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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히말라야 등반에서 깨닫는 평범성의 가치

by 전경일 2016. 12. 29.

 

히말라야 등반에서 깨닫는 평범성의 가치

 

대한민국 경영자들 사이에 2000년대 들어 히말라야 원정 등반의 성공이 잦아진 까닭이 회자된 적 있다. 한 경제연구소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퍼뜨린 말인데, 이야기인즉,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 첫 등반에 성공한 이후 2차 등반은 10년 지나서야 이루어졌는데 최근 들어서는 일 년에도 몇 명씩 등정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공의 이유는 격세(隔世)를 느낄 법한 장비의 발달, 다양한 루트 개척도 원인이지만, 베이스캠프를 7부 능선에 치다보니 나머지 3부를 정복하는 시간이 훨씬 짧아졌다는 분석이다.

 

예전에 3부 능선쯤에서 시작한 정상 공략이 요즘 들어서는 정상 가까이인 7부에서 시작되다보니 출발부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경영에 빗대 기업은 경영 목표를 높게 세우면 세울수록 성공가능성은 그 만큼 높아진다고 말한다.(이른바 ‘start high for aim high’ 의 법칙) 누가 들어도 귀가 솔깃할 법한 얘기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다분히 효율성 중시의 미국식 관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럼에도 누구든 이 같은 주장에 쉽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혹할 정도로 높은 목표를 달성할 비책으로 보이지 않는가! 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상시적 경영 위기 상태에 놓여 있고, 특히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로는 정신적 공항 상태에까지 이르러 있다. 이 같은 도전으로 난국을 타개하는7부 능선 베이스캠프론은 설득력 있고 매력적으로 들리기조차 했다.

 

 

누구든 현실이 어려울 때에는 무엇에든 붙들리고 매달리는 법이다. 이 이야기는 약한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매우 주도면밀하게 파고들어 세일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같은 새로운 히말라야 등반방식이 먹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7부 능선에 베이스캠프를 치기 위해 공격조는 물론 짐을 나르는 셰르파(짐꾼) 들이 훨씬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힐러리 등반 때에만 해도 총 5톤의 장비가 362명의 셰르파들에 의해 운반됐다. 인도 북동부 다아치일링 보급기지에서부터 그들은 순전히 인력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3000미터급 고개를 몇 개나 넘고 다시 표고 1200미터의 무덥고 습도 많은 골짜기를 지나 240킬로미터 이상의 노정을 걸었다.

 

이 원정 때에는 34명의 셰르파만이 정상아래 1000미터의 제8캠프에서 그보다 조금 위에 제9캠프를 치는데 필요한 보급물자를 올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은 인간이 무거운 짐을 올린 최고 높은 지점이다. 힐러리와 덴징 노르가이는 바로 이 제9캠프에까지 전진해 1차 공격대가 실패한 바통을 넘겨받아 공략에 성공해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의 꿈을 이루었던 것이다.

 

고산에는 특별한 자연 환경이 놓여있다. 올라갈수록 고도와 더불어 공기는 희박해진다. 그에 따라 심대한 육체적·정신적 장애에 직면하게 된다. 익숙한 셰르파는 4300미터 이상에서도 잘 적응하지만 누가 됐건 인간은 5500미터를 넘으면 무척 고통에 시달린다. 약간의 힘을 들이는 데에도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며 체력 소비도 굉장히 크다. 여섯 발자국만 걸어도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멈추어 서야만 한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혈액은 진해지며 혈액 순환은 늦어지고 기온 저하로 동상의 위험도 증가한다. 7600미터 이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각을 보게 되어 마치 몽유병 환자와 같아진다.

 

서구인에게 에베레스트가 발견된 것은 1852년이고, 루트 발견은 1921년에야 이루어졌다. 최초 등반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32년 뒤인 1953년이었다. 1921년 이래 셰르파들이 최고 높이에까지 올라간 것은 조오지 레이 말로리가 등반할 때인데 이때 수 명의 셰르파들이 7000미터까지 동반 등반했다. 1924년에는 제5캠프 지점인 7716미터에까지 올라갔으나 눈보라 때문에 공격조나 셰르파나 퇴각했다가 다시 제6캠프를 8174미터에 설영했었다.

 

정상을 향한 캠프 설영은 정상 정복에 목적이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정상에 오른 뒤 일몰 전에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예정된 시각을 역으로 계산해 나간다. 만약 욕심을 부려 정복에만 집착하면 결과는 참혹해 진다. 등반대는 물론 애꿎은 셰르파도 위험에 처한다. 실제로 요즘엔 지구 온난화로 만년설이 녹고 있어 무른 빙산은 대부부의 셰르파들이 7부 능선까지 가는 위험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등반자는 7부 능선까지 높은 베이스캠프 타깃을 설정해두는 것이 문제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이 7부 능선까지 짐을 운반해 주면 나머지 3부만 오르고 나서 정상을 정복했다고 의기 충만하다면 산악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자연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도 아니다. 요즘의 등반가들이 하는 그 잘난 정상정복을 위해 7부까지 남루한 복장을 한 채 짐을 옮기는 셰르파들의 죽음이 이 철없는 경영전도사들의 현란한 말장난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이 혀를 함부로 놀리도록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모멸적인 것이다. 이 점을 깨닫게 되면 처음 ‘7부 능선론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곧바로 안타까움으로 바뀐다

 

오늘날 우리는 산을 오르는 진정한 의미를 애써 무시하고 정상 정복이라는 미명에 취해 목적 지향적으로 산에 오른다. 이런 자세는 정상에 오르고 나서 끝 모를 허탈감에 빠져들게 한다. 성과 이외의 삶은 목표 없는 삶으로 폄하되며, 생활 전반에서조차 경쟁적인 지표만이 모든 가치인 양 부각되고 있다.

 

인간 중심, 직원 중심의 자세보다 신자유주의의 산물인 주주자본주의만이 탐욕스럽게 이 사회를 끌고 다닌다. 기업은 다투어 과도한 목표치를 세우고 수많은 직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마치 경영효율성 제고인 양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며 맹신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식의 경영 행태가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선진 경영기법으로 칭송되고 있다. 많은 경우 아전인수 격으로 세상사를 해석해 대는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대다수의 희생을 전제로 한 특정 집단의 이익 추구는 사회 전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치 분야를 예로 들자면, 과거 독재 체제 하에서 특정인에게 국가사업을 양도하고 정치헌금을 수집하던 정경유착 방식이 진화해 이제는 국가자산을 사적소유화 하려는 교묘한 책동으로 바뀌고 있다. 공공 기업 효율성 증진을 위해 민영화를 추진한다고 떠들어 대는 것들이 대개 그렇다. 대부분 안정적으로 영구 수익이 될 수 있는 공항, 철도, 전력 등 플랫폼형 사업들이다.

 

이 같은 사유화 책동은 이미 전 분야에 걸쳐 벌어지고 있으며, 이미 완결되어 사적으로 지분구조가 전환된 기업도 적지 않다. 한국민이 창출해 낸 부가 영구히 소수지배계급의 손아귀로 넘어가 더는 복구되기 어려운 부의 소유·세습 구조를 만들어 내고, 국민 대다수와 그들의 자녀들은 그 기업에 급여생활자로 소속되는 신()신분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교활한 약탈 행위는 공용식탁에 놓인 음식에 침을 뱉어 다들 숟가락을 놓게 한 다음 자기 앞에 끌어 놓고 독식하려는 술수에 다름 아니다. 만약 그들이 공기업은 비효율적이다라고 언론을 통해 흘린다면 그렇게 지껄이는 본의는 주인 없는 공기업은 먹는 놈이 장땡이다는 속된 표현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공공기업의 비효율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지속적인 교육·훈련과 상벌 체계를 강화하는데 있지 민영화를 통해 특정 집단에 매각하여 국가 자산을 사적소유 체제로 전환시키는데 있지 않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교묘하고 악랄한 이 같은 책동은 늘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덧칠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한국의 서민들은 끝내 피가 빨린 채 고사하고 말 것이다.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이대로 가는 게 과연 행복한가?”

 

우리는 지금 내가 오르는 산이 혼자서 오르는 것인지 공동 등반을 위한 것인지 냉철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업의 경우 직원들이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7부 능선까지 짐만 옮기는 셰르파로 인식한다면 그런 사회조직은 암담하다.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이것은 같다.

 

21세기 들어 사회 한 축에서 활발하게 불붙는 나눔과 상생의 철학은 단순히 기능적 혁신을 뛰어 넘어 사회 전반의 구조적, 의식적, 체계적 혁신을 위한 틀로 진일보 하고 있다. 새 판에서 실행되어야 할 경영 방식은 과거 분별없는 카리스마가 칭송되던 때처럼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자세가 아니라, ‘어떤 희생도 줄이고자 하는데서출발한다.

 

직원들, 피고용인들은 격전의 세계화 현장, 기업 경영현장에서 죽어가는 총알받이로 쓰러져 가는 게 아니라 운명공동체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희생을 없애거나, 최대한 줄이면서 목표를 이루어 나갈 때 탁월성의 경영은 얻어진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의 행태는 인간의 본성과도 맞지 않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아독생(我獨生)의 사고로는 공존의 패러다임을 열어젖힐 수 없다.

 

밀리고 뒤쳐진 사람들에게는 손을 내밀어야만 한다. 무차별 경쟁만 난무한다면 그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삶은 뿌리 채 흔들리고 정신은 한없이 황폐해질 것이다. 이것이 공존에의 조건이다. 일례를 들자면, 1930년대 그레이트 플레인 초원에는 많은 방풍림이 심어졌지만 처음에는 어린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그 뒤 이들과 공생하는 균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공적으로 공생균을 뿌려주자 성공적으로 조림할 수 있었다. 공생이 나무를 살린 것이다

 

경쟁은 상호 발전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고객, 소비자, 국민 일반이 수혜자가 되어 누림으로서 기업은 성장의 발판이 다져지기에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본질 경쟁과 상관없이 구조조정을 통한 재무제표 개선이란 단맛에 취한 기업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구글, 고어텍스 등 탁월한 기업들에서 보이듯, 회사와 직원 간 상생 구도를 만들어 내는 기업만이 위대한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 영국의 생물학자 레이 렝케스터는 오래 전 인간도 조심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자칫하다간 우리가 꼭 그 신세가 될 수 있다

 

히말라야 셰르파들은 언제까지 등짐만 짊어진 채 묵묵히 7부 능선이 아닌, 9부까지라도 죽음을 불사하고 올라가야 할까?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산 중 길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될까? 이 같은 질문에 누군가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합당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경영은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과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런 가르침은 히말라야 산군 앞에 서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참고로 일화 하나만 소개하고 마무리 짓자.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두 사람, 즉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덴징 노르가이 두 사람이 정상에서 했던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들은 세찬 감격에 젖은 채 많은 사진을 찍고, 일찍이 이 산에 도전했다가 퇴각한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 (죽은) 말로리와 어빈의 발자취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윽고 그들은 정상을 내려왔고 등반대는 안전하게 방하를 향해 귀환 길에 올랐다.”

 

이 말에 답이 있다. 문명의 하계(下界)에서 철없이 7부 능선 운운하는 자들은 결코 모를 일이 있다. 사람들은 산에 오른 뒤 돌아와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지.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