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상호 연결할 때 조심해야 할 것들

by 전경일 2016. 12. 19.

상호 연결할 때 조심해야 할 것들

 

인류의 오랜 소통 역사상 1858년은 매우 중요한 해를 장식한다. 뉴펀들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최초의 대서양횡단 해저케이블이 부설된 것이다. 바다 밑 3200킬로미터에 깔린 이 케이블로 인류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상호 연결에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 전의 통신수단은 선박에 의한 우편물 전달이 고작이었다. 이 같은 방식은 항해의 위험 및 기상 조건에 따라 수주일 씩 지연되곤 했다. 그런데 무한한 과학의 진보로 분리되어 있던 두 세계가 마침내 전신(電信) 기술로 만나게 된 것이다.

 

해저 케이블이 처음 부설되었을 때, 두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얼마나 흥분이 대단했는지 양쪽 사람들은 곧 서로의 손을 맞잡은 듯 심리적으로도 가까워졌다. 이를 반영하듯 첫 발신 메시지는 위대한 신에게 영광이 있을지어다. 지구의 평화와 인류의 선의에 영광이 있을 지어다라는 기독교적 세계의 거창한 문구였다. 그만큼 사람들은 이 역사적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기대감은 단 하룻밤 만에 날아가 버렸다. 400여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케이블은 끊긴 것이다. 이 구간에 다시 제2케이블이 설치된 것은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1866년에 들어서였다. 그때야 두 대륙은 온전히 상호 연결된다.

 

대륙 간 케이블은 본격적으로 과학 시대에 접어든 19세기 초부터의 인류의 염원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장대한 물리적 장치를 밑받침해 준 것은 근대 기술이었다. 해저 케이블 성공으로 이후 인류는 유무선망을 통해 상호 연결에의 노력을 더욱 가속해 오늘날 가장 광범위하게 전 세계를 잇는 인터넷망과 유무선 네트워크를 세우기에 이른다.

 

  

  19세기 들어 해저 케이블 부설은 가장 큰 도전 과제였다. 1857년에서 1865년까지 9년간 다섯 차례 걸친 시도로 해저 케이블은 마침내 성공적으로 안착되고, 인류사는 처음으로 대륙 간 상호 연결에의 소통 시대를 맞이한다. 그 무렵 대륙 간 해저 케이블이 일으킨 변화는 오늘날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보급에 버금갈만한 것이었다. 영향 면에서 오히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해저 케이블은 전기(電氣) 사용법을 새롭게 제안했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착상으로 평가된다. 케이블 기술 자체로도 전기를 통한 의사 전달 기술이 가능한 걸 예고했다. 그 무렵 영국의 전기기술자 윌리엄 쿡, 실험 물리학자 찰스 휘스턴 및 미국의 기술자 사무엘 F.B.모스 등은 대서양 해저 케이블의 필요성을 주창하며 상호 경쟁적으로 전신기술 개발에 나섰다.

 

이를 반영하듯 1837년경에 이르면 전기는 에디슨 이래 전등을 밝히는 기능뿐만 아니라 소통 수단으로까지 쓰인다. 이른바 전기의 재해석이 이루어 진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기술 결합체인 전신케이블은 전기적 신호 전송 장치로 등장한다.

 

역사적 첫 도전적 과제는 1855년에 부설된 영국해협과 지중해를 잇는 몇 가닥의 해저 케이블 공사였다. 이 과제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기술자들은 더 큰 도전, 즉 아일랜드와 뉴펀들랜드를 잇는 대서양 통신선 부설에 나선다. 이 도전마저 성공하자 양 지역은 그야말로 해저를 통해 하나로 묶였다.

 

얼마 되지 않아 유럽 내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보다 원대한 계획으로 뻗어 나갔다. 새롭고 장구한 연결에의 과제 - 즉 대륙과 대륙을 잇는 숙제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이 대장정에 나선 이는 미국의 야심찬 기업가 사이러스 W.필드였다. 그는 영국기업과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1856년 대서양 해저통신선 부설에 착수했다.

 

이 대공사는 이전 공사에서 터득한 성공적인 경험을 계승했으나 거리나 기술면에서는 앞서 이룬 도전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압도했다. 아일랜드에서 뉴펀들랜드까지 장장 3200킬로미터의 거리는 그 어떤 해저케이블 공사와도 비교되지 않았다. 공사 구간에 쓰일 전선의 양도 막대하게 소요됐다. 당연히 케이블 부설에는 수많은 기술적, 재정적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자들은 케이블을 내리기 전에 음향 장치를 고안해 해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밑바닥이 날카로운 바위투성이나, 균열이 있다면 케이블은 끓어지거나 휘어질 위험이 있음으로 케이블의 안정적인 포설과 유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다음 문제는 전장 4000킬로미터나 되는 케이블을 어떻게 제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바다라는 자연 조건하에서 최대의 신축력과 최대의 강도(强度)를 지녀야 하고, 염화나트륨에 의한 부식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조건을 고려한 끝에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양의 케이블은 부피도 엄청나 102척의 배에 나누어서 실어서 운반해야 할 정도였다.

 

부설 작업 중 기술자들은 예기치 않는 무수한 장애에 부딪쳤다. 1857년과 1858년 두 차례에 걸쳐 부설한 케이블은 파손되어 쓸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작업은 중단되지 않아 18588월에 이르면 대륙 간 케이블은 마침내 완성된다. 양 대륙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뉴욕시에서는 성대한 축하 행진이 벌어지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미국의 제임스 부카난 대통령은 서로 축하 메시지를 교환했다.

 

그러나 케이블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통 후 3주일 동안 약 400통의 해저 전보를 통신한 후 신호가 약해지다가 끝내 끊기고 만다. 이 사태로 대중은 물론 투자자들도 하룻밤 만에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이때 포설하였던 케이블은 대륙 간 통신선 구축의 신기원을 기록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뒤 사고의 원인이 밝혀졌는데, 절연재가 소금물에 산화(酸化)되어 부식되어 끊긴 것이었다.

 

그 후 케이블 부설 계획은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난 까닭에 1865년까지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대륙 간 케이블에 대한 요구는 지속적으로 줄어 들 줄 몰랐다. 전쟁 중에도 갖가지 기술이 개발되었다. 남북 전쟁 중 미국이 이룬 가장 큰 기술혁신을 꼽으라면 소총의 성능 향상과 대륙 간 케이블 기술 발전을 꼽을 수 있다. 한 분야는 경제적, 인종적 편견에 맞선 도구 혁신이고, 다른 분야는 인류사적 소통을 가져 온 진화의 결실이다. 이때 비로써 산화 방지제로 처리된 케이블이 개발되었다.

 

또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은 검류계(檢流計)를 개발하여 케이블의 손상된 위치를 즉각 알 수 있게 했다. 이 발명품을 케이블을 풀어내는 장치에 연결하면 조류의 민감한 변화도 감지할 수 있어 손상된 케이블을 즉시 끌어올려 수리할 수 있었다. 기술 혁신과 함께 재정 상황도 나아져 대서양 전신회사는 자금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러자 다시 대공사가 벌어졌다.

 

    드디어 1865년 대서양에서는 한 척의 거대한 배가 케이블을 내리고 있었다. 이 배는 무게 4500, 길이 4800킬로미터의 케이블을 실을 수 있는 당시로선 전 세계에 단 1척 밖에 없는 배였다. 전장 211미터의 SS그레이트 이스턴 호가 바로 그것이다. 이 배는 두 개의 외륜(外輪)과 스크루 추진기를 돌리는 증기기관과 돛을 써서 움직였다.

 

 

그레이트 이스턴 호는 어마 어마한 선체에 설치된 세 개의 강철 탱크에 4300킬로미터에 달하는 케이블을 감고 포설 기어를 갑판에 장착한 당시로써는 가장 큰 배였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케이블 공사에는 숫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작업 중 케이블이 끓어지기도 하고, 거친 풍랑과 맞서야 하는 등 큰 수많은 도전 과제를 극복해야만 했다.

 

18657, 이스턴호는 아일랜드를 출발하자마자 케이블을 바다 속에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1900킬로미터에 갔을 때 갑자기 케이블이 끊어졌다. 케이블은 어둠 속의 심해에 영원히 잠겨 버렸다. 잃어버린 케이블을 찾고자 열흘간 해저를 뒤젓지만, 탐색대는 결국 부표를 띄워놓고는 철수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최초로 대륙 간 케이블 공사에 나섰던 케이블회사는 도산한다. 그럼에도 바다 밑의 영원한 링크를 위한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새로운 회사가 설립되자 그레이트 이스턴호는 다시 새 케이블을 뉴펀들랜드 전역에 풀어 넣기 시작했다.

 

수주일 후 이 배는 운 좋게도 지난해에 대서양에 빠뜨린 잃어버린 케이블을 찾아냈고, 이를 끌어올려 그 끝과 갓 개통한 코일 선을 이어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제2의 해저 케이블로 삼았다. 앞서 불운했던 실패가 온전히 복구되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대공사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져 1873, 1874, 1880년 및 1894년에는 또 다른 케이블이 부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어 미국과 유럽 각국은 서로 경쟁적으로 케이블을 깔아 상호 연결되는 새로운 통신시대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너무나 느렸던 통신 속도도 기술이 향상되었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할 것까진 없다. 1866년에 포설된 케이블은 단지 분당 8단어를 송신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것마저도 1858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16시간에 걸쳐 송신한 98자의 메시지에 비하면 속도가 80배나 빠른 것이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 대륙 간 케이블 속도는 분당 120단어를 보낼 수 있게 된다. 비록 느렸지만 지속적으로 승수 방식을 취하며 향상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이같이 더딘 속도가 불만스러웠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선박으로 가는 편지의 경우에는 수주일 뒤에나 받을 수 있었다. 또 그들은 새 소식이 도착하기 전까지 많은 친지나 지인들하고 지난 소식을 공유하는 넉넉한 시간을 가졌다. 오늘날 초당 2.4메가바이트의 인터넷 기본 속도에 비하면 공유 속도나 면적은 훨씬 작았을지 모르지만, 소통의 밀도는 대단히 높았다.

 

이 대서양 횡단 케이블 부설공사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전선을 해저에 까는 포설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거기엔 엄청난 지식이 들어가 있다. 숫한 분야의 전문가들, 예컨대 해운, 전기, 기계기술자, 물리학자, 해양학자들 등 당대 최고의 전문지식이 결합되어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지식과 기술을 갖고 참여하여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팀워크를 이뤘다. 이 초대형 공사의 성공 이후 이 같은 대규모 공학적 시도와 성취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만약 바다 밑을 투시해 본다면, 숫한 전선이 대륙과 대륙을 오가며 이어져 있는 게 보일 것이다.

 

오늘날 대륙을 잇는 해저 케이블 공사에는 또 다른 과제가 요구되고 있다. 예컨대 대륙 간 해저 광케이블에 상어가 끌리는 이유를 알아야만 하는 숙제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생물학자들이 동원되고 있다. 해저 케이블 문제는 단순히 공학적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게 있다. 1858년 케이블 개통 시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미국의 제임스 부카난 대통령 간에 주고받은 메시지다. 여왕은 여름 휴양지에 가 있는 미대통령에게 축하전문을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공익과 상호 존중의 우정 하에 양국 간 또 다른 연결이 이어졌군요.”

 

부카난 대통령은 이렇게 응수했다.

 

이 대업은 영광 이상의 승리입니다. 그 어떤 전투의 승리보다도 인류에 너무나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축복 하에 대서양 전신(電信)이 동질의 국가 간에 영구적 평화와 우정의 끈이 되도록 합시다. 이 장치가 전 세계에 종교와 문명과 자유와 법을 확산시키는 신성한 섭리가 되도록 합시다.”

 

첫 번째 대륙 간 케이블이 포설될 무렵인 1857년 미국에서는 오하이오 생명보험&신탁회사 뉴욕지점이 지불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 해 첫 몇 달 동안 뉴욕의 은행들은 예금이 줄었는데도 대부금을 늘림으로써 투기적 활동을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제 여건은 더욱 악화됐다. 공황 사태가 벌어지자 수많은 은행들이 줄도산 했다.

 

이 위기는 즉시 전신망을 타고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또 해저 케이블과 선박을 타고는 몇 시간에서 몇 주 내 유럽과 남미는 물론, 동양의 모든 나라들에게 파급됐다. 그리하여 세계 시장 전체로 확산되면서 역사상 최초의 국제 금융위기로 발전한다. 본질 면에서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꼭 같다.

 

이 시기, 대륙 간 케이블 부설에 누구보다 열성이던 영국은 제국주의를 더욱 공고히 해 네덜란드가 차지하고 있던 동인도 회사를 빼앗고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또 제국주의로 상호 연결된 유럽 세계는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약탈과 침략의 시대를 열어 나갔다. 그에 따라 동양은 침략 대상으로써 무참히 유린되고 만다.

 

한편, 미국에서는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그들은 내부적 통합을 위한 대장정에 한동안 정열을 소진했다. 전쟁은 보이지 않는 편견을 끓으려는 사람들과 이를 유지하려는 세력 간에 묵은 갈등이 표출된 것이었다. 물론 그 저변에는 경제적 이익의 불균형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은 서로의 이해를 반영하며 하나로 연결되고 뭉쳐서 조만간 드러날 다른 세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것은 크게 두 개의 징후로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태동과 오늘날의 지식경제’, ‘지식산업’, ‘지식노동자라는 말로 상징되는 임노동자로서 지식인의 자본가 진영에의 참여였다. 전신케이블이 깔리던 1867617일 인류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 기술자가 처음으로 독일의 지멘스(Siemens)라는 제조업체에 입사하면서 지식인이 기업에 취직하는 첫 스타트를 끊었다. 이 기술자의 이름은 프레드릭 본 헤프너 알트니치(Fredrich von Hefner-Altenech)였다. 그가 한 일도 유럽과 인도 캘커다 사이의 전신 라인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전반적으로 노동 조건이 점차 더 열악해지고 착취의 대상이 되며 서민 대중의 삶을 궁지로 내몰고 있었다.

 

이 긴박했던 시기, 유럽의 한곳에서는 머잖아 인류사적 운명을 바꿀 위대하고 담대한 인물 칼 마르크스가 작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대단히 중요한 불균등의 경제현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륙 간 케이블이 포설되며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질서를 꾀하는 가장 도전적인 시기에 이 모순이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증표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것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계급적 차별 대우를 받으며 한 끼의 밥을 위해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만 했던 당시 유럽 사회의 처참한 현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1857년 여름서부터 1858년 봄 사이 그는 며칠씩 꼬박 밤을 새워가며 미친 듯이 이 현상에 주목했다. 그 결과 그가 분석하고 만들어 낸 이론은 대륙 간 케이블처럼 가시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서서히 외부 세계로 이어져나가 향후 전 세계의 절반을 잇는 사상적 고리가 된다. 인류 역사상 그보다 강하고 질긴 유대의 끈을 지구상 절반의 사람들에게 보여준 예는 없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와 모순과 역사적 과정 속에서 그의 사상은 자리매김해 왔다.

 

오늘날 그의 사상만큼 1990년대까지 공산권에 속해 있던 나라들에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도 없지만 반면, 너무나 기이한 역전 현상으로, 그의 사상에 반대해 싸워 온 진영에서는 2008년 이후 더욱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없다. 이 같은 역전현상을 설명할 마땅한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역사 전체를 보기에 아직 시간이 짧고, 우리에겐 여전히 엄청난 제약이 놓여 있다. 한 시대 끝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고 연결되어 이후 사람들의 행로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엔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이 지난 간 뒤에도 너무 오랜 숙고의 시간을 요하곤 한다

 

해저 케이블이 등장한 이래 세계 곳곳에서는 엄청난 양의 전선(電線)이 깔리며 세상을 물리적으로 이어나갔다. 하지만 유럽과 미대륙을 이을 때의 취지처럼 사람들의 마음까지 우정과 상호 존중으로 연결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 점은 보다 분명해 진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조선 침략의 기회를 잡은 일본은 1884년 일본 장기(長崎) 및 대마도와 부산 간 해저전선을 강제적이며 독점적으로 부설하도록 압박한다. 이로서 전신을 통한 침략 행위는 보다 구체화된다. 당시 시공을 맡은 회사는 덴마크 대북부전신회사로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친 극명한 분야가 바로 해저 케이블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호 연결에의 본질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기술은 밝은 면만을 예고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현재 지구상 거의 대부분 사람들의 통신은 얼마든지 감청될 여지가 있다. 당신도 언제든지 감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미국 정보기관의 암약과 빅 데이터는 그 가능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내준다. 이쯤 되면 어떤 이들은 상징적으로 해저 케이블을 끊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거나, 상어의 맹활약을 기대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혹은 인류사의 운명을 바꿀 새로운 연결 구조를 갈망할는지도 모른다.

 

모든 연결엔 사상이 개입된다. 어떤 생각과 행동을 잇느냐가 중요하다. 그보다 어떤 생각과 행동이 뒤따를 때에라야 이어진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만 말이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