된 것이었다. 또한 그 길은 상업과 통신을 d이어주는 경제의 길, ()의 혈관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제국이 수백 년에 걸쳐 건설한 유럽 간선도로는 기원 후 2세기경에는 유럽 전토,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까지 뒤덮는 8만 킬로미터의 장대한 도로망이 된다. 이 길은 지중해를 일주하고 전 유럽을 에워싸고 있다. 실핏줄 같이 얽히고설킨 이 도로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대부분 군용도로로 건설된 것이지만, 나중에는 수송과 상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제국이 몰락한 후에도 로마문화는 그대로 남았다. 나아가 로마식 도로공학은 훗날 전 세계 도로 건설의 표준이 되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토목기술, 축성술, 공공건물 건축법 등 건축 공학의 전서격인 저서 건축10권을 남겼는데, 첫 권에서 밝힌 건축술의 3원칙인 강도(firmitas), 편리함(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은 변함없는 토목건축 지침으로 쓰이고 있다. 제국을 이룩했던 오래 전 원형 지식이 살아남아 인류의 생활에 계속 영향을 마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인은 제국이 영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도로는 세심한 주의 하에 포장되었고, 말이 달리기 편하도록 경사를 줄였다. 또한 모든 길은 지형이 허용하는 한 직선으로 뻗게 했다. 이를 위해 다리를 놓거나 제방을 쌓았고 산을 깎고 터널을 뚫기도 했다. 로마의 기술자들은 또한 흙이나 잔돌, 또는 부순 바위를 표면을 두 겹으로 깔아 노상을 받쳐주었다. 부순 돌이나 자갈을 깐 길 표면은 배수를 위해 약간 경사지게 해놓았다. 도로 부설 시에는 기초를 2.4미터나 깊이 파서 낮은 운하처럼 만들고 그 위에 모르타르로 접합한 주먹 크기의 돌을 넣고 두께 30센티미터 정도로 다진 다음 쇄석(碎石)모래석회화산토로 만든 콘크리트를 30~35센티미터 채워서 굳혔다. 이런 하부 구조 위에 현무암과 같은 석판석괴(石塊)를 깔았다. 그리고 도로 측면에는 배수구를 만들었다. 이것이 로마 시대 간선 도로의 표준이었다. 이것은 약 60센티미터 밖에 파지 않는 오늘날 도로에 비하면 훨씬 내구성이 뛰어난 것이었다. 도로는 기동력을 가져다주었고, 로마의 법률, 상품, 사상은 전 서유럽 사회로 뻗어나가 5400만 사람들에게 미쳤다. 길을 놓는 민족만이 성()하다는 것을 입증해 낸 것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도로는 끊기고 방기된 채 16세기에까지 이른다. 유럽의 도로는 대개 18세기말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다. 이 상태를 깬 이가 스코틀랜드의 귀족 존 라우든 매캐덤이었다. 그는 브리스톨 시()의 전임 조사관으로 임명되어, 235킬로미터에 달하는 짐마차 도로와 주도(州道)를 유지하고 복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가 도로 건설에 나서게 된 것은 사업상 필요에서였다. 영국 서해안의 해군기지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선 도로 개선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개선하고자 15년에 걸쳐 틈틈이 종래의 도로 건설법을 연구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로마식 도로였다.

 

이 내구성이 뛰어난 도로는 1.2미터의 하층부 위에 다시 큰 돌을 놓은 것이었다. 시공법을 세분해 보면, 찰흙이나 회반죽 속에 돌 블록을 2층으로 깔아 튼튼하게 기초를 다지고, 다시 자갈과 모래를 겹치고, 마지막에 회반죽을 이용해 포장용 돌을 굳힌다. 그는 로마 도로를 자세히 조사해 자신만의 간단한 도로건설법을 만드는데, 이 방식은 직접 차량의 중량이 노반에 걸리도록 한 것이었다. 노반은 탈것에 의해 굳혀진 하나의 자갈층으로 포장되어, 노반의 건조 상태를 유지하게끔 되어 있었다. 현대의 도로부설도 이 같은 매캐덤 법을 본뜨고 있다. 오늘날 매캐덤 법은 전 세계 도로 건설의 기본법이 되고 있다. 현대의 도로가 그 옛날과 다른 점은 표면 처리를 해 불침투성을 높인 점뿐이다. 그렇지만 근본 원리는 옛날 로마 도로와 같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원형(原形)모델이라는 학술용어가 쓰인다. 도로 공법은 로마의 길에서 원형을 가져온 것이다. 인류가 쌓아 온 원지식(源知識)이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 기초가 되는 지식을 잘 캐서 반짝거리게 하면 쓸 수 있는 곳은 무한하다. 로마의 수로교는 목마른 자의 목을 축여 주었고, 그 길은 이후 유럽의 침략사와 문명 및 인도주의라는 상반된 등불을 밝혀 주는데 쓰였다. 인류사의 주요 순간에 민중들을 혁명의 광장으로 이끌어주기도 했다. 길은 놓여 있고, 우리는 쉼 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 서 있다. 어느 길속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어떤 역사를 선택할 것인가 만큼이나 크다. 모든 선택의 문제는 길과 함께 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