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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5억 마리의 토끼

by 전경일 2016. 6. 16.

5억 마리의 토끼

 

1859년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주 지일롱 근처의 한 가축 목장에는 영국인 식민지관리원에 의해 아주 깜찍한 야생 동물이 영국으로부터 운반되어 왔다. 이 토끼는 모두 24마리로 처음에는 모피나 육류 자원을 얻기 위해 들판에 방사되었다.

 

광활한 초지 대륙은 토끼가 살기에 그야말로 이상적인 낙원이었다. 그걸 반증하듯 야생토끼는 본래의 다산성을 발휘해 불과 3년 만에 급격히 번식해 목장 일대를 뒤덮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폭발적으로 늘어나 사막을 건너 북부와 서부까지 순식간에 퍼져나가더니 마침내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을 뒤덮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19세기 말 이 대륙의 남반부는 최대 숫자의 토끼로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다. 이들의 성장세를 계산해 보니 20년 동안 1년에 110킬로미터 이상의 비율로 퍼져나가 대략 5억 마리가 된 것을 알 수 있었다.(다 자란 암컷들은 해마다 40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인 팽창세였다.

 

토끼의 증가에 따라 매우 특이한 점도 아울러 발견되었다. 토끼는 독자적으로 확산된 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목양 산업의 확장과 비례해 토끼 수도 증가했다. 양의 방목수가 증가함에 따라 토끼도 더불어 증식되고 서식지도 확장된 것. 그러자 목초지는 더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양과 야생 토끼 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기에 이 두 동물은 서로 비례하여 증가하게 된 것일까?

 

그 까닭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생태계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짜여 있다는 것 밖에는. 또 양이든 토끼든 먹을 식물이 풍부하고, 더 많이 먹기 위해 분포 지역을 계속 넓혀 갔다는 것 외에는. 하나 더 꼽자면 목양업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관리되는 양의 이동과 함께 토끼 서식지도 확대되었을 거라는 밖에는. 대충 가능성을 이렇게 보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도 있다. 이 두 동물이 대륙 남반부의 토지와 식물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이 두 동물의 먹이 습성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토끼는 어린 나무뿐만 아니라, 성장한 큰 나무의 껍질까지 갉아먹어 말라죽게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둘 중 어느 한 쪽만 있어도 식물에는 엄청난 피해를 줄 게 자명했다. 그런데 양쪽이 함께 있자 그 피해는 더욱 파멸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좋았던 방목지는 곧 먼지바람이 풀풀 날리는 사막이 되어버렸고, 면양도 최성기 숫자의 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토끼의 증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가 포착되었다. 그들의 행동이 이동성 메뚜기의 행태와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일단 무리를 지어 아무 목적지도 없이 배회하는 것처럼 넓은 땅을 가로질러 다녔다. 언제나 대형을 흩트리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목초를 휩쓸어 먹어 치워 버렸다. 식물은 어디서고 뿌리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토끼의 습성도 바뀌어 졌다. 토끼는 본시 몸에 필요한 수분을 대부분 식물성 먹이에서 얻기 때문에 물을 마실 필요가 좀처럼 없다. 하지만 5억 마리 이상의 엄청난 토끼 무리는 목초를 거의 먹어 치워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물을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토끼가 목초를 다 먹어 치우고 샘물을 고갈시켜 버리자, 사태는 더욱 심각하게 바뀌었다. 동물학자 스타아커 레오폴드에 의하면, 한때 남()오스트레일리아 북부지방에서는 목장주들이 1830킬로미터에 달하는 목장 경계에 철사망으로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를 따라 토끼가 도상용 함정에 빠져 죽도록 해두었으나(이른바 토끼 이동 방지 울타리’), 몇 백만 마리의 토끼 대군은 도살용 함정을 순식간에 채워 버리고는 시체의 산을 넘어 목장으로 넘어 들어왔다. 이런 사태는 토끼가 가는 곳마다 똑같이 벌어졌다. 이처럼 토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남부와 중앙부를 거의 휩쓸었고 그에 따라 풀은 씨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런 현상이 근 1세기 동안 계속 되었다

 

토끼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드디어 토끼를 절멸한 방책이 강구되었다. 야생동물연구가들에 의해 토끼를 퇴치하는 무기로 감염성 바이러스 질환인 점액종증(粘液腫症)이란 토끼 전염병이 도입된 것이다. 그때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토끼의 번식을 억제하고자 여러 가지 병의 도입이 시도되었으나 별 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런 까닭에 점액종증이라는 전염병이 도입된 것이다. 이 토끼 병은 원래 브라질에 있던 병이었다. 이걸 도입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일종에 생물 병기에 해당되는 토끼 퇴치 무기를 만든 것이다. 점액성 바이러스는 남아메리카의 솜꼬리토끼에는 가벼운 병을 일으키지만, 유럽 토끼에 대해서는 극히 높은 치사율을 보인다.

 

병은 모기를 매개로 해서 토끼에서 토끼로 전염되었다. 이번에는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몇 백만 마리의 토끼가 죽었고, 1950년에 들어서자 90퍼센트 이상의 치명률로 2년 만에 근 5억 마리가 폐사되었다. 1965년이 되었을 때 토끼 수는 인공 감염 이전의 20퍼센트 정도 숫자를 유지하며 토끼와 점액종 바이러스가 평형을 이루게 되었다. 처음 토끼가 들어왔을 때의 무서운 번식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절멸하는 것 같던 이 야생토끼는 2~3년 뒤부터 질병에 저항력이 생겨 1990년대까지는 토끼 수가 다시 약 3억 마리로 급증했다. 전염병에 대한 내성이 생김으로써 얼마든지 대군으로 불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토끼 수가 줄었다고 해서 토끼 본래의 번식력이 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1995년에는 토끼 출혈병이 번져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2003년까지 토끼 수의 85퍼센트 이상이 다시 격감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토끼를 절멸시키기 위해 점액종증을 도입하였던 것은 다분히 계산된 의도였. 그러나 이런 의도는 다른 포유동물에 감염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시행된, 실은 매우 위험스러운 조치였다. 그 전에도 토끼를 없애고자 하는 다른 시도도 있었다. 즉 토끼를 잡아먹는 생태계 상위에 있는 동물을 수입한 것이다. 흰 담비, 족제비, 담비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인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입 동물은 토끼를 잡아먹기보다는 오히려 소형 포유동물이나 토착 새 따위를 잡아먹으며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예를 들어 1860년대에는 수렵용 동물로 붉은 여우를 들여왔으나, 붉은 여우는 순식간에 대륙 전체에 퍼져나가 닥치는 대로 토끼가 아닌 토착 포유류들을 먹어 치웠다. 인위적 조치가 생물학적인 균형을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한동안 토끼가 없어지자 이번에는 식물이 놀랄 정도로 퍼져나갔다. 녹지가 늘어나자 생태학적 부활에 걸맞게 면양의 방목도 늘어났다. 하지만 토끼 사태를 통해 배운 바가 있다면 방목을 어느 정도 할 것인지 목장주는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예전처럼 토끼가 불듯이 면양수가 지나치게 늘어난다면 다시 초지는 황폐해지게 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육식 동물의 번식은 그것의 먹이가 되는 동물의 번식 여하에 달려 있고, 또 먹이가 되는 동물은 식물의 생장에 의존적 관계를 가진다. 이 생명의 피라미드에 놓인 각 층은 어느 것이나 먹이라고 하는 토대의 번영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저에는 무참히 짓밟혀도 잎을 키우는 저 대자연의 초지가 있다.

 

5억 마리 성가신 토끼는 우리에게 적잖은 교훈을 던져준다. 먼 오스트레일리아 얘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얘기이다. 생존과 결부된 이 이야기의 단초는 얼마 전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기사에서 단초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신문은왜 후라이드치킨이 한국경제에 타격을 주는가?라는 제하에 한국 치킨 집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5000개의 치킨집이 망하는 가운데 7800개가 새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망하는 치킨 집은 결과적으로 가계 부채를 늘리고, 이는 한국 경제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궁금증이 인다. 퇴직자들은 왜 그리 많은 치킨 집을 또 차리는 것일까? 이런 쏠림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치킨집이 단순히 많은 수의 퇴직자들이 관심을 갖는 자영업 분야라서 그렇다고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이 같은 현상의 본질은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성을 위한 공동의 목적을 상실했다는 걸 보여준다. 서민들이 마땅히 차릴 가게가 그것 밖에 없다고 푸념하는 것은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가 철저히 자본의 논리 하에 속박되어 있는 걸 뜻한다. 또한 서민경제가 이미 해체된 것을 뜻한다.

 

이미 대기업은 강력한 자본과 마케팅으로 골목상권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다. 한동안 떠들썩했던 빵집논쟁은 이 한가운데 있다. 서민들이 서 있는 소규모 경제의 지반침하 현상은 궁극적으로 모든 소비계층을 없애 버리는 결과를 불러온다. 이 시대를 휘젓는 광포한 욕망은 야생토끼처럼 한 뼘의 초지도 남겨두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불균형의 생태계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게임이라는 점을 가진 자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불행의 전조는 아주 뿌리 깊다. 세계사적 비극의 조류가 우리 앞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흔히 동물의 무리 중 조류 사이에 벌어지는 우위 경쟁을쪼기 순위(pecking order)라고 부른다. 죽음까지 가는 이 치열한 경쟁에서조차 원칙은 있다. 어떤 종의 동물 집단은 개체의 우열순위가 형성되어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 지도자는 최우선으로 먹이나 배우자를 차지할 권리를 갖는 대신 적극적으로 그 무리를 보호할 책임을 진다. 어떤 자연계도 자신의 세력권내 생태계를 무분별하게 짓밟기만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들 집단은 인간 사회보다 어떤 면에서는 상생적 관계가 더 잘 성립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 승자승만이 계속 되풀이 된다면 결국 승자조차 없어지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급격히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 있다. 여기엔 극단적 탐욕이 주축을 이루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써 혁신, 성장, 분배가 결합한 상생적 나침판도 제시되고 있다. 어느 사회나 균형을 가져오는 협력, 동반, 공존의 우호적이며 온건한 사고는 극단으로 치닫는 걸 막아준다. 사회적 기여와 배려의 전략을 취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성장과 지속성을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편향은 죽음 직전까지 달리는 불타는 열차와도 같다. 누구도 같이 마시는 우물에 독약을 푸는 야만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생태계에서는 누구도 외로운 늑대처럼 혼자만의 독생(獨生)을 부르짖을 수 없다. 경제 생태계에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감시자들, 참여자들이 있다. 만약 누구라도 초지를 다 먹어치우려 든다면, 그런 토끼는 축출해 버려야 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