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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고대 수학에서 ‘지중해 열병’ 현상

by 전경일 2016. 6. 2.

고대 수학에서 지중해 열병현상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수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탐구했다. 그때로부터 수학은 염소수를 세거나 그릇 모양을 생각하는 식의 수()개념에서 보다 수학적인 게 되었다. 수학 본연의 순수학문으로 자리 잡으며 수학다운 수학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수학은 급진전 돼 그리스인들이 이름 붙인 피라밋형, 원추, 육각기둥, 원기둥, 입방체 등의 명칭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쓰이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수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발칸 반도에 진출해 그곳에 남아 있던 중동문화와 오랜 세월 축적된 수학적 지식을 통째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고대 수학적 지식을 흡수한 그들은 곧 점, , 면과 체적 등 수학이 가지는 간결성과 시각적 아름다움에 본능적으로 매료되었다. 기하학의 탄생이다.

 

그들은 기하학 속에 감추어진 추상성을 파악하고자 했다. 여기에 뛰어든 첫 주자가 탈레스(B.C. 625~B.C.547)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식민지인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 밀레토스에 살고 있었다. 직업은 올리브유 장사꾼이었다. 당시 이오니아는 그리스 식민지로 상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가 상인이라는 건 그리 특별할 바가 아니다. 또 지중해를 오가는 선박을 통해 무역을 한 그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근원을 []’이라고 한 것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물은 스스로 변화하며 만물을 형성한다. 이오니아 지방 사람들은 변화와 호기심으로 세상을 응시했고, 그런 특성 때문에 탈레스는 장사를 하러 이집트에 갔다가 우연히 고대 수학 지식을 접하고는 장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는 수학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이다.

 

탈레스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다음의 우화를 들려주면 곧 무릎을 칠 것이다. 젊었을 때 탈레스는 상인으로서 당나귀 등에 소금 자루를 실어 소금 광산으로부터 해변까지 실어 날랐다. 강을 건널 때마다 한 당나귀가 소금을 녹게 하기 위해 일부러 넘어지자, 하루는 소금대신 솜을 지게 해 버릇을 고쳤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꾀부린 당나귀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다. 생각해 보면 이솝(B.C.620~B.C. B.C.560)이 살았던 시기와 탈레스 살았던 시기는 대부분 겹치고,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솝은 사모스 섬의 이아도몬란 사람의 노예였다는 점을 참고해 볼 때 밀레토스와 사모스는 이오니아에 속하면서도 지근거리였다는 점에서 이솝이 이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또는 후대(後代)의 기록엔 이솝이 프리기아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경우에도 탈레스의 일화를 들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추론해보면, 탈레스는 이솝이란 이야기꾼을 의도치 않게 만나 하나의 이야기로 남게 된 것일 터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꾀를 부리다 곤혹당한 당나귀 얘기만을 기억할 뿐이지만.) 혹은 탈레스가 공부를 하기 위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이라크)로 여행을 다닐 때 우연히 흘렸던 얘기가 돌고 돌아 멋진 스토리로 재탄생된 것일 수 있다.

 

아무튼 수학에 심취한 탈레스는 몇 가지 정리를 내놓고는 다음 주자에게 수학이란 이 골치 아픈 친구를 떠넘기게 된다. 그가 세운 정리는 (1)기름은 원을 이등분한다. (2)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3)만나는 직선에 의해 생긴 맞꼭지각의 크기는 서로 같다. (4)한 변과 양 끝 각이 같은 두 개의 삼각형은 서로 합동이다(같다). (5)반원 안에 그려지는 삼각형은 직감삼각형이다, 같은 것들이다. 이 같은 정리를 통해 수학사의 궤적을 남긴 탈레스는 B.C.600년에서 550년경 무렵 저 태양의 지중해에서 활동하며 족적을 남겼다.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사람이 그리스인 피타고라스(B.C.582?~B.C.497?)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모스 섬에 살다가 탈레스의 권고에 따라 수학적 시야를 넓히기 위해 23년간이나 이집트로 유학을 떠났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페르시아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자 불행하게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여기서 또 12년을 보냈다. 이 시기 피타고라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승려들로부터 많은 자료를 얻었는데, 그것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옛 수학 지식을 계승한 사람들이 사제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피타고라스는 이탈리아 서해안에 있던 그리스 신흥 식민도시 크로토나로 옮겼다가는 그 후에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 시기가 대략 B.C.540년경이다. 그는 여기서 종교색 짙은 수학 연구소를 열었다.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수에 대한 신앙과 영혼이 사람으로부터 사람으로, 사람으로부터 동물로 전생(轉生)한다는 믿음을 가르쳤다. 또 자신의 저작과 발견에 대해서도 모두 피타고라스 교단(敎團)이라고만 서명했다.

 

피타고라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2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이른바 ‘3평방의 정리. 이 정리는 실은 그보다 1000년 전 바빌로니아인들이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피타고라스학파가 비로소 증명해 낸 것이다. 이 정리는 숫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목수들이 방이 완전한 직각으로 되었는지 확인하는데도 이 정리는 쓰인다.

 

피타고라스는 정수의 매력에 푹 빠져 전 우주는 이러한 정수비 위에 성립됐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는 정수를 완전수또는 친애수(親愛數)’의 범주에 넣으려고까지 했다. 또 우수를 여성, 기수를 남성으로 보고, 1은 수의 출발이라는 뜻에서 별격으로 다루어 최초의 여성수 2와 최초의 남성수 3과의 합인 5를 결혼을 나타내는 기호로 삼으려고도 했다. 다분히 종교적 의미가 짙다. 이런 피타고라스는 난적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정수와 분수를 아무리 써도 무리수로 된 직각삼각형의 변의 길이의 비를 정수의 비로 대체할 수 없는 아주 골치 아픈 문제였다. 예컨대, 1-1- 처럼 불완전한 직각삼각형이 그런 경우다. 이로 인해 그리스인들은 기하학을 단순히 도형만을 다루는 데 쓰게 된다. 그는 탈레스와 달리 만물의 근원을 ()’로 보았으며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길고 긴 영향을 미쳤다.

 

피타고라스 이후 등장하는 이가 자연 속에 언제나 나타나는 무한의 개념을 감안하지 않으면 진실을 추구하지 못한다고 한 그의 제자 제논(B.C.490?~B.C.430?)이었다. ‘제논의 역설(Paradox)’로 유명한 그는 엘레아 사람으로 (1) 사람은 경기장을 건널 수 없다. (2)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3) 빨리 달리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 (4) 반분의 시간은 그 배의 시간과 같다는 네 개의 명제를 남겼다.

 

이 무렵,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한다. 이로써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그리스 문화의 새로운 도시가 탄생한다. 이제 수학은 알렉산드리아로 넘어가고 여기서 B.C.300년경 저 유명한 기하학의 대가 유클리드(B.C.330?~B.C.275?)가 등장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가 왕에게 학문에는 왕도(王道)가 없다고 한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에 의해 기하학은 드디어 완성된다.

 

그 뒤 알렉산드리아 건너편에 위치한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의 거리에서는 유레카! 유레카!(알았다! 알았다!)”라며 벌거벗은 몸뚱이로 소리치며 목욕탕을 뛰어나간 한 정신 나간 사내가 등장했다. 무한한 존경과 애정이 솟구치는 인물 아르키메데스(B.C.287?~B.C.212)였다. 그는 천문학자 피디아스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 이집트 유학 중에는 나선식 펌프를 만들었다. 당시 문화의 중심지이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연구소 무세이온에서는 수학자 코논에게서 기하학을 배웠다. 그 뒤 시라쿠사로 돌아와 많은 수학 관련 책을 썼다. 그가 시라쿠사왕 히에론 앞에서 긴 지렛대와 지렛목만 있으면 지구라도 움직여 보이겠다고 한 것은 은이 섞인 위조 금관을 증명해 보인 것만큼이나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다. 수력학(水力學)의 기본법칙이 여기서 성립되었다.

 

  

 

 

그리스 수학의 무대는 지중해로 동서를 잇는 각 지역에 퍼져 있다. 제논은 이탈리아 엘레아, 피타고라스는 크로토나, 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아 시라쿠사, 탈레스는 소아시아 밀레토스, 유클리드, 아폴로니우스, 히파티아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각각 활약하며 그리스 수학을 꽃피웠다. 이들은 여러 이유와 경로로 각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고, 알렉산드리아와 같이 지식의 집결지를 찾아 토론하며 지중해 수학을 탄생시켰다. 비록 당시 바다는 지중해로 한정되었으나, 그 뒤 지중해 수학은 외해로 뻗어나갔고, 오늘날에는 우주로까지 인류를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탁월한 수학적 업적을 남겼지만 아르키메데스는 70 고령의 나이에 시라쿠사의 연례행사인 바쿠스 축제날 밤에 한 로마병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때 그는 뜰의 모래 터에서 기하학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로마인들 속에 창조의 불빛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수학의 세계는 수백 년 동안 황폐화 되었고, 그리스인의 뛰어난 두뇌에서 나온 기하학까지도 먼지 속에 묻혀 버리는 암흑시대를 맞이한다. 로마인은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각종 투석기·기중기 등 지렛대를 응용한 신형무기를 채용하면서도 그 뿌리인 수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 간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르키메데스의 창조적 연구의 전통을 고수한 것은 학대받던 수명의 그리스인뿐이었다.

 

아르키메데스와 동시대, 한 개의 평면이 한 개의 원추와 만날 때 그 단면에 원형, 타원형, 포물선, 만나는 두 직선, 쌍곡선 등 여러 모양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 수학자는 그의 친구이자 경쟁자인 아폴로니우스(B.C.262?190?)였다. 그의 유명한 원추곡선론은 원추 절단면의 성질을 연구하여 그 상호 관계를 밝힌 것으로 원뿔의 단면에서 태어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별반 특이해 보일 것 없는 이 발견은 훗날 위력을 발휘해 총알이나 대포의 발사각도, 위성과 달의 궤도와 중력과의 상관관계 등 현대 과학이 풀 문제들에 대한 앞선 답이 되었다. 아폴로니우스는 아르키메데스보다 25세쯤 연하로 소아시아 지방의 페르가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도서관 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제 그리스 수학의 마지막 주자는 히피티아(A.D.370~415)로 옮겨간다. 그녀의 아버지 테온은 알렉산드리아 대학 수학과의 저명한 교수로서 후에 그 대학의 책임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런 연유로 히파티아는 유년기를 뮤지엄(Museum)이라는 연구소와 관련을 맺으며 자라났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에 목마른 학자들이 모여드는 전당이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진리 탐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녀가 이룬 수학적 성취는 알마게스트, 산학, 원뿔 곡선론과 같이 당시 유명한 책들에 대한 주석을 단 것으로 알려진다. 그녀는 A.D.400년께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이교도인 그리스인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대주교인 키릴루스의 미움을 받아 광신적인 기독교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로마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그 명저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렇게 이때의 비참한 상황을 기술했다.

 

수레에서 내려진 그녀는 알몸인 채로 교회당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녀의 육체는 날카로운 굴 껍질로 도려내어지고 경련하는 육체는 화염 속으로 내던져졌다.”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은 이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미모를 지닌 천재 여성 수학자를 죽음으로 끌고 간 것이다. 그것은 수학과 여성을 동시에 장사(葬事)지낸 것이었다. 히피티아가 하였다는 말인 여러분이 그 어둠속에서 살게 되면 머지않아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은 그녀가 겪게 될 처참한 상황을 예견한 것이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과학과 철학은 시들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지적인 풍토는 완전히 사라진다. 무지와 야만이 광포한 폭력을 휘두르고 난 뒤에 남은 것이라곤 기나긴 절망적 암흑 밖에는 없었다.

 

그 후 수학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위대한 수학의 정신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100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 같은 일련의 고대 수학 변천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게 있다. 고대 그리스 수학의 선구자들의 연고지는 지중해 동서를 잇는 지역에 산재해 있는데, 이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지중해를 둘러싸고 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일까? 답은 간명하다. 당시엔 그곳이 세계였기 때문이다. 지중해는 전체 해역 면적이 250만 제곱킬로미터로 전체 지구 해양 면적(36105만 제곱킬로미터)의 불과 0.6퍼센트 밖에 안 된다. 당시 선박으로도 웬만한 거리는 한 두 달 내 다다를 수 있다. 이 조밀한 지역에 집약된 지식은 압축적 힘을 발산하며 타 지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바다라는 열린 공간에서 그들은 소식을 주고받았고, 타문화를 받아 들였다. 서로 공통되는 사실을 뽑고 문제를 내고 원리를 찾았다. 장사를 위한 수적인 계산은 이들의 논리력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이런 개방적 환경이 이들 천재수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더불어 이들은 배움을 위해 세계를 도는 지식순례를 자의든 타의든 했고, 학문적 후원자들과 멘토를 만나 상호 지적 유대를 다져나갔다. 지리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지성이 모이는 알렉산드리아 같은 지식 교류의 장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지식은 교환되었고, 더 정교하게 승화되었다.

 

이들이 찾아낸 수학적 원리는 이후 세계가 지중해 밖으로 확장됐을 때에도 계속 따라붙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주위를 따라 움직이기 있다. 오히려 세계를 더욱 확장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진리는 아무리 틀어막아도 번져나가게 되어 있다. 이 말만큼 지중해 수학 열병현상을 대신해서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초라하고 궁색해 보일지라도 늘 진리를 따라 간다. 그 힘이 인간과 세상을 움직여 왔다.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